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56화 (60/233)

“…난 심부름 온 건데, 넌 여기서 도끼 들고 뭐 하냐?”

“음, 후임을 대신해서 나도 심부름 왔어.”

“뭐? 네가 후임을 대신해? 거짓말하고 있네.”

“…음, 사실 어려운 일은 후임한테 짬 때리고 와서 시간 때우는 중?”

“아하, 그렇구나!”

‘…뭐야, 둘 다 거짓말인데 왜 이 말은 믿는 건데?’

왠지 모르게 열받았다.

* * *

이제 행군을 나가기까지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사이 빨리 원작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 행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했다.

‘이 사탕을 먹으면 된다는 건데.’

흑마술이 담긴 사탕이라 해서 처음에는 찜찜했는데, 막상 포장지를 까고 보니 정말로 평범한 사탕 같았다. 어린아이들이 먹을 법한 하얀 알사탕.

‘시장에서 파는 사탕에 흑마술을 불어넣은 건가?’

일단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더 망설일 시간도 없지. 나는 사탕을 한입에 쏙 집어넣었다. 큰 사탕 하나가 입에 들어가니 볼이 빵빵해졌다.

‘…이런 XX.’

사탕을 입에 넣자마자, 나는 이 사탕이 왜 흑마술이 담긴 사탕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사탕에서 아주 찜찜한 맛이 났는데… 음….

안 되겠다. 아무래도 이 맛을 설명하고 있으면 내 인생의 장르가 19금으로 변할 것 같으니까, 사탕의 맛에 대한 설명은 생략해야겠다. 참 고어하고 그로테스크한 맛이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기억을 떠올리라고 했지.’

찜찜한 사탕을 빠르게 녹이기 위해 입안에서 열심히 굴리며, 나는 머릿속에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의 내용을 떠올렸다.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

표지.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주인공이 흑발 남주 둘 사이에 둘러싸여 있음. 수줍어하는 표정임…. 그리고 두 번째 표지의 경우에는 초록색 머리카락의 남주와 갈색 머리카락의 남주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임….

아냐, 내용. 내용을 떠올리자.

내용. 대충 발랄하고 엉뚱하고 귀엽고 착한 여주와 네 명의 미친놈들의 이야기….

그런데 놀랍게도, 사탕을 굴리면 굴릴수록 내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다.

나는 이제 그 소설이 총 124화였으며, 외전 연재가 시작되는 날짜가 12월 18일이라는 것까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외전 연재가 시작되기 전에 빙의해 버렸지만.

‘여주 달린이 일하던 공작 성에 사는 영애는 정말 싸가지가 없군. 이런 놈들은 혁명의 맛을 봐야 하는데.’

내가 대충 스쳐 지나가며 읽었던 사소한 정보들까지, 모조리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내가 원하는 정보, 알타이르 혹은 유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

나는 머리가 찌르르 울리는 감각을 느꼈다.

내 머리 안의 무언가가 진동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건…

‘산체스가 말한 신호야.’

흑마술과 관련되어 있을 무언가가, 기억을 더 얻고 싶으면 무언가를 바치라는 듯이 거칠게 내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좋아, 그러니까 지금 말하면 된다. 내가 대가로 바칠 기억이 뭔지 말하면 된다고.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나는 내 가장 소중한 기억이 뭔지 안다. 이 세계에 온 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너무 소중해서 오히려 꾹꾹 숨겨 놔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바로, 원래 세계에서의 내 ‘이름’이었다.

‘그걸 버리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그게 맞다.

이 사탕으로 원작의 정보가 아니라 이전 세계에서의 나에 대한 기억을 더 되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이 있어 봤자 어디에 쓰겠는가? 이전 세계로 다시 돌아갈 방법도 모르고, 나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인지 이전 세계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내가 여기서 개고생한 게 아까워서라도 못 가, XX.’

…하여튼,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 세계에 살아갈 거고, 그러니 이전 세계에서의 기억은 완전히 지우는 편이 더 편할 것이다.

그걸 대가로 원작, 즉 이 세계에서의 내 ‘미래’에 대해 알 수 있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거고.

그러니까 이성적으로는 다 납득이 가는데….

‘싫어.’

내 ‘이름’은, 원래 세계에서의 ‘나’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는 이 세계가 고통스러울 때마다, 잠들기 전에도 몇 번씩 내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계에 온 뒤 단 한 번도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뱉어 본 적이 없었다.

그 이름은 내가 가지고 있는 어쩌면 유일할 소유물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미련해 보일지라도,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하며 이전 세계에 분명히 ‘나’라는 존재가 있었음을 되새겼다.

내가 그렇게 소중히 간직해 온 기억인데….

내 머릿속에 알타이르와 유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들 앞에서 여러 번 나를 두둔해 준 적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대놓고 나를 자신들의 라인에 태웠다. 이 세계에서 내가 만난 몇 안 되는 좋은 인연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전 세계에서의 내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그 이름을 정말 좋아했다.

‘그걸 버린다고?’

상상만 해도 두렵고 가슴이 아팠다.

…결국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무릎에 머리를 파묻었다. 이 동안에도 입 안에서는 계속에서 사탕이 녹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손 하나가 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아.”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손의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

사실 보지 않아도 손이 닿은 순간 누구인지 이미 알 수 있었다.

익숙한 체온이었으니까.

“아퀼라.”

“여기서 뭐 해, 사루비아?”

그가 사루비아의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이 왠지 서러워서,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왜?”

내 얼굴이 우울해 보였는지, 아퀼라는 내 앞에 마주 앉았다가 사탕 때문에 볼록해진 내 볼을 쳐다보았다.

“사탕이야?”

“응.”

“어디서 받았는데?”

“그냥, 알타이르 님….”

사탕 때문에 뭉개진 발음으로 내가 웅얼대고 있자니, 그가 손가락으로 볼을 콕 찔렀다.

“왜.”

갑작스러운 행동에 내가 습관적으로 눈에 힘을 주었지만, 아퀼라는 개의치 않고 내 볼을 유심히 쳐다보며 말했다.

“제대하면 많이 먹어 줘야 해.”

“…어?”

“너 볼 나온 거 귀여워.”

…정말 직설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솔직한 표현이 아퀼라답기는 했다. 그는 그저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냈을 뿐이니까.

“제대한 뒤에도 나 보려고?”

“…그럼 안 봐?”

아퀼라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진 게 느껴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목소리에서 나는 안심이 되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나 친구 없단 말이야.”

“응.”

“그래서 넌 계속 나랑 만나 줘야 해.”

국경방위군에 있는 동안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 X같은 공간에도 장점은 있는 법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는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고, 주위 사람들과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다.

그러나 제대를 하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난다.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나는 영영 정체되어 있을 거고, 이 세계에서 아는 사람도 없이 외톨이가 되겠지.

“내 동기는 너밖에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나랑 계속 연락해 줘야 돼. 나 친구 없어.”

“매일 만날 거야.”

짧은 대답이었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래서 진짜 어이없는 일이지만. 아퀼라의 그 대답을 듣고 나서.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나는 결심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내 이름.”

바로 그 순간, 흑마술이 작동을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책 한 권이 촤르르 펼쳐지면서 활자들이 나에게 와르르 쏟아져 내려왔고.

“아.”

잊어버렸던 원작의 내용이 문장 단위로 머리에 콕콕 박히고.

그 일들이 끝나고 난 뒤에야.

“…이제 없네.”

나는 이제 머릿속에서 이전 세계의 내 ‘이름’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 그래. 내가 이득을 보는 거래였다는 건 알지만, 그렇지만.

“이제 없구나.”

내 안의 커다란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감각이.

허전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구멍 나 있는 어딘가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그 기분을 차마 견딜 수가 없어서.

“날씨가 또 추워졌어.”

그래서 나는 그냥 아까부터 묵묵히 나를 기다려 주던 아퀼라에게 얼굴을 파묻었다.

언젠가는 이 추위도 사라질 거야.

잃어버린 이름 따위에는 비견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얻고.

다시 따뜻해지는 날이 올 것이다.

* * *

그렇게 좀 진정하고 난 뒤 여자 숙소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원작 ‘네미집’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달린이 입대했을 때, 원작에서의 사루비아는 죽었으므로 여자 숙소를 쓰고 있던 건 베니 혼자였다.

달린은 베니에게 그동안 혼자 숙소를 썼냐고 물었고, 그 질문에 대한 베니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응, 나 혼자야. 예전에는 두 분이 더 계셨는데, 그중 한 분은 지휘사관으로 진급하셨고…. 그리고 다른 한 분은…. 아니다.”

‘와, 대사까지 자세히 기억나네.’

역시 흑마술의 성능은 참 좋았다. 국가에서 금지한 이유가 있군. 원래 재미있는 건 다 중독되는 법이다. 국가에서 금지하지 않았다면 나도 흑마술 중독이었을지 모르지….

아, 본론으로 돌아가서.

원작 베니의 대사는 ‘남주들의 첫사랑이었던 사루비아의 죽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유리의 행방에 대한 힌트 또한 담고 있었다!

‘유리는 무사히 지휘사관으로 진급했어.’

그렇다면 이번 행군에서 사망한 게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알타이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