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신병인 산체스가 용병 출신이지 않습니까. 이시나 님과 그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흑마술사와도 연이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산체스…. 산체스의 맞선임이 누구였지?”
“베니입니다.”
그 말에 윈터가 천천히 눈을 떴다가 감았다.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 국경방위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맞선임과의 관계이다. 과연 산체스도 안정적인 관계를 맺고 부대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군.”
“아, 그렇습니까?”
6년 동안 얼굴을 맞대고 있을 사람이니, 윈터의 말대로 맞선임과 맞후임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기는 했다.
사실 동기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 붙어 있는 사람이니, 처신만 잘한다면 가장 가깝게 지낼 사람이 바로 그들이었다. 나도 아퀼라를 제외하고는 이시나와 카론과 자주 붙어 다니고는 했고.
베니와 산체스의 관계를 우려하는 듯한 윈터의 말을 보아, 그는 자신의 맞선임들과의 관계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가그네와 자라는 78기와 잘 지내지 못했지.’
맞후임이 너무 엘리트였던 탓에 계속 비교당해 왔던 그들은, 결국 78기를 미워하게 되었다.
“베니가 엘리트이긴 하지만… 산체스가 자기 선임을 질투할 것 같진 않고, 베니는 강하니까 무시당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글쎄.”
그러나 윈터는 여전히 부정적인 어조였다.
“베니는 어떤 상황에도 화를 내지 못하고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 가끔은 화를 내는 법도 알아야 하는데, 자신보다 강한 사람만 인정하는 것 같은 산체스가 늘 친절한 베니를 인정할지는 모르겠군.”
“아….”
저절로 내 입이 벌어졌다. 윈터가 베니와 산체스의 성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건 둘째치고….
‘후임들 간 관계도 신경 쓰고 있었구나.’
이 상황에서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역시 윈터.’
이제 하나의 사자성어가 된 기분인데.
“그럼 윈터 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버릇없는 후임 산체스에 대한 그의 대처가 궁금해져 질문을 던졌더니, 윈터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나 말인가?”
“예. 산체스에 대해서 어떻게 하실 건가 해서….”
“내가 간섭해서는 안 되지.”
윈터가 내 말을 끊어 내며 말했다.
“그런 관계에 누군가 개입하면, 더 만만하게 보일 뿐이니까.”
“아하.”
윈터가 또 완고하게 그만의 원칙을 지키는 현상, ‘역시윈터’의 앞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 …잠깐만.
잠깐, 혹시….
“윈터 님, 혹시 저와 자이든의 관계도 알고 있었습니까?”
나와 기수가 먼 윈터는 전혀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모든 일을 통제하고 분석하려 한다는 사실을 너무 가볍게 여겼나 보다. 왜냐하면 윈터는 자연스럽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그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루비아 네가 잘 해결한 것 같더군.”
“와….”
결국 나는 다시 한번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윈터 이 인간, 후임을 정말 강하게 키우는구나.
이미 포기했지만 이 세계에 혹시 로판식 전개가 시작되어서 “갑자기 나한테 집착을?!” 사태가 발생한다 해도 윈터는 나를 곱게 돌보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는 나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며 더 강하게 키울 것이 틀림없다.
* * *
내가 어떻게든 친해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산체스는, 부대원들과 친해지기는커녕 부대에 파국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래, 바로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일처럼….
“야, 신병.”
중대 본부 전체의 제초 작업을 하던 중, 인성 파탄 85기가 산체스를 불렀다.
“야, 네가 가서 장갑 새로 가져와.”
그러자 산체스는 회색 눈으로 블레어를 빤히 응시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험상궂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니, 블레어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뭐, 뭐야? XX!”
“저한테 가져오라는 겁니까?”
“뭐?”
“전 저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이런 XX!”
어이가 없어진 블레어가 소리를 질렀고, 토피오도 산체스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아, 신병이 빠져 가지고. 너 나랑 장난하냐? 뒤질래?”
“…그 말 진심입니까?”
“뭐?”
“뒤지게 하실 수 있습니까?”
그 말에 연병장 안은 조용해졌다. 밀피와 자이든은 이미 얌전히 제초를 하고 있었고, 베니는 내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역시 산체스, XX 강해….’
블레어와 토피오는 산체스가 그들이 상대할 수 없는 미친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욕을 하면서도 그에게서 물러나고 있었다.
흠, 좋아. 생각해 보자.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어쩌면 원작 남주들의 진짜 힘을 보여 주기 위한 전개일지도 모른다.
‘…잠깐, 전개?’
내 고장 난 긍정 회로가 2년 만에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로판 전개다!!’
그래, 원작 남주들이 산체스를 굴복시킴으로써, 그들이 강하고 멋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거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논리였지만, 여기서 버티려면 이렇게 희망이라도 품어야 한다….
내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로 옆에 있던 이시나를 쳐다봤다.
“이시나 님, 어떻게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
“아니, 후임이 저렇게 말도 안 듣고 하극상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이시나가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길래, 내가 덧붙여 말했다.
“저 때는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지 말입니다.”
“그건 에이프릴 님이….”
“…아, PTSD…. 그 얘기는 하지 마시고…. 어쨌든, 요즘 애들 너무 말 안 듣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이시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그는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요즘 애들 진짜 지긋지긋하게 말 안 듣긴 하지….”
“…왜 저를 보십니까?”
“진짜 지지리도 말 안 들어, 에휴….”
…나는 결국 이시나의 앞에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니, 난 정말 이시나를 잘 따랐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긴 하지만, 일단 내 선임이니까 어쩔 수 없지. 어쨌든 이시나는 산체스를 통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아까부터 내 오른쪽에서 쓸데없이 관심을 받으려고 애쓰고 있던 카론을 쳐다보았다.
“카론.”
“예?!”
관심 좀 받아 보겠다고 비뚤비뚤한 모양으로 제초하고 있던 카론이 반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쟤 지금 미스터리 서클이라도 그리고 있는 건가?
“제초 똑바로 해라. 이따가 박수 쳐 줄 테니까….”
“예….”
얘가 점점 관종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윈터도 이미 글렀고….’
그는 후임을 XX 강하게 키우는 타입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아퀼라일까?’
그는 원작의 메인 남주니까, 산체스를 굴복시키는 과정을 통해 그의 강함을 증명할지도 모른다.
“아퀼라.”
내가 좀 떨어진 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아퀼라에게 달려가 팔을 툭툭 치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왜?”
“너 산체스…. 으악, 이게 뭐야.”
그가 제초해 놓은 흔적을 보며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기 있는 부대원들 중, 누구보다 깔끔하게 제초를 마쳤던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던 거지? 역시 특급 병사. 남주력이 높군.
“가끔 행보관님이나 소대장님이 시키셔서 제초는 자신 있어.”
“그렇구나….”
윈터의 뒤를 이어 그가 중대 최고의 일꾼이 된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좀 슬퍼졌다.
얘 어떡하지? 너 방금 남주력이 또 –20 됐어…. 가오가 이제 마이너스로 세 자리를 찍었다고…. 기껏 로판 전개가 시작되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원작 메인 남주의 남주력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지.
“아, 아냐. 이걸 말하려던 게 아니었지.”
정신을 차린 내가 다시 아퀼라에게 달라붙어 말했다.
“신병 어떻게 생각해?”
“뭐?”
그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주홍빛 눈으로 산체스를 쳐다봤다. 곧 그가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별생각 없는데. 왜?”
“으응, 자기보다 강한 자가 아니면 말을 듣지 않겠다고 하잖아…. 네가 쟤랑 싸워서 이길 생각 없나 했지.”
“굳이?”
“아니, 왜?”
정말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 같은 목소리에 내가 놀라며 되물었다가, 아퀼라의 눈빛을 보고는 깨달았다.
‘얘 진짜 관심 없구나.’
아퀼라는 원래 자신이 관심 있는 게 아니라면 절대 나서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는 산체스와는 갈등을 빚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산체스가 다른 선임들에게 얼마나 건방지게 구는가보다는, 그에게 내려진 제초 작업 같았다….
“왜, 너한테 건방지게 굴었어? 그럴 리 없는데.”
“아니, 나랑은 아무런 관련도 없었지…. 그런데 그럴 리 없다고 어떻게 확신해?”
“내가 못 봤으니까.”
“네가 못 본 걸 수도 있잖아?”
“그럴 리가. 내가 전부 지켜봤는데.”
“뭐야. 계속 날 지켜봤어?”
그 말에 나는 좀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가 나에게 신경 써 준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까.
내가 미소를 띠고 있을 때, 아퀼라가 물었다.
“너는 내가 산체스랑 싸우면 이길 거라 확신해?”
“응, 당연하지.”
“왜?”
“너는 짱 쎄잖아.”
그거야 그거 원작 남주1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남주가 다른 조연한테 밀리는 건 존재할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그냥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문장이다.
그러나 내 말 한마디에, 아퀼라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강하다고 해 주는 게 좋은가 보구나.’
그때 곁에서 지켜보던 이시나가 지긋지긋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봐 봐. 대화 주제가 뭐였든지 간에 자꾸 둘만의 세상으로 결론이 난다니까.”
* * *
잠깐 주제를 벗어났는데. 그래, 산체스에 대한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어쨌든 일등병들은 모두 “저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라고 한 산체스를 굴복시키는 데 실패했다.
아퀼라 등 남주 후보들은 애초에 그에게 관심도 없었으니 논외로 두자.
그리고 나는 지금 흥미진진한 눈으로, 상등병들과 산체스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저기 안 껴 있으니까 정말 흥미롭군.’
“아니, 너 지금 하극상하냐?”
엘이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그는 산체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가 “저보다 약한 자 어쩌구”를 대답으로 들은 후였다.
산체스는 훈련 같은 공식적인 일과는 잘 따랐고 잡일을 할 때 훈련병들과 일등병들에게만 반항심을 드러냈기 때문에, 상등병들은 그가 통제하기 어렵다는 사실만을 알 뿐 뒤에서 이렇게 하극상을 벌이고 있는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