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미집’의 하드 독자가 아니었으므로 원작에 나온 모든 부대원들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조연 중에서도 ‘베니’라는 이름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작에서 여주 달린의 유일한 여자 선임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드디어 막내 탈출이다!’
베니는 절대로 죽지 않고, 나를 대신하여 여자 숙소의 막내가 되어 줄 것이다!
“하, 베니라….”
“사루비아, 원래 알던 사이야?”
이시나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마 지금쯤 내 눈은 반쯤 풀려 있을 것이다. 막내 시절이 3개월밖에 되지 않는 이시나는 내 이런 기분을 모르겠지.
“베니라는 이름이 너무 사랑스러운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뭐, 뭐라고?”
이시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카론과 눈빛을 주고받았고, 내 뒤에 빨랫감을 들고 서 있던 밀피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막내! 탈출이다!’
베니, 이 사랑스러운 자식. 앞으로 완전 예뻐해 주겠어.
* * *
나에겐 에이프릴과 유리라는 여자 선임이 있었지만, 달린이 입대했을 때 그들은 모두 이 부대를 떠난 뒤였으므로 그녀의 유일한 여자 선임은 베니였다.
원작에서는 내가 빙의한 이 몸 사루비아까지 죽는다는 문제가 있긴 한데, 내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 어떻게든 잘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베니가 살아남을 거라는 사실이다.
원작에서 베니는 엄청난 천재였다. 바람 오러를 다루는 검술의 천재로, 윈터나 아퀼라와 맞먹는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원작에서 베니는 성격도 아주 유하고 착했는데, 달린이 실수를 할 때마다 무리하지 말라며 잘 다독여 주고는 했다.
그녀는 남주들에 못지않은 여주의 헌신적인 아군이었다. 왜, 몇몇 로판에 등장하고는 하는, ‘귀족 영애 여주의 충성적인 시녀’ 캐릭터가 있지 않은가?
여주가 조금만 신경 써 주면 감동이라고 눈물을 흘리거나, 육아물의 귀여운 아기 여주가 자존감 낮은 모습을 보이면 눈물을 흘리거나, 악녀물의 여주가 갑자기 착하게 행동하면 눈물을 흘리거나.
어쨌든 여주가 무얼 하든 좋게 봐주고 그 어떤 상황에서든 여주를 배신하지 않고 여주를 돕는 동성의 조력자 캐릭터. 남주들이 아무리 다 해 먹어도 동성의 조력자 캐릭터는 한 명쯤 필요하다. 베니가 바로 그 역할이었다.
여주의 선임이라 시녀보다는 지위가 더 높다는 차이점이 있긴 했지만, 여주가 무얼 하든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해 주는 캐릭터.
‘성격은 호구 같을 정도로 착했지.’
종합해 보자면, 능력 있는 천재면서 호구처럼 착한 후임.
베니는 그야말로 완벽한 후임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베니의 뛰어난 실력이나 착한 성격 같은 게 아니야….’
베니에게는 아주 놀라운 비밀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투스타의 딸…!’
베니의 아버지는 별이 두 개셨다.
다시 한번 말한다. 별이 두 개이시다.
물론 황태자 습격 사건으로 인해 별 두 개 정도는 별로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투스타가 부대에 방문하면 부대에는 폭탄이 떨어지는 것이다.
베니의 아버지는 바로 그 투스타였고, 소장이며 사단장인 것이다.
그 사실을 밝히면 중대장까지 베니의 앞에서 절절매며 군 생활이 필 수도 있는데, 원작에서 베니는 그것을 감추고 생활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일을 불편하게 여겼으니까.
그러니까 그녀는 일종의 ‘힘숨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자기 정체를 밝힌 건 언제더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여주의 조력자’ 역할인 만큼 달린이 위험에 빠졌을 때 정체를 밝혔던 것 같다. 몇 년간 숨겨 왔던 정체를 달린을 위해 쉽게 밝히다니, 역시 또 달린의 입지가 부러워진다.
‘어쨌든 지금 이 부대에서 베니의 정체를 아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거지.’
…세상에, 내가 거의 처음으로 원작 정보를 이용할 날이 온 것 같다!
베니를 잘 챙겨 주면, 베니는 당연히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겠지?
그럼 내가 이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생겼을 때, 베니가 자신의 파워를 이용해 줄지도 모르겠다!
‘베니, 무조건 내가 잘 챙겨 주겠어….’
원작 정보를 이용하다니, 정말 빙의물 여주가 된 기분이었다. 나 자신, 여주력 +100.
“반갑다, 베니.”
“아, 안녕하십니까…!”
내가 가볍게 인사하자, 베니가 움찔 놀라며 얼른 화답했다.
그녀는 나보다 어려 보였고, 순하고 동글동글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갈색 단발머리나 잡티 한 점 없는 하얀 피부에서는 묘한 귀티가 흐르기도 하는 게, 사랑받고 자란 아이처럼 보였다.
“반가워, 나는 사루비아라고 해.”
가벼운 인사를 마친 후, 나는 베니에게 숙소 안 물품의 위치에 대해 안내해 주기 시작했다. 베니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했다.
‘하, 너무 완벽한데?’
입대한 뒤로 상황이 이렇게 좋게 흘러간 적이 없었는데, 모든 게 너무 완벽해서 의심될 지경이었다.
‘군대에서 일이 너무 잘 풀리면 불안한데.’
알고 보니 이게 다 꿈인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내 앞에 있는 사랑스러운 베니의 모습을 보자니 꿈 같지는 않았다.
내가 베니에게 소대의 생활에 대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설명하고 있을 때, 텔레비전을 감상하는 자세로 누워서 우리를 지켜보던 유리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를 불렀다.
내가 유리의 앞으로 다가가자, 유리는 베니에게 싸늘한 어조의 말을 건넸다.
“신병, 화장실은 어딘지 알지? 가서 손 좀 씻고 오도록.”
“잘 못 들었습니다…?”
갑자기 손을 씻고 오라니, 정말 생뚱맞은 말이었다. 유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베니가 갈색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자, 유리가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개인위생 수칙을 철저히 지켜야 할 것 아니야. 가서 손 씻고 와.”
“아, 알겠습니다!”
‘베니는 참 착한 애구나….’
정말로 유리의 말대로 손을 씻으러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내가 생각했다. 무슨 일인지 되묻지도 않고 저 갑작스러운 명령을 그대로 따르다니.
나는 고개를 돌려 유리를 쳐다봤다. 베니를 밖으로 보낸 건 나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가 분명했으니까.
유리는 여전히 이곳이 자신의 안방인 것처럼 편한 자세로 누워 있었는데, 사실 짬밥 부족한 훈련병 둘 따위야 중요하지 않으므로 이곳은 정말 유리의 안방이기는 했다.
어쨌든, 베니가 나가고 난 뒤에야 유리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물었다.
“갑자기 왜 다시 천사 모드가 됐어?”
아, 아무래도 유리는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후임에게 너무 정을 붙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자신 있게 할 말이 있었다.
“유리 님.”
“어.”
“제가 장담합니다. 이번 신병은 틀림없이 천재일 겁니다.”
“뭐?”
“제 감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번 신병은 검을 쓸 때마다 바람이 흩날리고 천지가 진동하는 엄청난 천재일 게 분명합니다!”
그 말에 유리가 황당함을 담은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 돌았냐?”
“정말입니다! 느낌이 옵니다! 이번에는 천재일 게 분명합니다!”
“이게 빠져 가지고, 어디서 선임한테 약을 팔아?”
* * *
그리고 일주일 뒤, 유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이게 되네.”
유리의 그 작은 중얼거림은 다른 선임들의 환호성에 가려져서 들리지도 않았다.
“와, 오랜만에 천재가 들어왔나 본데!”
“신병, 장난 아닌데?”
“좋아, 좋아! 드디어 좀 엘리트가 들어왔군!”
첫 검술 훈련에서 베니가 얼마나 활약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르콘 부부 사이에서 자랐다는 베니는 입대 전부터 이미 검을 잡아 봤다고 했는데, 그녀가 검을 잡은 순간 우리는 모두 그녀의 천재성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하얀 오러 블레이드가 그녀의 검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어딘가에서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며 수풀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크고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검을 내리친 순간, 강한 돌풍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렸다.
짝짝짝-!
대련용 인형에서 나온 볏짚이 흩날리는 가운데, 수줍은 표정의 베니를 둘러싸고 박수가 쏟아졌다.
물론 선임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완벽해!”
인성과 실력 모두 보장된 후임이 들어오다니, 정말 완벽한 나날이다!
“사루비아 님….”
“응, 왜?”
내가 박수를 치고 있자니, 어쩐지 배신감 어린 표정을 한 카론이 눈꼬리를 축 내린 채 말했다.
“저… 저보다 이번 신병이 더 좋으신 겁니까?”
“설마. 너는 내 맞후임인데 그거랑은 다르지. 쟤랑 너랑 짬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하지만 저한테는 그렇게 박수 안 쳐 주셨지 말입니다….”
그 말에 나는 조금 어이없는 기분이 되었다. 아니, 앞으로 뭘 할 때마다 내가 박수까지 쳐 주어야 하는 건가? 그건 맞후임이 아니라 그냥 개 아닌가?
그렇지만, 나는 카론을 달래기 위해 긍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앞으로 너한테도 박수 많이 쳐 줄게.”
짝짝짝-!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박수를 치자, 카론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내가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아퀼라도 슬그머니 나를 따라 박수를 쳤다.
아퀼라와 내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나는 이제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아퀼라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렇게까지 해 줘야 해?’
‘해 주자, 본인이 좋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