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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42화 (44/233)

이건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내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윈터를 보며 입만 뻐끔거리자니, 윈터가 말을 이었다.

“진짜 국경을 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예? 예…. 그, 그게 아니고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말을 더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윈터는 나와 대조되는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그 특유의 표정이라고 생각했던 게 이제는 나를 죽여 버리겠다는 표정으로 느껴졌다. 꼭 저승사자 같았다.

“정말로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군.”

“…예?”

내가 하얗게 질린 채 ‘예’만 반복하고 있을 때, 윈터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평소에는 겁도 없으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긴장하지?”

“예?”

나는 나를 혼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윈터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생각해 보니 사건이 터지고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나한테 얘기를 꺼낸 것도 이상했다. 나를 탈탈 털려는 거면 그럴 리가 없지.

“죄, 죄송합니다….”

내가 일부러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사과하자, 윈터는 이해하지 못한 듯한 얼굴을 했다.

“왜 사과하는 거지?”

“제가 밀고를 했으니까….”

그러자 윈터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밀고라니, 그건 합당한 고발이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정의감에 불타올랐다.

“그건 군 생활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황실이 직접 관여하여 만든 정당한 제도이고, 넌 그 제도에 따라 너의 고충을 정당하게 작성했을 뿐인데. 네가 불이익을 받으면 그건 황실에게 반기를 드는 거나 다름없다.”

‘와. 역시 윈터.’

이전에 그가 암묵적인 규칙보다도 군법이 위에 있고, 그 위에 황실이 있다고 했었는데….

윈터가 침묵을 지켜 준 것은 그가 황실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네가 이걸 썼다는 건 비밀로 해 주도록 하지. 사랑의 편지는 익명성을 유지하는 게 원칙이니까.”

“윈터 님….”

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윈터를 쳐다봤다.

물론 이걸로 ‘윈터가 혹시 나를 좋아하나? 로판 전개가 드디어 시작된 건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면 그건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고, 그렇다면 그는 전출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윈터를 잘 안다. 그는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감정을 어떻게 통제하냐 하겠지만, 사람의 기척과 땅의 울림도 느끼고 자신의 호흡까지 통제하는 전지전능한 그가 고작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아직 할 말이 끝나지 않은 듯, 윈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나 그렇듯 지금도 지적하고 싶은 게 넘치지만.”

…감동이 깨지는군.

“내게 도움이 되었으니, 눈감아 주도록 하지.”

“예?”

“네가 한 일이 나에게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니, 나도 보답을 하는 게 맞겠지.”

도움이 됐다는 건… 내가 편지를 쓴 덕분에 가그네를 힘들이지 않고 꺾을 수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은데….

“앞으로 원칙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하도록.”

…잠깐만, 저건 그 누구에게도 먼저 저런 말을 할 리 없는 윈터의 성격상….

내가 자신의 라인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자신에게 도움을 준 대가로, 자신도 앞으로 내게 도움을 주겠다는 얘기였다!

감동이 다시 차오른다!

“윈터 님은 정말 최고의 선임이십니다…!”

이 순간 나는 다른 선임들의 존재를 잊고 내 마음속 1위의 자리에 윈터를 올렸다.

뒤끝 없고 깔끔한 선임, 정말 최고다. 쿨하고 민트하고 아이시한 선임, 정말 최고다!

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별것 아니라는 양 넘기고, 윈터는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

퇴장하는 뒷모습조차 정말 쿨해 보였다.

‘생색내지 않는 저 모습…!’

나는 내 마음속에서 윈터의 가오를 조금 격상시켜 주기로 했다.

* * *

“이봐, 저기 물건을 떨어뜨린 것 같군.”

“아, 아! 죄송합니다!”

윈터가 바닥에 떨어진 양말 하나를 가리키자마자, 그의 후임인 일등병 데닌이 빠르게 튀어 나갔다.

그는 숙소 안 자신의 자리인 알타이르의 옆에 앉으려다, 후임 하나가 그곳을 청소하는 것을 보고는 가만히 서서 기다려 주었다.

“앗, 윈터 님! 죄, 죄송합니다!”

그러나 훈련병 밀피는 그를 보자마자 사색이 되더니 굽신거리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윈터가 자리에 앉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알타이르가 소리 내어 웃었다.

“푸하하!”

윈터가 고개를 돌려 알타이르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웃지?”

“아니, 안 웃겨?”

알타이르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 후임들은 네가 무슨 살인 병기라도 되는 것처럼 두려워하는 게 웃기잖아.”

“어디가 웃기다는 거지?”

“그 점도 웃겨.”

윈터가 소대 안에서 사적인 대화를 하는 건 자신의 두 동기 알타이르와 유리가 전부였는데, 그중에서도 알타이르는 늘 윈터를 재미있게 여기고는 했다.

알타이르의 말을 들으며, 그는 사루비아를 떠올렸다.

그래, 보통 이런 식으로 후임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게 그에게 익숙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사루비아는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겁이 없는 성격인 것 같았다.

문득 그는 알타이르에게 이 사실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졌다.

“사루비아는….”

그러자 알타이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무슨 일이지?”

“아니, 아냐…. 일단 계속 얘기해 봐.”

오묘한 표정의 알타이르를 앞에 두고, 그가 말을 이었다.

“사루비아는 이 중대 안에서 제일 겁이 없는 게 분명하더군.”

“너 보는 표정 보면 그래 보이긴 하더라. 왜, 오늘도 그랬냐?”

“그래.”

“흠….”

알타이르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윈터에게 가까이 붙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래서 왜? 관심이 생겨?”

윈터는 알타이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후임에게 이성적 의미의 관심을 갖는다는 건 군법 위반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윈터의 얼굴을 본 알타이르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휴~. 그래야 너지.”

“그래,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도록.”

윈터는 수첩을 꺼내 평소와 같이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알타이르는 평소의 웃는 얼굴로 그 모습을 구경했다.

“휴~. 역시 이렇게 딱딱하게 기록부터 해야 평소랑 같은 너….”

그 순간, 갑자기 알타이르가 말을 멈췄다.

“…야, 윈터.”

알타이르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윈터의 팔을 붙잡았다.

“야, 야, 너….”

알타이르가 일지에 적힌 철자 중 하나를 가리켰다.

“왜 이 알파벳 뒤집어썼어?”

거기에는 S라고 적혀 있었다. 원래의 철자를 뒤집어쓴 모양이었다.

순간 윈터는 숨을 멈췄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 알파벳을 뒤집어쓴 건지 알 수 없었다.

“…최근에 뒤집힌 모양을 많이 봤더니, 실수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알타이르가 재촉하며 물었지만, 윈터는 그 질문에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최근에 사루비아가 저런 식으로 철자를 자주 뒤집어쓴 건 알고 있었지만, 대체 자신이 왜 철자를 뒤집어쓴 건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침묵이 길어지자, 알타이르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왜 고장 났냐…?”

알타이르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늘 정해진 길을 따라가던 그의 동기가, 조금씩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 원인이 무엇일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알타이르는 왠지 그가 점점 더 고장 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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