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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48화 (51/233)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윈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성을 지키고 원칙을 따르는 것. 감정을 비우고 불필요한 가정은 하지 않는 것. 주어진 명령을 따르고 의문을 품지 않는 것.”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 로판 표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미남.

그러나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서, 나는 어떤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을 엿본 것 같았다.

“그게 바로 국경방위군으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휴, 미치겠네.’

이게 로판이었다면 주위 사람들이 윈터를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라고 수군거리고, 여주인공이 그런 윈터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장면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윈터의 원칙주의와 냉담한 성격은, 대부분 이 세계가 아포칼립스라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세계가 아니라면 적당히 무뚝뚝하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성격 정도로 자랐을지도 모르는 윈터는 이 세계에 의해 감정을 완전히 버린 원칙주의자로 변모했다.

예전에는 황실이 맺어 놓은 ‘계약 마법’ 때문에 이 고생을 하면서도 황실에 충성하는 윈터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사적인 감정을 담지 않고 충성해야 할 것에 무조건 충성하고,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게 윈터의 생존 방식이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나는 다시 한번 이 세계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 네미집 세계관아.’

도대체 아르콘들의 인권은 어디로 팔아먹은 거지? 아르콘을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로 만들고 있는 건 바로 이 세계였다.

…왠지 이 세계의 체계를 파괴해 버리겠다며 떠난 에이프릴의 모습이 떠올랐다….

‘에이프릴 파이팅….’

XX, 내가 그 미친X을 응원하게 되다니.

하지만 내가 그녀처럼 직접 이 세계의 체계를 깨러 떠날 마음은 없으니, 그냥 얌전히 응원이나 해야지.

‘난 제대하면 정말 얌전히 살 거라고….’

“사루비아.”

“예?”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작스럽게 윈터가 나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집중하도록.”

“넷슴다!”

생각해 보면 목숨이 달아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경계 근무인데, 윈터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느라 너무 얼빠져 있었나 보다.

나는 다시 눈에 힘을 주고 철조망을 노려봤다.

그때, 오른쪽 철조망을 기어 넘어오고 있는 거대한 뱀 한 마리가 보였다. 보라색 몸체에 노란 반점이 있는 게, 누가 봐도 마물 중 하나였다.

“마물 발견. 쏘겠습니다.”

탕-!

살아남으려면 행동은 빨라야 한다. 곧 마물의 몸이 힘을 잃고 철조망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떨어졌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윈터가 가벼운 칭찬을 건넸다.

“침착하게 대처했군. 잘했다, 사루비아. 앞으로도 그렇게 하도록.”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조금 따뜻해졌나 했는데, 윈터는 내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사루비아, 너는….”

“예.”

“어떻게 살아왔지?”

“예?”

“내 얘기를 했으니, 네 얘기도 들어 보려 한 거다. 불편하면 말하지 않아도 되고.”

“아….”

나는 입만 벌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원작 여주에게도 윈터는 저런 질문을 했었다.

그때의 윈터는 공작 성에서 달린이 어떻게 지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원작 여주와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해서 내가 “혹시 로판 전개?”라면서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냐고?’

그거야 얘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빙의 전 사루비아의 기억을 희미하게나마 갖고 있기는 했지만, 내가 그 상황을 직접 체감한 건 아니니 어떠한 감정도 없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빙의 전 얘기를 할 수도 없고.’

도대체 뭐라고 얘기한단 말인가. “네, 저는 윈터 님처럼 생긴 사람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는 게 취미였답니다, 호호. 덕분에 윈터 님이 친숙하고 두렵지 않아요.”?

아니, 절대 그럴 수는 없지.

“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잘 모르겠다니, 어처구니없게 들릴 만한 말을 했는데도 윈터는 평소처럼 반응할 뿐이었다.

“그래, 알았다.”

‘XX…. 이거 자소서를 쓰는 기분인데….’

어떻게든 뭔가 더 덧붙여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냥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음…. 정말 그럭저럭 자랐습니다.”

원래의 사루비아는 아르콘으로 태어나 다른 아이들과 제대로 교류하지 못하고 자랐지만.

“뭐, 어쨌든 여기보다는 낫습니다.”

내가 심각하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냥 빨리 제대나 하고 싶습니다. 사실 어딜 가든 여기보다는 낫지 말입니다.”

그래, 내가 이게 과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다고 지구에 있을 때의 ‘나’에 대해 얘기할 수도 없었다. 그 시절의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이라고는 내 이름만이 전부였으니까.

‘이름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자….’

내게는 가장 소중한 기억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 ‘이름’을 마음 한구석에 잘 묻어 두고.

* * *

그 후에도 근무는 계속됐다.

나는 경계 근무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더 이상 경계 근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밤이나 새벽 시간대의 근무가 걸리는 건 최악이었지만.

윈터가 아닌 다른 선임들은 경계 근무에서 좀 더 유연한 태도를 보였고, 그들과 온갖 대화를 나누며 더 친해지기도 했다.

“XX, 탈영하고 싶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낮 열두 시 근무이니, 빠르게 점심을 밀어 넣어야겠다, XX.

사루비아의 뒷모습을 보며, 밀피가 진지한 얼굴로 베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베니, 사루비아 님이 요즘 더… 눈빛이 인상적이신 것 같지 않니?”

대충 요즘 눈이 돌아 버린 것 같지 않냐고 돌려 말한 것이었다.

“예…. 사루비아 님은 정말 좋은 선임이십니다…. 가끔 일이 생겼을 때 말을 자유롭게 하시는 걸 빼면….”

대충 사루비아는 자신에게 잘해 주지만, 추가 작업이 생겼을 때 욕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돌려 말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경계 근무가 많이 힘든가 봐.”

“예,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대충 경계 근무 때문에 더 돌아 버린 것 같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즘 점점 미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절대 눈에 띄지 말도록 하자!’

* * *

제대 D-2098일.

“아, 당 떨어져….”

근무를 마치고 온 내가 아퀼라에게 몸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브리오슈 먹고 싶어. 레몬케이크 먹고 싶어. 휘낭시에 먹고 싶어….”

빙의 전 자주 먹던 구움과자인데,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는 입에 대 본 적도 없다.

XX. 분명히 로판 세계관인데 서양 디저트를 못 먹는다는 게 말이 되냐?

결국 나는 아퀼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당이 떨어지면 쉽게 예민해지고 피로해져서, 경계 근무를 마치고 왔을 때 식사까지 시간이 남아 있으면 이렇게 컨디션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단 게 먹고 싶은 거야?”

“응…. 어지러워 뒤지겠네, XX….”

내가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웅얼거리자, 아퀼라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몸이 따뜻해지니까 그래도 좀 살 만했다.

“사루비아 님!”

그때, 베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다 귀찮아진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 여기 계셨… 어머!”

고개를 들자, 베니가 놀란 목소리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하던 거 마저 하시….”

“아니, 아니. 잠깐만.”

그녀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아는데, 해명해도 안 믿을 것 같다….

평소에는 세상 얌전한 표정을 하고 있던 베니는 나와 아퀼라를 보며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호호, 완벽해….”

“뭐라고?”

“예?”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니?”

“그런 사실 없습니다.”

…분명 베니가 자신이 한 혼잣말을 부정한 기분이었지만, 일단 나는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래서 왜 불렀는데?”

“아, 신병이 왔는데 혹시 보셨을까 해서….”

“난 신병 관심 없어. 어차피 절반은 죽잖아.”

그 말에 베니가 어쩐지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번 신병은 한 명입니다.”

“응, 뭐. 3개월 이상 살면 그때 친해져 보고.”

“…감히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베니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신병은 무조건 살아남을 겁니다.”

“왜? 천재야?”

“보시면 압니다….”

그녀가 내게 계속해서 신병을 볼 것을 종용했기에, 결국 나는 아퀼라와 함께 신병이 훈련하는 곳으로 떠났다.

그곳에는 이미 우리 말고도 다른 부대원들이 숨어서 훈련을 지켜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와….”

그리고 신병의 모습을 본 나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내가 후임에게 관심을 주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아퀼라도, 이번에는 감탄할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번 신병, 정말….”

뭐라고 표현할지 몰라 말을 고르다가, 결국 나는 그냥 생각나는 것을 말하기로 했다.

“정말 강하네….”

이번 신병은 엄청난 근육질의 몸매, 험상궂어 보이는 얼굴, 무성한 수염이 인상적인 거구의 남성이었다.

“…이름이 뭐라고?”

“산체스랍니다.”

“오….”

베니에게서 그의 이름을 들은 나는 잠시 감탄하다가, 그냥 떠오르는 말을 했다.

“이름이 강하네….”

그래, 그것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산체스라는 신병은 정말 딱 봐도 강했다.

마치 전장의 노병 같은 회색 머리카락에, 늑대의 것 같은 회색 눈, 무협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회색 수염, 한 대 맞으면 골로 갈 것 같은 엄청난 근육….

심지어 그는 상등병 엘이 진행하고 있는 신병 훈련을 전혀 힘들이지 않고 따라왔고, 오히려 훈련을 만만하게 여기는 것도 같았다.

나는 갑자기 그를 통제해야 할 상등병들이 불쌍해졌다. 나라면 그가 두려워서 감히 그를 혼내지도 못할 것이다….

군대에서는 계급이 다지만, 가끔씩은 몸을 사려야 하는 법이다….

“쟤 몇 살이래?”

아무리 봐도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받은 것 같은 그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며 내가 묻자, 베니가 말도 안 되는 답을 내놓았다.

“저랑 동갑이랍니다.”

“풉! 콜록콜록!”

헛기침이 들린 내가 콜록거리자, 아퀼라가 가만히 등을 쓸어 주었다. 그러자 베니가 또 볼을 붉히며 음흉하게 웃었다.

아니, 쟤는 평소에는 얌전하다가 왜 이럴 때만 애가 이상해지는 거지?

“베니 네가 몇 살이었더라?”

“열여덟입니다.”

그래, 베니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열여덟이었다.

그런데 산체스가 열여덟이라고? 베니랑 동갑이라고? 카… 카론과 동갑이라고?

“요즘 애들은 성장이 참 빠르구나….”

내가 아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휴, 남의 집 애들은 저렇게 어른스러운데….”

내가 아직도 내 앞에서 관심을 요구하는 카론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아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너무 싸고돌아서 그런다니까.”

나는 아퀼라의 말에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베니가 다시 음흉한 표정으로 웃길래 그냥 관뒀다.

아니, 혹시 쟤 몸속에 다른 영혼이 빙의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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