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가 이걸 질문한 이유는 뻔했다. 혹시라도 내가 화장실 근처에서 자신이 우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여기서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지.
“이게 빠져 가지고 선임한테 그런 걸 물어?”
“아…! 죄, 죄송합니다!”
베니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이 틈을 타 내가 몰아붙였다.
“입 간수 잘해라. 어휴, 선임한테 이런 사소한 거나 묻고, 정말 나 때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다행히 이걸로 베니의 질문은 넘긴 것 같았다. 나야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베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맞다.’
나는 순간 내 머리를 스스로 깨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XX, 기억력이 금붕어가 된 것도 아니고.’
분명 어젯밤에 베니가 힘들어하는 걸 봤는데, 아무리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라지만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베니는 의기소침해질지도 모른다.
대체 방금 베니한테 왜 그렇게 말했던 거지? 늘 느끼지만, 군복만 입으면 자꾸 생각 없이 행동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지능 디버프 저주라도 걸렸나?
“아냐…. 베니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내가 너한테 어디 갔는지 말해 주지 못한 건….”
내가 눈을 굴리며 대답할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대체 뭐라고 말하지?’
밤에 갑자기 자리를 빠져나간 걸, 뭐라고 변명하냐고. 달밤에 체조가 하고 싶어졌다? 갑자기 연병장이 달리고 싶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미, 밀회.”
“예?”
“밀회를 했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그것도 좀 이상한 대답이라는 걸 깨달았다.
여기가 로판에 나오는 귀족 가문 성이라든가 황성도 아니고, 밀회할 상대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잘못 대답했음을 깨달은 내가 뭐라 해명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베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이제 이해했습니다!”
“뭐?”
“역시 아퀼라 님과 몰래 만나고 계신 게 맞았지 말입니다!”
…대체 무슨 오해를 한 거지?
그렇지만 여기서는 그냥 오해하도록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으응…. 소문 퍼지면 뒤지니까 절대 비밀로 해라…. 마물한테도 얘기하지 말고, 쥐구멍에 대고 얘기하지도 말고….”
“예! 비밀 잘 지키겠습니다!”
베니의 안색은 갑자기 좋아져 있었다. 그녀는 왠지 신난 것처럼 보였다.
‘하긴, 이 폐쇄된 공간에서 남 연애 얘기를 들으니 얼마나 재미있겠냐….’
“하하.”
이제 심지어 베니는 작은 웃음소리까지 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래, 이 오해로 베니의 기분이 나아졌다면 그냥 즐거워하도록 내버려 둬야겠다….
* * *
적어도 하루는 더 두고 관찰하려고 했던 것인데, 어젯밤에도 베니는 자리를 비웠다가 한참 후에 돌아왔다. 화장실에서 다시 울고 온 게 분명했다.
일단 짐작 가는 원인이 하나 있긴 했다….
‘동기들.’
한 달 전 베니의 동기들 세 명이 죽었다. 그건 베니가 충분히 힘들어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름이 샤인, 머스, 그리고 뭐였더라…. 캣일리는 없잖아….’
어쨌든 대충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동기들이 죽었을 때 베니는 한참 동안이나 오열하기는 했다.
그 이후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겉으로만 괜찮은 척했던 모양이었다.
‘…동기들이 죽은 뒤로 쭉 이랬다면, 한 달 동안이나?’
베니가 한 달 동안 계속 밤에 울었던 거라면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나는 나름 챙겨 주겠다고 결심했던 후임의 상태도 파악하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했고, 결론을 내렸다.
‘역시 내 힘으로 수습할 수는 없어.’
물론 내가 베니의 멘탈을 케어해 줄 수 있다면 베니는 이 일로 내게 빚을 지는 거지만, 성공적으로 그녀를 케어해 줄 자신은 없었다.
상처를 가진 인물들을 하나하나 보듬어 주는 건 소설 속 주인공 혹은 전문 심리치료사나 할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둘 중 그 무엇도 아니고, 역시 이런 건 나보다 전문적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낫다.
그리하여 나는 곧장 유리에게 보고했다.
“유리 님, 비상입니다.”
“뭐?!”
나로부터 자세한 상황을 들은 유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곧장 지휘사관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크으, 기력이….”
“제가 가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어 보이는 타로를 대신해, 디어가 소대장에게 보고했고.
그래서 그 후로 베니는 중대 본부에서 상담을 받고 있었다.
‘확실히 이런 문제는 빠르게 처리한단 말이야.’
군 간부들은 자신의 진급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에는 참 신속하게 반응했다.
생각을 마치며, 나는 빨래통에 쌓여 있는 빨래들을 확인했다. 아, 와이셔츠에 마물의 피 튀었잖아. 다시 치약을 꺼내야겠군.
민트향은 입 안에서 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왜 손끝에서까지 나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암울한 표정으로 빨래 바구니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마침 상담을 마치고 온 베니가 나에게로 뛰어왔다.
“아, 사루비아 님!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사양하지 않고 바구니를 그녀의 손에 들려 주었다. 사양은 선임들한테 하는 걸로 충분하다는 게 내 군대 철칙이었다.
빈손으로 덜렁덜렁 베니의 뒤를 따라 걷고 있을 때, 베니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사루비아 님….”
“어, 왜.”
“저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해도 됩니까…?”
“어디 한번 해 보시지.”
“예?”
“아, 미안.”
나는 내 입을 가볍게 찰싹 내리쳤다. XX, 군대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자꾸 말버릇이 삐딱하게 변하고 있다.
내가 베니의 말을 들어줄 듯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옆에 슬쩍 바구니를 내려놓은 베니가 말문을 뗐다.
“저, 그러니까 말입니다….”
“응.”
“사루비아 님도… 제가 더 나빠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뭔 소리야?”
내 천사 후임이, 자기가 더 나빠져야 하냐고 묻고 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가 없다.
“다른 선임 분들은 다들 제가 나약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음.”
그 말에 나는 다른 선임들이 베니를 대하는 태도를 떠올려 봤다.
“오랜만에 엘리트인가 했더니, 저렇게 약해빠진 애일 줄은 몰랐지.”
“여기서 사람 죽는 거에 저렇게 난리 피우다가는 오래가지 못할 텐데….”
이건 얼마 전 내가 들었던, 막 상등병이 된 드림과 캐롯의 대화였다.
“아, 요즘 애들은 다 천사병이야.”
이건 내가 유난히 베니를 챙겨 주자, 유리가 중얼거렸던 말이었고.
확실히 선임들은 베니가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인간들은 가장 중요한 걸 모르고 있잖아….’
베니의 정체를 알면 감히 그런 말을 하겠는가? 나만 해도 베니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
‘잠깐만, 지금….’
이건 기회였다! 베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 지금 이 순간, 베니에게 어떻게든 좋은 말을 해서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자!
…그렇데 ‘좋은 말’은 어떻게 하는 거였지? XX….
“…너는 그냥 남들보다 세심할 뿐이야.”
그녀에게 내 생각을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지 몰라서,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다만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누군가의 죽음에 그렇게 오래 잠식되어 있어서는 안 돼. 나도 동기들이 여섯 명이나 죽어서 네 마음 잘 알아.”
나는 베니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네 동기들의 몫까지 대신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들의 죽음을 극복할 순 없는 걸까?”
그 말에 베니가 눈만 깜빡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임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어?”
“제가 동기들의 죽음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아니야?”
나는 베니의 눈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베니의 눈빛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여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 깊은 곳에서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단단한 신념 같은 것을 잡아냈다.
“제 동기 중에… 카시어 말입니다.”
“응, 기억하지, 카시어.”
나는 그의 이름을 방금 처음 떠올렸으면서도 얼른 아는 척을 했다.
“저는 다 봤습니다. 카시어가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나도 이번 신병들이 입에서 불을 내뿜는 2급 마물 파이어혼에 의해 죽은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노련한 선임들은 본능적으로 불을 피했는데, 신병들은 놀라서 발이 굳은 듯 도망치지도 못했지.
“그 후에 저희는 그 마물이 도망치도록 내버려 뒀지 않습니까….”
“응, 그랬지.”
우리에게 공격을 받은 파이어혼은 국경 너머로 도망쳐 버렸는데, 국경 너머까지 추적할 수는 없으니 우리는 그 마물을 그대로 뒀다.
타로는 파이어혼이 이번에 제대로 공격당했으니 앞으로 인간을 두려워하게 되어 다시는 국경을 넘어오지 않을 거라 말했다.
“없애 버렸어야 하는데, 놓치고 말았습니다….”
‘…어?’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에 당황한 나는 베니를 쳐다봤다. 지금 보니 베니는 단순히 동기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동기들을 죽였던 마물을 놓쳤다는 것에 분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밤이 되면 자꾸 그 생각이 나서 잠에 들 수가 없습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동시에 강한 원한이 실려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죽였어야 했는데, 죽이지 못했습니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눈을 이리저리로 굴리다가, 베니의 손등에 나 있는 상처를 발견했다.
“…그건 어쩌다 다친 거야?”
“아, 잠이 오지 않고 너무 분해서… 화장실 벽에 주먹을 좀 내리쳤더니….”
…오.
베니 얘, XX 강하구나….
나는 깨달았다.
국경방위군에서 원작 시점까지 살아남은 베니가 전투력만 강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정신적으로… 음… 참 강했다. 순진한 얼굴로 XX 강하다….
동기들의 죽음에 슬퍼하던 게 아니라, 원수를 살려 보낸 게 분해서 잠을 자지 못하던 거라니…. 정말 장군감이다. 얘는 자신의 아버지를 뛰어넘고 아예 장군이 될 게 분명하다.
나는 원작에서 여주를 대하는 태도만 보고 그냥 착한 애인 줄 알았는데, 이런 비밀이 있었다니.
“그렇구나…. 원수를 갚지 못해서 괴로웠구나….”
“예, 그리고….”
할 말이 남았는지, 베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선임은 저에게 바보같이 약하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살려면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훨씬 나빠져야 한다고.”
“음, 그렇구나….”
아무래도 그 선임이 베니에게 해 준 조언 때문에 베니가 아까 나에게 ‘더 나빠져야 하냐.’를 물은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 좀 거슬리는 게 있는데….
“혹시 그 선임이 그 말을 할 때 너를 좀 갈궜니?”
“아, 아, 그게….”
“베니, 그 선임이 누구인지 말해 줄 생각은 없니?”
“아,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제 확실해졌다.
‘이 XX는 인생에 도움이 안 돼….’
나는 두 번째로 깨달음을 얻었다. 베니에게 저 말을 한 선임은….
‘베니는 입대한 후 압존법으로 실수한 적이 없지.’
베니는 나에게 그 ‘선임’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를 높여 말하지 않았다. 그 뜻은, 그가 나보다 기수가 낮다는 말이었다.
‘카론, 자이든, 밀피.’
이 중에 범인이 누구일지는 뻔한 일이었다.
‘자이든, 이 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