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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54화 (58/233)

#6. 작전명 78기의 모 상등병 구하기

산체스가 군 생활에 적응한 이후, 부대 생활은 나름 평화롭게 흘러갔다.

잠깐만.

‘평화롭게 흘러간다고?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지난 3년 반 동안 터득한 바에 따르면, 군 생활은 절대로 평화롭게 흘러갈 수가 없다. 그건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문장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내 계산에 따르면… 지금! 산체스가 군 생활에 적응하고, 3개월이 지나 새로운 신병이 들어오는 오늘!

‘이제부터 또 새로운 사건이 터진다!’

음, 그리고 내 예상대로 뭔가 사건이 터지긴 했다.

“아,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십니까?”

뭐, 신병이 베니에게 조금 무례하게 구는 정도?

하지만 나는 베니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나와 함께 있던 카론도 불쌍함이 담긴 눈으로 도리를 볼 뿐이었다.

“너, 뭐냐?”

왜냐하면 베니의 충실한 제자 산체스가 곧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감히 내 스승님에게 무례하게 굴다니.”

“스, 스승님?”

신병, 도리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산체스와 베니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베니에게 죄송하다는 인사를 수십 번쯤 하고 도망쳐 버렸다.

그 후로 신병은 베니를 볼 때면 히익 소리를 내며 피해 다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하군….’

산체스가 베니를 스승이라고 말했으니, 베니가 엄청나게 강한 인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뭐, 이번 신병도 잘 적응한 모양이니까 그걸로 됐지.’

그리하여 부대 생활은 다시 평화롭게 흘러갔다. 참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 * *

제대 D-2003일.

“뭐, 뭘 한다고?”

중대 본부에 심부름을 왔던 내가, 베타 소대의 동기 블루를 마주친 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만난 블루가 내게 전해 준 소식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것이었으니까.

“응, 우리 대대 행군 훈련을 한대.”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블루를 쳐다봤다.

‘XX, 신병 도리 이후로 당분간 조용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역시 군대는 평화로운 날이 없었다!

“행군이라니…. 이런 XX….”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물들로부터 국경을 지키는 게 전부인 우리가 왜 행군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블루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뭐, 만약 다른 국가와 전쟁이 터지면 우리도 동원되니까. 기본적인 훈련은 필요하지.”

그의 말에 따르면 국경방위군에서 행군은 2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훈련병이었을 때에는 장성들 간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어서 행군도 중지되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대대는 국경을 따라 행군을 진행할 거고, 우리가 비운 초소는 그동안 다른 대대가 파견을 나와 맡아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행군이라니….’

그래, 분명 원작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오기는 했다…. 비록 ‘원작’이라는 건 이제 나랑 너무 먼 단어여서 잊고 있었지만….

블루가 내 손에 붕대를 쥐여 주며 말했다.

“압박붕대야. 의무관이랑 좀 친해져서 받아왔어.”

“어디 쓰는 건데?”

“발에 감으면 좀 낫다고 들었어.”

역시 정보통 동기를 하나쯤 두면 군 생활에 참 도움이 되는 법이다.

결국 나는 압박붕대를 주머니 속에 넣은 채, 터덜터덜 걸어 소대로 돌아갔다….

* * *

소대로 돌아왔을 때, 이미 행군 소식을 전달받은 건지 소대는 난장판이었다.

“행군이라니…. 콜록, 콜록!”

그동안 모습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타로는 다크서클이 가득한 얼굴로 스윽 나타나서 절규했고.

“이런 XX! 군장! 군장을 싸!”

자라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면서도 목청을 높여 후임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꼭 이전에 드래곤이 나타나 긴급 마물 토벌을 나갔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보다야 목숨의 위협은 덜 받겠지만,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 XX.

내가 여자 숙소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가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외쳤다.

“어디 갔다 왔어? 빨리 베니가 군장을 싸는 것을 도와주도록!”

“넷슴다.”

이상하다, 왠지 데자뷔가….

그러면서도 나는 베니가 짐을 싸는 것을 착실하게 도와주었다. 물론 나도 베니와 마찬가지로 첫 행군이었지만, 그래도 마물 토벌로 쌓인 짬밥이 더 있겠지, 뭐.

“아, 베니. 양말은 더 넣어야 해.”

“예.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아니, 더.”

“이 정도면 됩니까?”

“아니, 더!”

“이 정도면…!”

“더어!”

특히 행군에서 양말은 아주 중요한 법이다. 베니는 혼란스러운 눈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내 말에 따라 양말 장수를 하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양말을 챙겼다.

“비스킷도 이 정도 챙겼는데, 이 정도면 됩니까?”

“더!”

“이 정도면…!”

“더 넣어! 더!”

우리는 한참 동안 끙끙대며 짐을 쌌고, 곧 거대한 군장이 완성되었다.

나는 군장을 보며 찜찜한 눈빛을 했다.

‘정말 저걸 들고 행군을 가야 하는 걸까?’

심지어 저기에 더불어 각자 주특기인 무기도 하나씩 들어야 했는데, 이때만큼 내가 총을 쓴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차라리 검이라면 허리춤에 찰 수라도 있지….

‘탈영하고 싶다….’

군장을 다 챙긴 나는 숙소를 나섰다.

아직 행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 주방에서 당을 충전할 만한 간식거리가 있다면 좀 얻어 와야겠다.

당이 떨어질수록 예민해지는 내 성격을 고려했을 때, 이번에야말로 블레어와 토피오를 능가할 만큼 인성이 파탄 날지도 모른다….

‘원작에서 행군은 어땠더라?’

원작 여주가 겪었던 일들은 대부분 내가 현실에서 겪는 것보다 훨씬 순한 맛이었다.

마물과의 토벌에서도 긴장감이 전혀 없었고, 죽거나 다친 부대원들의 잔혹한 묘사도 없었고, 특히 훈련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물론 그건 원작이 전체 연령가라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

내가 장담하건대, 지금 우리들이 겪는 전투와 부상을 자세히 묘사했다가는 19금 딱지가 붙을 것이 분명하다. 현실은 참 고어하고 그로테스크했다.

어쨌든, 그 순한 맛의 원작에서도 행군은 특별히 강조되어 묘사되었다.

원작 남주들은 달린에게 행군을 떠나기 전 행군의 요령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고, 행군에서 지친 달린을 잘 케어해 주었다.

‘윈터는 달린에게 행군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사고들에 대해 알려 주기도 했지.’

‘원칙’이라는 단어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 같은 윈터는 달린에게 행군에서 준수해야 할 사항들을 읊어 주었다.

그는 행군에서 지친 상태로 마물을 만나게 되면 죽거나 다칠 수 있으므로, 지쳤더라도 늘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확히 뭐라고 했더라?’

원작의 내용이 아주 희미하긴 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예전에 내 동기는 행군에서 마물을 만나 사망한 적이 있다. 평소라면 그깟 마물쯤이야 혼자서도 거뜬히 처리했겠지만, 상황이 좀 꼬였었거든.”

“아…. 행군이 그, 그 정도로 위험합니까?”

“내 동기는 다른 후임을 마물로부터 구하려다 사고를 당했지. 그렇지만 그건 이례적인 사고이니 너는 걱정할 필요 없다.”

이다음에는 달린의 ‘남을 걱정하는 마음’을 강조하는 대사가 이어졌던 것 같은데.

“윈터 님, 괜찮으십니까…?”

“뭐?”

“절친한 동기셨던 거 아닙니까…? 저는 다른 것보다도, 윈터 님이 괜찮으셨을지가 가장 걱정됩니다….”

‘그래, 대충 그런 내용이었지.’

나도 행군에서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 잠깐만.

‘윈터의 동기가 죽어?’

…잠깐만, 잠깐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 생각해 보자.

보통 국경방위군으로 입대한 아르콘은 훈련병 시기 때 가장 많이 죽는다.

이때 실력을 쌓은 아르콘이라 하더라도, 일등병 때 경계 근무에서 사망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했고.

그리고 상등병 때부터는 보통 자신의 목숨 걱정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 대사 속 ‘윈터의 동기’가, 내가 입대하기 전에 죽은 윈터의 동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동기들 중 그 누가 죽지도 않았으니, 크게 좌절했던 적도 없었지.”

얼마 전 함께 경계 근무를 설 때, 윈터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다. 지금까지 윈터의 동기들 중 그 누구도 사망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행군에서 사망한 윈터의 동기는, 알타이르와 유리 중 한 명이다!

그 둘 중 누구의 죽음이라도, 나에게는 꽤 충격적일 것이다. 나는 그 둘 모두를 나름 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막아야 해.’

적어도 난 이번 행군에서 누군가가 죽을 거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원작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원작을 비틀 때였다. 그게 바로 빙의자의 특권 아닌가.

‘일단 둘 중 누구일지 먼저 추측해 보자.’

원작에서 유리나 알타이르가 묘사된 다른 장면이 있었나?

나는 머리를 굴려 봤지만, 이 세계에 빙의한 지 한참 되었는데 원작의 내용이 자세히 기억날 리가 없었다. 내가 원작 ‘네미집’을 한 문장 한 문장 자세히 읽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달린이 입대하는 시기는 유리나 알타이르가 진급하여 다른 부대로 떠났을 시기이니, 추리는 더욱 어려웠다….

‘아예 방법이 없나?’

원작을 뒤틀려고 해도, 알고 있어야 뒤틀 수 있는 법이다.

내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머리를 붙들고 한참 동안 끙끙대고 있던 바로 그때….

“잠깐만, 기억이라면….”

…그때 대가에 대해 들은 뒤 외면하고 있었는데, 역시 그 아티팩트를 써야 하는 때가 온 것 같다.

“기억을 선명하게 만드는 사탕….”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거였다!

그 사탕만 있다면, 내가 읽었던 원작의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고 앞으로 원작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가로 손톱 열 개쯤 뽑히더라도 구하고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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