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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52화 (55/233)

* * *

…이리하여 산체스는 알타이르와 서열 정리를 마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문제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알타이르의 앞에서 놀랍도록 공손했고 상등병들의 말도 잘 들었지만, 여전히 일등병들과 훈련병들 앞에서는 불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일등병들한테는 대들지는 않는다고 해도, 특히 훈련병들의 지시 사항은 여전히 듣지 않고는 했다.

카론이 이번 달에 일등병으로 진급했기 때문에 산체스를 제외한 훈련병이라고는 자이든과 밀피, 그리고 베니가 전부였는데, 그들은 산체스가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에 전혀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니는 산체스에게 아무런 관심 없이 자신의 검술을 연마하는 것에만 집중했고 밀피는 원래 쫄보 중의 쫄보였으며, 자이든은 강약약강의 표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자이든 이 XX, 생각해 보니까 또 빡치네?

‘그럼 도대체 나는 산체스에게 아티팩트에 대해 어떻게 물어봐야 하는 거지?’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은 알타이르의 힘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알타이르는 나와 친한 만큼 내가 산체스와 대화를 하고 싶다고 부탁하면, 산체스에게 잘 경고해 두긴 하겠지만….

‘흑마술 아티팩트에 대해 대놓고 묻는 걸 걸리면 털릴 수 있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나는, 일단 아퀼라와 쓸데없는 대화나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다 보면 좀 머리가 맑아지긴 하니까.

“아퀼라.”

나는 연병장에 고개를 내밀고, 훈련하고 있는 아퀼라를 찾아냈다.

일과에 있는 훈련 시간은 끝났는데, 늘 성실한 아퀼라는 이렇게 일과 시간이 끝나고도 훈련을 하고는 했다.

“사루비아.”

나를 발견한 아퀼라가 얼른 검을 내렸다.

연병장 안에 고참들은 없었기에,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병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 오늘 새벽 세 시 근무야. XX 빡쳐.”

칭얼거리고 싶은 기분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퀼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문득 저 옆에서 훈련병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베니는 여전히 잘하고 있군.’

그녀는 밀피와 대련을 하고 있었는데, 누가 보더라도 밀피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곧 밀피의 검이 저 멀리로 날아갔다. 검을 놓친 밀피가 감탄했다.

“와, 베니. 너 진짜 빈틈이 없구나.”

“감사합니다….”

베니가 수줍게 웃어 보였다.

“역시 정말 잘하네. 그렇지?”

“응.”

그렇지만 내 말에 대답하는 아퀼라는 베니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만 듣더라도 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 낼 수 있었다.

나는 아퀼라의 눈빛이 향한 곳으로 슬쩍 내 시선을 옮겼다. 아퀼라는 늘 남들이 관찰하지 못하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해 내고는 했으니까.

‘산체스?’

아퀼라는 산체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베니를 쳐다보고 있는 산체스를.

산체스도 베니와 밀피의 대련을 본 듯했는데, 어쩐지 베니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아주 뜨거웠다.

“아.”

아무래도 베니는 산체스가 인정하는 강자에 속한 듯했다. 정작 베니 자신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쩐지 이전에는 무시하던 베니를 지금은 산체스가 뜨겁게 보고 있는 게 웃겨서, 나는 산체스를 조금 더 자극해 보기로 했다.

“베니!”

“아, 사루비아 님!”

내 외침에 나를 발견한 베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베니, 오늘도 열심히 하네?”

나는 웃는 얼굴로 베니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볍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오랜만에 네 검이 보고 싶은데, 오러 블레이드 보여 주면 안 돼?”

“아, 그러셨습니까?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응, 네가 제일 잘하는 거 말이야.”

나를 잘 따르는 베니는 즐거운 얼굴로 검을 들었고, 그녀가 ‘가장 잘하는 것’을 보여 줄 준비를 했다. 나는 그 틈에 즐거운 얼굴로 산체스를 흘끗댔다.

우리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베니는 두 손으로 검을 꽉 잡은 채 가만히 섰다. 곧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그녀는 가볍게 뛰어 몸을 높이 날렸고. 허공에서 검이 휘둘러지며, 그녀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쏘아져 나갔다.

보통 한 번에 큰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 내는 다른 아르콘들과 달리, 그녀는 짧은 오러 블레이드를 가볍게 연쇄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특징이 있었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그녀의 오러 블레이드는 가볍게 움직여 나뭇가지 세 개를 나무에서 베어 냈다. 그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놀라서 날아갔다.

“베니, 정말 잘한다.”

“감사합니다…!”

베니의 검술의 특징은, 고요하면서 정밀하다는 것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쏘아 보내면 큰 나무 하나를 베어 내며 주위에 흔적을 남기는 일반적인 검술과 달리, 그녀는 세 개의 나뭇가지를 베어 낸 것만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외에는 나무에 아무런 생채기도 나지 않았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이 전혀 다치지 않고 날아간 것.

검술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 정밀한 통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산체스 또한 좀 떨어진 곳에서 입을 벌린 채 베니를 보고 있었다.

‘이게 네 맞선임이다.’

나는 베니를 보며 좀 자랑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예전에 한참 베니를 챙긴 적이 있어서 그런지, 카론만큼은 아니지만 꼭 내가 키운 애를 보는 기분이랄까.

내가 뿌듯한 기분으로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산체스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베니 님.”

“어?”

산체스가 자신을 부를 줄 몰랐던 듯, 베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돌아봤다. 산체스가 뜨거운 눈빛으로 베니를 보며 말했다.

“부탁이 있는데, 더 어려운 것도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어? 어떤 거?”

“예를 들면… 날아가는 새도 겨냥할 수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산체스는 베니의 능력이 더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베니를 보았다. 아마 베니는 날아가는 새들도 가뿐히 땅으로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니는 예상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새를 베면 안 되지…. 이유 없이 동물을 죽이면 안 돼.”

그 말에 나는 좀 찔리는 기분이 되었다. 나는 첫날 총을 쏠 때 이유 없이 새를 겨냥했었는데….

“그런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않을 거야. 난 그렇게 생명을 해치려고 검을 배운 게 아니니까.”

베니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좀 더 양심이 아파져 왔다.

‘쟤 혹시 의도적으로 나 엿 먹이는 거 아니야?’

그러나 늘 착한 베니가 그럴 일은 없겠지….

그래, 어쨌든 오늘 일을 기점으로 산체스도 베니를 인정한 듯하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베니는 나를 잘 따르는 것 같으니, 내가 베니에게 부탁한다면 산체스와 멀쩡하게 대화하도록 도와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전개가 흘러갈 줄은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산체스를 굴복시킨 건 남주진들이 아니라 베니였다니….

‘남주들 전원의 남주력을 5씩 깎아 줄 테다.’

물론 그들 중 남주력이 양수의 수치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 *

“베니 님. 제가 하겠습니다.”

“베니 님. 뭐 도와드릴 일 없습니까?”

“베니 님. 그건 뭡니까?”

내가 예상했던 대로, 베니의 오러 블레이드를 본 후 산체스는 지겨울 정도로 베니를 쫓아다녔다.

그는 알타이르에게 하는 것보다도 베니에게 더 공손하게 굴었고, 베니는 산체스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그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흠. 계획대로 잘됐군.’

나는 그들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베니를 쫓아다닌 이후로, 산체스는 정말 모든 선임들에게 공손해졌다.

특히 베니가 나를 가장 좋아하기 때문인지, 산체스는 나에게도 아주 공손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론이 내가 시키는 일은 모두 자신의 것이라며 으르렁댈 정도였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그거 좀 이상한 발언이었네.’

어쨌든, 그리하여 우리 알파 소대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참 잘된 일이었다.

“베니, 요즘 네 맞후임이랑 잘 지내나 봐?”

숙소에서 유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내가 가볍게 말을 건네니, 갑자기 베니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잠깐, 이거 혹시 로맨스 전개인가?’

내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난 지금까지 산체스는 남주들의 강함을 증명하는 장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기대했던 로판 전개는 이미 깨졌지 않나.

‘…혹시 베니를 위한 로맨스 전개였나?’

XX, 이래서 내가 자의식 과잉을 방지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는데. 역시 내가 빙의했다고 해서 모든 게 나를 중심으로 돌아갈 거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아무래도 산체스는 베니와 로맨스 전개를 만들어 나가는 캐릭터가 틀림없다.

약해빠진 평범한 여자들 대신,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한 강한 여자. 다른 여자들과 너는 다르군. 뭐, 이런 전개 말이다. 물론 이전에 말했듯이 원래 모든 여자들은 다르긴 한데, 남주들만 그 사실을 모르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베니도 참 여주 속성이 강한 캐릭터였다. 천재에, 빽이 있음, 힘숨찐, 외강내유, 순진하고 귀여워 보이는 외모.

XX, 이거였군….

나는 나중에 베니가 산체스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해도 놀라지 않기로 했다. 이왕이면 나한테 가장 먼저 말해 주면 재미있을 텐데.

“사루비아 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농담 삼아 건넸던 질문에, 베니가 나를 보며 얼굴을 붉히고 대답했다.

‘…얼굴은 또 왜 붉혀?’

정말 산체스와 로맨스 전개가 이어지려는 게 맞나 보다.

‘잠깐만, 또 이상한 말이 있는데.’

베니가 산체스와 잘 지내는 것에 내가 기여한 바는 전혀 없었다.

“산체스가 너랑 잘 지내는 건 다 네 능력 때문이잖아? 산체스가 너를 강자로 인정했으니까.”

그렇지만 베니는 내 말에 고개를 저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다 사루비아 님이 저한테 잘 말해 주셔서 그렇습니다….”

* * *

“갑자기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야?”

베니가 산체스를 보며 말했다.

빨래를 하러 왔는데, 산체스는 자신이 다 하겠다며 열정적으로 와이셔츠를 문지르고 있었다. 물론 힘이 좋은 산체스가 저렇게 열심히 하니 일이 금방 끝날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며칠 전에는 빨래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산체스가 갑자기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니, 베니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베니 님이 강하셔서 그렇습니다.”

산체스가 회색 눈으로 베니를 보며 말했다. 그 말에 베니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아퀼라 님도 강하시고, 윈터 님도 강하시고. 내 검술을 봤다면 아퀼라 님의 검술도 봤을 텐데….’

그러나 산체스는 오직 베니 자신만 따라다녔기에,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나만 따라다니는 건데?”

그 말에, 산체스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뵌 분들 중 베니 님이 제일 강하십니다.”

“그럴 리가…. 윈터 님이나, 아퀼라 님이나….”

“제가 말하는 강함은 내면의 강함을 의미하는 거였습니다.”

산체스가 그렇게 말하자, 베니는 입을 닫고 그의 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지금까지 아무런 목적 없이 검을 쓰는 사람들만 봐 왔습니다. 하지만 베니 님은 검을 사용하는 이유를 분명히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베니 님처럼 강해지고 싶습니다.”

산체스는 얼마 전 베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런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않을 거야. 난 그렇게 생명을 해치려고 검을 배운 게 아니니까.”

그는 그 말을 듣고 베니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 부대에는 자신이 인정하는 강한 인간들이 몇 있었다. 윈터라든가, 아퀼라라든가….

…그리고 알타이르. 그는 정말 강했다.

어쨌든 산체스는 그 강한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인간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멋있는 사람이야.’

그는 입대 전 대장장이의 조수로 일하며 다양한 무기를 익혔고, 용병들로부터 검을 배웠다.

그들은 검을 쓰는 데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저 검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 그 자체였다.

하지만 베니는 검을 하나의 인생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검은 수단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산체스는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내심 지난날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으며, ‘진짜 강함’이 뭔지 그녀로부터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베니를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기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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