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51화 (54/233)

“블레어, 토피오.”

엘이 그들의 이름을 불렀기에, 나는 얼른 땅바닥으로 고개를 숙였다.

“너희 후임 관리 안 하냐?”

“엘 님. 그, 그게….”

토피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희에게도… 그….”

“아, 답답해!”

그가 머뭇거리는 데에서 지금까지 훈련병들과 일등병들에게도 하극상을 해 왔음을 짐작한 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후임들에게 맡길 문제가 아님을 깨달은 듯, 엘이 눈을 날카롭게 뜨고 산체스를 노려봤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상등병들, 드림과 캐롯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드림이 기운 빠진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야, 너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고 했지. 그럼 우리가 너보다 강하면 네 말을 듣냐?”

“…이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긴다면 그자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그자?”

자신의 선임을 지칭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단어에 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세상에, 이제 살다 살다 별 이상한 놈도 다 보네. 에휴….”

늘 소심한 캐롯은 산체스에게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는 산체스의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대신 엘에게 말했다.

“더 높은 고참 분들이 알기 전에 우리 선에서 빨리 처리해야 한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특히 지휘사관님들이 아시기 전에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나는 여전히 땅바닥만 보며 불안한 눈빛을 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 보니 무력으로 산체스를 진압하려는 게 분명했는데, 과연 그들이 산체스를 이길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지금까지 쌓은 짬밥이 있으니 마물과의 전투나 기타 작업 등에서는 당연히 그들이 더 낫겠지만, 인간과의 싸움은 또 모르는 법이다.

산체스의 저 우락부락한 근육을 보라. 그의 주먹을 한 방만 맞아도 난 날아갈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산체스는 검술에서도 아주 뛰어났는데, 그는 검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다른 사람들의 검을 날려 버렸다.

그렇지만 상등병들은 이미 저들끼리 뭐라 얘기하고 있었고, 조금 뒤 드림이 앞으로 나섰다.

‘큰일 났다. 진짜 싸우려나 봐.’

드림은 그들 중 힘이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맨손 격투를 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야, 네가 그렇게 강하다면 계급장 떼고 한 판 붙자.”

XX…!

결국 드림은 산체스에게 그 말을 해 버렸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결국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고개를 들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다른 후임들과도 눈을 마주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모르겠습니다….’

특히 베니는 지금 자신이 무슨 상황을 겪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는데, 스스로의 뺨을 가볍게 때리는 모습을 보면 이게 꿈이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현실이었고, 베니는 엄청난 폭탄을 맞후임으로 맞게 된 것이었다….

갑자기 내 맞후임이 카론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앞으로 카론한테 더욱 관심을 주도록 해야겠다. 일이 끝날 때마다 박수도 꼬박꼬박 쳐 줘야지.

어쨌든, 드림과 산체스는 이제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정말로 싸울 모양이었다. 산체스의 불끈 쥔 주먹이 돋보였다.

후임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드림과 산체스는 정말로 맨손 격투를 시작했고.

“아….”

잠시 후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땅바닥으로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싸움의 결과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산체스는 정말 강했다.

* * *

이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비록 드림이 먼저 계급장을 떼고 붙자고 제안한 것이었지만, 산체스는 자신의 주먹으로 드림을 제압해 버렸다.

우리야 “계급장 떼고 붙자고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해도, 중대 간부들은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할 것이다. 그들은 산체스를 하극상으로 간주하고 처벌하겠지.

그리고 누가 처벌당하든, 중대 전체가 시끄러워지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에이프릴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러나 에이프릴이었어도 산체스를 무력으로 진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후임인 상등병들을 갈궜겠지….

갑자기 ‘폭력과 공포 어쩌구’의 전문가인 레온과 브레이브가 떠올랐다. 그들은 에이프릴에게 갈굼당한 뒤 착실하게 산체스를 교육했을 거고, 산체스를 통제하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지휘사관이 되어 떠나고 난 뒤였다.

‘갑자기 옛날 상등병들이 보고 싶다….’

미친X이긴 하지만 소대를 잘 이끌던 에이프릴, 에이프릴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던 루이즈, 폭력과 공포의 대명사로 후임들을 관리하던 레온과 브레이브, 꼼꼼하고 공정하게 신병들을 교육하던 플라토….

나는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그들의 소중함을 알아 버렸다.

지금 드림은 한쪽 눈에 멍이 든 채 어벙한 표정으로 캐롯과 엘의 부축을 받고 있었고, 산체스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유리가 특유의 냉철한 목소리로 이 개판 앞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산체스를 보았다가, 한쪽 눈에 멍이 든 드림을 보았다가, 손가락을 까딱거려 캐롯을 손짓했다. 캐롯이 얼른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하도록.”

“그, 그게….”

조금 뒤, 캐롯에게서 상황을 들은 유리가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신병 하나 관리하지 못하고 이 꼴을 만들어? 후임 앞에서 쪽팔리게?”

그녀는 후임들 앞에서 신병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 준 드림에게 분노한 듯했다. 유리가 다시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무언가를 지시했고, 곧 그들은 유리의 명에 따라 바닥에 나란히 머리를 박았다.

분위기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군….

‘유리가 통제할 수 있을까?’

유리는 냉랭한 표정을 유지한 채 산체스의 앞에 걸어가서 섰다. 여자들 중에서는 키가 큰 유리였지만, 산체스의 앞에 서니 그녀도 아담해 보이는 지경이었다.

“신병.”

그녀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불만이면 중대장님께 가서 다른 부대 보내 달라고 하지?”

과연 유리가 산체스를 복종시키는 것에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이건 뭐. 너보다 강한 자의 말만 듣고 싶으면, 중대장님께 가서 그렇게 말해. 더 빡센 특공대로 보내 줄 테니까.”

‘여기보다 더 빡센 곳이 있어?’

정말 말도 안 된다.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문장 아닌가?

내가 긴장하여 산체스의 답을 기다리던 그 순간, 산체스가 입을 열었다.

“싸울 마음 없습니다.”

‘뭐라는 거지?’

그가 워낙 단답으로 이야기했기에,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웠다.

“별로 싸우고 싶지 않으니, 어차피 질 거면 저와 붙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미친.”

유리의 입에서 곧장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이제 나는 좀 이곳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에, 유리가 무시당하다니!’

윈터의 싸늘함과 에이프릴의 미친 짓에 묻혔을 뿐, 사실 유리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녀가 상당히 무섭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큰 키에 운동을 열심히 한 것처럼 보이는 몸, 한결같이 싸늘하고 냉랭한 표정, 훈련을 할 때 남자들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 능력. 객관적으로 유리는 나나 에이프릴보다 훨씬 무섭게 생겼고, 신체 능력 자체도 더 강했다.

산체스에게 무시 받은 것은 아마 처음으로 무시 받았을 유리에게도 충격이었을 거고, 그녀가 무시받는 모습을 처음 본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냥 내 머리를 스스로 깼다가 다시 깨어나면, 모든 일이 해결되어 있으면 좋겠다….

유리는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분노한 듯한 눈으로 산체스를 노려보고 있었고, 이제 그녀에게서 냉랭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이건 어떻게 하는 거지? 역시 쿨민트아이스 78기의 일원답다.

이전에 아퀼라에게 산체스를 이겨 볼 생각은 없냐고 물었었지만, 이제 아퀼라가 나서기도 애매해졌다. 더 높은 계급의 선임이 무시당했는데 여기서 나서서 산체스를 제압해도 상황이 뻘쭘해진다.

‘대체 무슨 전개로 흘러가는 거지?’

하긴, 예전에 타로가 황태자와 대련하던 윈터에게 마비 침을 쏘았을 때부터 나는 이곳이 미친 개막장 군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체념한 얼굴을 하고, 다른 후임들은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을 하고, 유리는 분노에 가득 찬 눈을 하고 있고, 산체스는 여전히 험상궂은 얼굴로 자리에 서 있던 그때.

“야, 유리~. 왜 이렇게 안 오냐?”

특유의 껄렁껄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알타이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대충 걸어오며 유리를 부르고 있었다!

“뭐야?”

가까이 다가오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알타이르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는 혼이 나간 얼굴을 한 후임들과, 여전히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세 명의 상등병들과, 산체스와 대치하고 있는 유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너 표정이 왜 그래?”

유리의 표정을 확인한 그는 당황한 듯했다. 유리는 웬만해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편이었으니까.

“…야, 무슨 일이냐?”

알타이르는 자연스럽게 유리에게 어깨동무를 한 뒤 산체스와 유리의 거리를 벌려 두었다.

그렇지만 알타이르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쿨민트아이스 78기다운 새파란 머리카락과 눈, 다른 선임들과 대비되는 흰 피부, 청량하고 상쾌한 인상의 얼굴. 그야말로 마초스러운 얼굴의 산체스와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알파 소대, 아니, 18중대에 있는 인간들 중 가장 마초스러운 인간이 바로 알타이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알타이르는 알타이르가 아니라, 꼰대 버전 알타이르, 즉 ‘꼰타이르’였다.

* * *

알타이르는 유리에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한 뒤, 산체스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곧, 산체스에게 어깨동무를 한 뒤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뭐지?’

알타이르에게 어깨동무를 당한 산체스는 긴장한 기색이었다.

“자, 산체스.”

알타이르가 쾌활하게 웃는 얼굴로 산체스를 두어 번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무례하게 말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지.”

우리가 어리둥절해 있을 때, 산체스가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뭐지?’

나는 다시 한번 내 귀를 의심했지만, 산체스는 정말로 우리 모두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있었다.

알타이르가 그에게 무어라 눈치를 주자, 산체스가 이번에는 상등병들 쪽을 보며 다시 말했다.

“무례하게 굴어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뭐야, 멀쩡하게 말할 줄 알았잖아?’

아까는 예의 없는 단답으로만 말했는데, 갑자기 문장을 멀쩡하게 구사하고 있다. 하긴 로판 세계관에서 싸가지없는 단답은 오직 남주에게만 허용되어 있지.

유리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산체스와 알타이르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알타이르는 평소의 유들유들한 태도로 유리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자리를 떠났다.

알타이르가 떠나고 나면 산체스가 다시 하극상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는 드림과 캐롯, 엘의 앞에서 다시 공손하게 사죄할 뿐이었다.

도대체 알타이르가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알파 소대에 어울리는 엄청난 알파 인간이라는 건 잘 알겠다.

문득 지금까지 국경방위군에서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폭력과 공포가 우리 모두를 구원한다.”

‘아, 이번에도 우리를 구원했구나…. 결국 에이프릴을 또 재평가할 수밖에 없구나….’

나는 미친X이라고 몇 번이나 욕했던 그녀가 또 옳았다는 것에,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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