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잊고 있었다. 그가 원작에서 후임들을 괴롭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자이든 이 XX는 자신의 맞후임인 베니에게 나약하다고 갈궜고, 그걸로 인해 베니는 더욱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었다!
솔직히 그가 후임들에게 뭘 하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그 대상이 내가 챙기려고 하는 베니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진짜 그 XX는 어떻게 그렇게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될 수가 있지?”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주먹을 꽉 쥐며 땅을 노려보고 있자니, 앞에 선 베니가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저, 사루비아 님…?”
“좋아, 베니. 일단 가서 먼저 빨래를 하고 있어 봐.”
“예…?”
“아무래도 진솔한 마음의 대화를 좀 해야겠어.”
* * *
“자이든.”
“사, 사루비아 님?”
조금 뒤, 내가 제초 작업을 하던 자이든을 달콤한 목소리로 부르자, 그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시간 되니?”
“왜, 왜 안 되겠습니까!”
어쩐지 자이든은 겁에 질린 것 같았다. 그는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오더니,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자이든, 너 혹시….”
“예, 예!”
“베니한테 쓸데없는 말 했냐?”
“예?”
그 말에 자이든이 펄쩍 뛰었는데, 그의 표정을 보자니 내가 정확히 맞힌 것 같았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변명을 꺼내 놓으려고 했으나 내가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멈췄다.
“뒤질래? 얼마 전에 동기가 죽어서 힘든 후임을 감싸 줘야지, 갈구면 어떡하냐고.”
“저, 저는 정말 조언해 주려는 의도로….”
“조언을 누가 그딴 태도로 하냐고, 어? 조언은 좋은 말을 다정한 태도로 해 줘야 조언이지, 그건 그냥 협박이잖아.”
내 혈압이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더욱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자이든이 더욱 몸을 움츠렸다.
“네가 베니 갈군 거 선임들 귀에 들어가면 우린 다 같이 뒤졌어…. 아니, 진짜 얘가 미쳐가지고.”
“그, 그게….”
“다시 그렇게 쓸데없이 찔 부리다가 걸리면 뒤진다, 진짜.”
나는 다시 한번 자이든에게 강하게 으름장을 놓고, 자리를 떠나 베니에게로 달려갔다. 이제 자이든이 터뜨려 놓은 그녀의 멘탈을 다시 붙여 놓을 시간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은 전문적인 인력에게 맡겨야 한다고 했지만, 생각이 좀 바뀌었다.
‘베니는 강하니까.’
베니는 결코 약한 애가 아니다. 약간만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아마 스스로 이겨 내고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자신의 정체를 밝힐 때, 나에게도 도움을 줄지 모르지!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난 절대 여자 숙소 막내로 돌아갈 수 없어!’
베니가 멘탈이 흔들려서 토벌 중 실수로 죽는 일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다!
* * *
“베니!”
“사루비아 님?”
사라졌던 내가 밝아진 얼굴로 다시 돌아오니 베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허억, 해 줄 말이 있어서.”
그녀의 옆에 도착한 내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빠져야 할 필요 없어!”
“예?”
내가 대뜸 외치자, 베니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못된 거랑 독한 거는 다른 거거든! 네가 여기서 살려면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인간성을 버리고 나빠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에이프릴이나 유리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네 동료의 원수를 무조건 갚아 줘야 한다면, 그렇게 하면 돼!”
내가 그녀의 두 손을 붙잡았다.
“대신 이번처럼 원수를 갚지 못하고 괴로워할 일이 없도록 더 강해지면 되는 거야. 이번의 실패를 더 강해질 발판으로 삼는다고 생각해.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앞으로도 유지하려면, 너는 더 강해져야 해.”
그 말에 베니가 어쩐지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루비아 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녀가 내 말을 받아들인 것 같아서 내가 입꼬리를 올릴 때, 베니가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이곳에서는 힘이 없으면 가진 것들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유지하려면, 그만큼 강해져야 한다는 점 잘 알겠습니다….”
베니의 표정은 훨씬 밝아져 있었다.
일이 잘 풀린 것 같아서 나는 즐거워졌다! 베니가 드디어 ‘갚지 못한 원수’로 인해 괴로워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때 베니가 어쩐지 수줍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루비아 님….”
“응?”
“혹시 나중에 도움이 필요해지신다면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걸렸구나.’
역시, 원작에 나왔듯이 은혜를 잊지 않는 베니!
“도움이라니, 뭘 도와줄 수 있다는 거야?”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고 묻자, 베니가 다시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저는 정말 뭐든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 뭐든지 말입니다….”
‘…역시 투스타의 딸.’
“도움이 필요하다면, 꼭 저한테 말하십시오. 뭐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베니의 얼굴에서 나는 진한 힘숨찐의 기운을 느꼈다.
이걸로 나는 생존에 한 발짝 더 다가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 *
그리고 얼마 후 마물 토벌에서 베니는 자신의 동기들을 죽였던 파이어혼을 찾아 죽였다.
도대체 똑같은 파이어혼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그리고 국경 너머까지 오러 블레이드를 어떻게 날려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베니가 XX 강하다는 건 알겠군….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운 느낌인데.
* * *
제대까지 D-2190일.
오늘 내 기분은 최고였다.
“그럼 계급이 더 오른 만큼, 더 노력하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거야 오늘이 일등병으로 진급하는 날이었으니까!
중대 본부에서 타 소대 동기들과 함께 간단한 진급식을 마친 후, 나는 작대기 하나가 더 달린 견장을 보며 즐거운 얼굴을 했다.
소대로 돌아가서 바느질을 해야 하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진급했다는 것이었다!
“너무 기뻐….”
내가 아퀼라의 팔을 붙잡고 흔들자, 그도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건 분명 기분이 좋다는 얼굴이었다.
드디어 우리는 이 X같은 곳에서 2년을 버틴 것이고, 일등병으로 진급하는 것이다!
‘XX, 생각해 보면 한국 기준으론 이미 제대했어야 하는데….’
갑자기 이 미친 복무 기간을 떠올리자니 속에서 천불이 끓었지만, 나는 현재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생각 없이 살수록 행복해지는 경향이 있다.
“아, 우리는 오늘 소대 훈련인데 빠져서 좋다.”
감마 소대의 동기 데미안이 그렇게 말했고, 베타 소대의 동기 블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각각 베타 소대와 감마 소대에서 우리의 유일한 동기인데, 가끔 오고 가며 잠깐 대화를 나눈 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진한 동기애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신병 오는 날 아니야?”
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블루에게서 곧장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번 기수는 우리 중대에 신병이 없다고 들었어.”
“그래? 저번에도 없더니, 그래도 다음에는 들어오겠지.”
블루는 중대 본부와 붙어 있는 베타 소대 소속이기 때문에, 정보가 굉장히 빨랐다. 역시 정보 빠른 동기는 도움이 되는 법이다.
“어쨌든 드디어 잡일에서 해방이네.”
무수한 빨래와 제초 작업과 바느질과 기타 온갖 잡일을 떠올리는 내 얼굴이 저절로 아련해졌다. 입대한 뒤로 나는 살림 마스터가 되었다.
‘아무리 주부 9단이라도 이렇게는 못할 거다….’
단점이라면, 옷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도록 빨래하지는 못한다는 거? 역시 향 중의 제일은 치약 향이지!
…갑자기 현타가 밀려왔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데미안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뗐다.
“대신 일등병부터는 국경 경계 근무를 서야 하잖아.”
“응, 그거 한번 서면 엄청 피곤할 것 같더라.”
국경 경계 근무는 말 그대로 국경을 경계하는 일로, 국경방위군의 주요 업무였다. 시간을 정해 초소에서 국경을 경계하는 임무였는데, 마물이 튀어나오는 일이 잦은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일등병 이상부터 근무에 참여했다.
낮이고 밤이고 근무는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가끔 유리가 밤에 근무를 서러 나가는 모습을 보면 차라리 훈련병이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역시 일등병은 일만 해야 하는 거겠지….’
그동안은 낮에만 일하면 됐는데 이제 밤까지 일해야 한다니, XX. 마물들도 잠은 자야 하지 않을까? 밤에는 다 함께 쉬면 안 되는 걸까?
“내가 듣기로는 경계 근무에서 사망자도 많이 나온다고 했어.”
블루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훈련병 시기를 지났으니까 이제 웬만해서는 마물에게 죽을 실력이 아니라며 자만하는데, 경계 근무는 그것보다 훨씬 위험하대.”
순식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하나의 큰 위기를 넘기고 나니, 또 다른 큰 위기를 맞게 되다니.
‘XX, 이놈의 군대는 평화로운 날이 없어….’
“아, 이만 가 봐야겠다.”
“그래, 너도 정보 알려 줘서 고맙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음을 확인한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소대로 흩어졌다.
‘그래도 진급한 게 어디냐.’
조금 전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내 기분은 여전히 최고였다!
‘이제 6년밖에 안 남았어!’
어쨌든 나는 훈련병이라는 고비를 한 번 넘겼고, 6년만 있으면 제대다!
* * *
그러나 소대에 도착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데닌이 사망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입니까?”
나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말실수까지 하며, 어벙한 표정으로 자리에 서 있었다.
“말 그대로다. 데닌이 경계 근무를 하던 중 사망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다른 부대원들을 둘러봤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니 이건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사람 목숨으로 장난 칠 리가 없지.
심지어 인성 파탄 85기, 블레어와 토피오까지 울었는지 눈이 벌게져 있었다.
‘이런 XX….’
나는 깨달았다.
일등병으로 진급했다는 건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위기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XX!
사망한 일등병 데닌은 84기로, 블레어와 토피오의 맞선임이었다. 그는 상등병으로의 진급까지 반년이 남아 있었으므로, 즉 그의 실력은 이미 충분히 인정받았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경계 근무에서 사망하다니….
나는 다시 한번 경계 근무의 위험성에 대해 깨달았고, 이 XX 아포칼립스 세계관은 날 죽이려고 작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포칼립스라?’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로판 속에 빙의한 줄 알았는데 사실 로판이 아닌 거였다면!
“상태창!”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해 볼까?’
“시스템창!”
…마찬가지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
XX…. 그래,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할 짬밥은 지났지. 정신 차려, 사루비아….
결국 나는 오늘도 사람이 죽어 나간 저 위험한 경계 근무에 내가 투입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