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산체스는 비주얼만 인상적인 게 아니었다. 그는 첫날 짐을 푸는 과정부터 아주 화려한 과거를 뽐냈다.
나는 남자 숙소에 있지 않았으니 뒤늦게 카론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이건… 흑마술 아티팩트 아닌가?”
“맞습니다.”
“뭐야? 너 흑마술사야? 이런 물건들을 왜 가지고 와?!”
“그냥 알던 사람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아니, 이게 개념을 어디로 팔아먹은 거야?! 흑마술은 황실에서 금지한 건데, 군대에 흑마술 아티팩트를 가져와?!”
“엘, 진정해라. 일단 이건 소대장님께 보고드려야겠어.”
산체스는 외부에서 가져온 짐에 흑마술을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섞어 놓은 기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무엇이든 꼼꼼한 완벽주의자 윈터가 그 아티팩트를 발견해 냈고.
우리는 국가의 명을 따르는 자고, 흑마술은 황실이 금지한 것이므로 당연히 군대는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중대장마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분노하여 후임 관리를 단단히 할 것을 지시했고, 그 아티팩트는 모두 압수당했다.
‘정말 미친 XX야….’
솔직히 흑마술 아티팩트라니 참 판타지 세계관스럽고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긴 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산체스에게 달려가 흑마술 아티팩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난 이 세계에서 배운 군인 정신을 활용해 꾹 인내했다.
‘산체스가 좀 군 생활에 적응하면 자세히 물어봐야지.’
그러나 첫날부터 선임들의 특별 관리 대상이 된 산체스는, 그 이후로도 성격이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 신병은, 참….”
이시나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참 강해….”
역시 이번 신병에 대한 모두의 반응은 똑같았다.
“이름이 강하네….”
이건 내가 산체스의 이름을 들었을 때 보인 반응이었고.
“입대 전에 뭐 하다 왔냐?”
“대장장이의 조수로 일하다 왔습니다. 그래서 망치를 잘 다룹니다. 그리고 용병들로부터 검을 배웠습니다.”
“참 강하네….”
블레어는 껄렁거리는 어조로 말을 걸었다가 순식간에 쭈굴해졌고.
“생선 가시는 어디 있냐?”
“씹어 먹었습니다.”
“오…. 강하네….”
드림은 식사를 하다가 산체스의 접시 위를 보며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산체스는 ‘강함’을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느낌이었다.
그건 남주들의 강함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아퀼라나 윈터가 강하다지만, 그들과 산체스의 느낌은 아주 다르다….
“걔는 뭐, 입대 전에 아주 화려했겠습니다….”
산체스의 튼실한 근육을 떠올리며 내가 중얼거렸더니, 이시나가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대장장이에 용병이라니 말 다 했지. 용병 생활 덕분에 마물에 관한 정보를 잘 알고 있다는 건 이점이겠지만, 또 수직적인 문화에 적응을 못 하니 그건 문제야.”
그 말에 나는 조금 흥미가 생겨 눈을 깜빡였다. 용병 생활을 하면, 마물과 전투할 일도 생기는 건가?
“마물에 관한 정보를 잘 알고 있다는 건, 산체스는 이미 마물을 상대한 경험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 그건 아니고.”
이시나가 설명을 시작했다.
“그건 국경방위군의 역할이지. 마물이 마을까지 내려가도록 둔다면, 우리가 멀쩡할 리가 없잖아. 하하.”
“하하, 그건 그렇지 말입니다. 저희는 아마 다 뒤질 겁니다.”
이시나와 나는 눈을 맞추고 웃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슬퍼졌다….
XX, 탈영하고 싶다.
“내 말은, 용병 경험이 있으면 마물과 흑마술이라는 것 자체에 익숙할 거라는 뜻이었어. 용병들은 암살 길드나 정보 길드 같은 어둠의 커넥션과도 연관이 있고, 그중에는 흑마술사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암살 길드…? 정보 길드…?”
와, 이거 정말 로판다운 단어였다!
나도 정보 길드의 길드장이 나에게 흥미를 가지는 로판 전개를 기대하던 시절이 있었다.
원작에서 읽은 암구호를 이용하여 정보 길드에 접근, 빙의자다운 비범한 의뢰를 하면 일반 길드원인 척하던 길드장이 “재미있군.” 하면서 나한테 흥미를 가지게 되고, 내게서 도움을 받은 뒤에는 보답으로 의뢰 하나를 들어주겠다며 괜히 더 얽히는…. 그런 로판 빙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지만 로판 전개는 고사하고 지금 남주들은 이미 남주다운 가오도 없었다, XX.
어쨌든, 산체스가 흑마술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거라는 건 꽤 흥미로웠다.
“아, 그러면 산체스가 아는 사람으로부터 흑마술 아티팩트를 받았다고 한 것도, 흑마술사에게 직접 받은 겁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아하…. 그럼 흑마술사랑 마물은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나는 원작에서 읽은 내용을 제외하고는 이 세계에 관해 모르는 것이 많으니 이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할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시나는 흑막답지 않게 자세히 잘 대답해 주었다.
속이야 흑막이든 아니든 겉으로만 잘해 주면 되는 거지 뭐!
“음…. 흑마술사는 마물들을 재료로 사용하여 마법을 쓸 수도 있어. 그 반대로 마물들을 만들어 내는 일도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나도 이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
“아하….”
이시나의 설명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산체스에 대한 내 관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아무래도 이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흑마술에 관한 것 같은데, 흑마술에 대해 더 알게 된다면 이 세계 또한 지금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산체스랑 좀 친해지면 물어봐야지.’
정말 산체스에 대해 알면 알수록 산체스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아지지만, 사실 산체스와 친해질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시나의 입에서 이해하기 힘든 얘기가 나왔다.
“이번에 산체스가 가져온 아티팩트가 카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산체스랑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도 힘든 이 상황에 아티팩트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없을 것 같네.”
“카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산체스가 가져온 것 중에 기억과 관련된 아티팩트가 있었거든. 카론은 기억을 잃은 상태이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지.”
이시나가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산체스랑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누잖아. 자이든이랑 밀피만 해도 산체스에게 꼼짝도 못하더라.”
이시나의 말은 계속됐지만, 나는 도무지 그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기억’에 대한 아티팩트가 신경 쓰여서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카론은 아까부터 우리의 옆에 있었는데, 자신의 ‘기억’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말똥말똥 눈만 뜨고 있었다.
‘카론도 기억이 필요하겠지…. 그렇지만….’
물론 그 아티팩트는 카론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이전 세계에서의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나?’
흐릿하게 남아 있는 이전 세계에서의 기억을 되찾으면, 어쩌면 원작의 내용도 더 자세히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티팩트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이시나와 대화를 이어 갔다.
“산체스가 밀피랑 자이든에게 하극상이라도 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이시나의 말에 따르면, 산체스의 숙소 자리는 자이든과 밀피의 바로 옆자리인데, 취침 시간에 산체스가 너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누웠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산체스에게 옆으로 갈 것을 부탁했으나, 산체스가 “제가 잠버릇이 좀 고약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주먹으로 치는 버릇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그래, 그럴 수 있지.”, “하하, 그럼 어쩔 수 없지!” 따위의 말을 하며 얌전히 좁은 자리에 몸을 낑겨 누웠다고 했다….
“아니, 걔네는 선임이라는 게….”
자이든 그 XX, 나한테는 그렇게 잘 대들고 베니도 괴롭히더니 산체스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해? 역시 강약약강의 표본답다.
나는 겁이 많다며 그들을 책망하려다가, 생각해 보니 나도 산체스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할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 몸을 사릴 땐 사려야지….
“걔네가 오바하는 거 아닙니까?”
카론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
“걔네가 산체스한테 쓸데없이 겁먹어서, 그냥 뭘 해도 무섭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나는 슬쩍 카론을 쳐다봤다. 그래, 넌 덩치가 크니까 ‘쓸데없이 겁먹는다’라고 표현할 법도 하지. 하지만 평범한 인간들은 산체스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산체스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의 카론은 묘하게 그를 꺼리는 기색이었다.
“카론, 넌 산체스가 별로인 거야?”
“그냥, 입대 전에 흑마술사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는 게 뭔가 별로입니다.”
“그래? 왜?”
“흑마술… 이라는 건 왠지 느낌이 별로인 것 같습니다.”
“아, 그럴 수 있겠네.”
하긴, 흑마술이라니 대놓고 불길한 단어이기는 했다. 그때, 이시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카론에게 말했다.
“글쎄, 자이든과 밀피가 괜히 산체스를 두려워하는 건 아니지.”
“예?”
“저번에 밀피가 떨어진 물건을 주워 달라고 했더니, 산체스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나와 카론의 시선을 받으며, 이시나가 말을 이었다.
“자신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고 하더라….”
“아….”
나는 감탄하고야 말았다.
과연 그게 인간의 사고방식인가? 어쩜 저렇게 짐승처럼 생각할 수가.
‘우리가 무슨 사육사냐고, XX. 가지가지 하네.’
과연 내가 산체스에게 아티팩트에 대해 질문할 수 있을 만큼 친해지는 일이 가능할까? 아니, 애초에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라도 될 수 있을까?
내가 이곳에서 느끼는 건데, 세상에는 정말 별의별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군대였다, XX.
* * *
오늘 경계 근무는 오랜만에 윈터와 서는 근무였다.
“아, 윈터 님. 그거 아십니까?”
이시나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내가 입술을 뗐다.
“흑마술사는 마물을 재료로 사용하여 힘을 쓰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그럼 저희가 사냥한 마물이 유출되는 겁니까?”
내가 ‘흑마술사’의 얘기를 꺼내자, 윈터의 딱딱했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흑마술은 제국에서 엄히 금지된 것이니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역시 윈터, 국가가 원칙으로 금지한 것은 관심도 두지 않는 모양이다.
“가끔 국경 너머에서 넘어온 마물이 마을까지 내려오는 경우가 있으니, 흑마술사들은 보통 그런 것들을 사냥해서 재료로 쓴다고 들었다.”
“아하….”
하긴, 4급 마물만 해도 워낙 작은 벌레 수준이었기 때문에 제국민들이 그냥 프라이팬으로 때려잡고는 했다.
‘아돌브 제국민이 대륙에서 강하기로 소문 난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아돌브 제국에서는 이게 일상이니까!
“그럼 흑마술사가 마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흑마술사가 일부러 마물을 만든다기보다는….”
윈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흑마술의 부작용으로 우연히 마물이 생겨났다고 하는 편이 맞지.”
역시 윈터, 정말 모르는 게 없었다. 궁금증이 풀린 나는 개운한 얼굴을 했지만, 윈터는 국가에서 금지한 흑마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불편해 보였다.
“이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흑마술에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황실에 대한 불충이다. 그리고 벌써 스물네 번째 말하는 거지만 경계 근무 중에는 정면을 주시하도록.”
“넷슴다….”
황실에 대한 윈터의 충성은 언제 봐도 참 놀라웠다. 나는 아돌브 제국에 가지고 있는 원한 때문에라도 황실이 박해하고 있는 흑마술에 관심이 가는데. 원래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인 법이니까.
“그렇지만 아르콘한테는 황실보다야 흑마술사가 차라리 나은 거 아닙니까?”
결국 내가 참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질문을 꺼내자, 윈터는 나에게 충격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흑마술사는 결코 이종족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오히려 이종족을 이용하지.”
“…예?”
“보호자가 없는 어린 이종족들은 때로는 흑마술사에게 주술로 묶여 이용당하기도 한다. 그를 위한 잡일을 한다든가, 흑마술의 실험 대상이 된다든가, 마물의 시체를 해부한다든가. 때로는 필요한 장기를 빼내고 뒤처리를 하기 위해 인간의 시신까지 다룬다고 들었다.”
“아니, 왜….”
이 나라가 아르콘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같이 박해받는 처지인 흑마술사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왜 아르콘을 이용하는 겁니까?”
“신체 능력이 강해서 지시한 일을 잘 해낼 수 있고, 위험한 일에 휘말려 죽더라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으니까.”
나는 흑마술사에 대한 없던 정마저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카론이 아까 흑마술사가 불길하다고 말한 것도 이해가 갔다. 역시 원작 남주4, 짐승 같은 직감.
“사루비아, 어린 이종족들이 흑마술사에게 이용당해 죽는 일은 상당히 흔하다. 그리고 갑자기 흑마술에는 왜 관심을 가지는 거지?”
“아, 제가 흑마술에 관심을 가졌기보다는 말입니다….”
혹시 이 미친 원칙주의자 윈터가 나를 국가에 반동분자로 신고하기라도 할까 봐, 나는 손을 내저으며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