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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47화 (50/233)

국경 경계 근무 중에는 마물이 득실거리는 땅 앞에서 철조망을 넘어오려는 마물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 일은 각 소대별로 위치한 초소에서 진행되는데, 소대를 따로 분리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경계 근무를 더 효과적으로 서기 위해서. 또한 경계 근무는 두 명씩 근무하며, 세 시간마다 다른 부대원들과 교대되었다.

경계 근무를 서는 동안에는 마물 토벌이나 훈련에서도 제외되었기 때문에, 짬 높은 선임들은 훈련 시간에 일부러 경계 근무를 서고는 했다.

물론 갓 일등병이 된 난 그런 것 없이 가장 피곤한 시간에만 근무해야 하겠지만, XX.

“사루비아,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데닌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이후로 내 표정이 계속 암울해 있자, 이시나가 나를 달래 주었다.

‘이시나는 전혀 충격받지도 않은 것 같네. 역시 흑막답게 대단한 멘탈이야.’

그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평소의 사루비아 네 실력이면 순탄히 근무할 수 있을 거야. 자만하지 않고, 늘 집중하는 것만 잊지 않으면 돼. 사루비아 너는 잘할 수 있잖아.”

“그렇게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시나는 3개월 전 일등병으로 진급했기 때문에 이미 경계 근무를 3개월은 서 봤고, 오늘따라 그의 말이 더욱 믿음직스럽게 들렸다.

아퀼라가 슬쩍 내 가까이 몸을 붙여 왔다. 맞닿은 곳에서 그의 체온이 전해져 왔다.

나는 이게 그 나름의 나를 달래 주려는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따뜻한 기운이 도니 머리가 멍해지고 나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응…. 그래, 괜찮을지도….”

내가 몽롱한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 우리의 뒤로 그림자가 졌다.

“드림 님?”

상등병 드림의 모습을 본 우리가 오해받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몸을 뗐다.

“너희의 첫 경계 근무에 대해 안내할 사항이 있는데.”

드림이 입을 열자, 우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드림과 그의 동기 캐롯은 후임 관리를 맡고 있으니, 아마도 우리는 그들 중 한 명과 근무를 서게 될 것이다.

“근무표 붙어 있는 게시판은 알지? 앞으로는 너희가 알아서 확인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사루비아, 너는 오늘 저녁 여섯 시에 근무고. 아퀼라, 너는 밤 열두 시다.”

“예, 알겠습니다.”

‘역시나 제일 구린 시간대만 줬군.’

아퀼라가 근무하는 밤 열두 시부터 세 시는 그만큼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제일 구린 시간들 중 하나였고, 내가 근무하는 저녁 여섯 시부터 아홉 시도 저녁을 허겁지겁 먹고 가야 하기 때문에 구린 시간이었다.

나는 드림의 말에 대답한 후 의미 없는 질문을 했다.

“근무는 어떤 분이랑 같이 섭니까?”

“아. 아퀼라 너는 알타이르 님과 서면 되고….”

‘알타이르 님과 서다니 의외네?’

드림과 캐롯에게 맡길 줄 알았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다.

‘잠깐…. 설마 첫 근무는 짬 높은 선임들이 직접 맡는다든가, 그런 거 아니겠지…?’

그렇다면 설마 나와 함께 근무할 선임은….

“사루비아, 너는 윈터 님과 가면 된다.”

“…잘 못 들었습니다?”

첫 근무부터 윈 교수님으로부터 근무의 정석을 배우게 될 것 같은데,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 * *

“사루비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첫 근무를 하러 가는 길, 내 몸은 긴장으로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가기 시작했다.

이시나가 나에게 격려를 해 줬지만, 그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근무를 위해 급하게 밥을 먹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XX, 체할 것 같아….’

식당 앞으로 나서니 그곳에서는 이미 윈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윈터 님.”

“사루비아, 오늘이 네 첫 국경 경계 근무이지. 첫 근무라고 너무 긴장하지 않도록 하….”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놀랍도록 긴장은 싹 사라졌다.

‘마물이 나와도 윈터가 어떻게든 해 줄 것 같군.’

엘리트 중의 엘리트 윈터와 함께라면 마물은 겁이 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원작 네 명의 남주 후보들 중, 개인적으로 마물을 상대할 때 제일 신뢰가 가는 인물은 윈터였다.

뭐랄까, 나에게 있어 그의 이미지는 혼자 마물들을 모두 처리하고 돌아오는 북부 대공 같은 이미지니까….

‘왠지 마물의 털로 여주한테 코트도 만들어 줄 것 같아.’

물론 현실에서 마물은 끔찍하게 생겼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별로 그 털로 코트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마물이 왜 마물이겠는가.

…다시 생각해 보니 윈터가 마물로 코트를 만들어 줄 타입은 아니군. 윈터라면 틀림없이 물품 횡령을 하면 안 된다며 절대 사적으로 마물의 시체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윈터와 근무를 선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걱정이 싹 사라지고 먹은 게 잘 소화되는 기분이었다.

속이 개운하게 내려간 내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자, 윈터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늘 한결같군.”

…내가 자신의 라인만 타지 않았어도 표정 관리에 대한 잔소리를 열 마디쯤 늘어놓았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 * *

경계 초소에 선 채, 나는 두 손으로 총을 꽉 쥐고 불안한 눈빛으로 철조망 건너편을 노려보았다.

경계 초소는 지상에서 살짝 띄워져 있는 형태였는데, 그 탓에 국경 너머의 무법지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사람이 살지 못하는, 마물들이 점령해 버린 땅.

간혹 내 눈에 마물이 띌 때면 나는 긴장하여 총을 고쳐 잡고는 했지만, 윈터는 어차피 국경 너머의 마물들은 전부 소탕할 수 없으니 철조망을 넘어오는 것만 막으면 된다고 말했다.

‘정말 원칙대로군.’

각 잡힌 자세로 내 옆에 선 윈터를 흘끗 보며 내가 생각했다.

이시나의 말에 따르면 선임들은 보통 긴장을 풀고 이런저런 대화도 한다는데, 윈터는 그럴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원작에선 여주의 삶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던데.’

역시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이는 이 모습! 이 세계에 빙의한 후 약 325번째로 박살난 나의 로판 긍정 회로!

내가 먼저 말을 걸지는 않고 국경 너머를 경계하고 있을 때, 마침내 윈터가 입을 열었다.

“다음번 경계 근무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겠지?”

“예? 예, 그렇습니다!”

“그래. 일등병 생활은 불편한 건 없고?”

‘아뇨? 다 불편한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내 마음의 소리를 꾹 눌러 참았다.

“예, 근무 하나 추가된 것 빼고는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아서,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윈터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초소 안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참지 못한 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때, 윈터가 덧붙였다.

“일등병 생활에 대해서는… 오히려 잡일은 사라지니 어떤 측면에서는 더 편할 수도 있을 거다. 그리고 허리를 더 90도로 세우고 한눈팔지 말고 정면을 주시하도록.”

“예….”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고, 우리는 다시 어색해졌다.

‘…안 되겠다.’

윈터에게 원칙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도 싫지만, 이런 분위기도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어 봐야겠다.

“윈터 님은 일등병 생활 어떠셨습니까? 조언해 주실 것 있습니까?”

그 말에 윈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를 떠올리는 표정을 지었다.

“난 일등병 때도 훈련병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군. 그저 생활 수칙을 따라 행동했을 뿐이었지.”

‘역시 그때도 원칙왕이었군.’

늘 변함없어 보이는 윈터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충동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윈터 님은 어떻게 그렇게 강하신 겁니까? 뭔가 계기가 있으셨습니까?”

나는 간혹 그를 두고 ‘역시 남주2!’, ‘역시 북부 대공 같은 무심함!’, ‘역시 매사에 철저한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하며 감탄하고는 하지만, 그에게도 그런 능력과 성격을 가지게 된 배경이 존재할 것이다.

나는 문득 윈터의 삶이 궁금해졌다.

“국경방위군에서 한 번도 무언가가 두려우셨던 적 없습니까?”

그 말에 윈터는 푸른빛이 감도는 눈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국경 너머로 눈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나는… 특별한 무언가를 경험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침내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글쎄, 국경방위군에 입대한 뒤에도 별로 두렵거나 낯설지는 않았다. 어떤 일들을 겪을지에 대해서는 입대 전부터 이미 여러 번 들어왔고…. 입대하기 전에 검술 연습은 충분히 하고 왔으니 마물이 두렵지도 않았고, 운 좋게 내 동기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

“아, 그러고 보니 알타이르 님과 정말 친하신 것 같습니다.”

“알타이르는 남들과 쉽게 친해지는 편이니까. 유리도 원칙을 지켜 행동하니 나와는 잘 맞았고. 동기들 중 그 누가 죽지도 않았으니, 크게 좌절했던 적도 없었지.”

알파 소대의 78기는 윈터, 알타이르, 유리가 전부였던 모양이다. 신기하게도 셋 다 엘리트로 불릴 만큼 몹시 강해서 그 누구도 죽지 않았고.

“이렇듯 나는 별로 특별한 일이 없었어서 딱히 얘기해 줄 것도 없군. 원한다면 군대에서의 원칙을 준수하는 동시에 너 자신의 원칙을 확립하는 일에 대해 조언해 줄 수 있다.”

“아니, 괜찮습니다….”

“뭐, 그래.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질문하고.”

…저것마저도 교수님 같군.

그렇지만 정말로 윈터에게 궁금한 게 있기는 했다.

‘도대체 입대 전에 어떤 삶을 살아온 거지?’

입대 이후 특별한 일을 겪은 게 아니라면, 그의 저 능력과 성격은 입대 전에 형성된 게 틀림없었다. 진지하게 윈터에게는 파란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귀족의 파란 피가….

‘…아니, 파란 피는 파충류 아니었나?’

그럼 그냥 붉은 피가 흐르는 걸로 해야겠다.

어쨌든, 윈터는 태생부터 차가운 인간으로 보였다.

“그럼 입대 전부터 강하셨던 겁니까?”

“그래.”

윈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부모님은 모두 이종족이시니까.”

“아….”

부모가 모두 아르콘인 경우에는 철저하게 교육받아 입대하는 경우가 흔하다. 카론의 경우에는 부모님이 모두 장교로 복무하시다 전사하셔서 양부모에 의해 길러졌지만.

사랑만 받으며 자란 것처럼 보이는 베니가 오히려 드문 케이스였고, 보통 아르콘 부부 사이의 자식은 곧 입대를 해야만 한다는 현실에 찌들어 있었다.

‘그래, 마치 아르콘 부부 사이에서 자란 이시나가 흑막이 된 것처럼….’

이시나도 태어날 때부터 흑막은 아니었겠지, 뭐.

“우리 부모님은 어릴 적부터 나를 철저하게 훈련시켰고, 나는 국경방위군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기술을 배운 채 입대했을 뿐이다. 내가 어떤 부대에 배치될지 모르니, 기본적인 신체 능력을 단련하는 것부터 시작해 검술, 사격술, 승마술, 창술, 수영, 암벽 등반 등을 모두 훈련했지.”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좀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식을 이런 곳으로 넣기 위해 직접 그것들을 교육해야 하는 부모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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