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알타이르.’
그동안 윈터와 알타이르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쿨민트아이스 78기의 유능함을 칭송하는 말을 했다.
“역시 윈터 님, 일등병 때부터 돋보이는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선임분들이 후임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해 주신 거 아닙니까.”
“윈터 님은 정말 부대 내의 모든 일을 혼자서 통제하시는 것 같습니다…. 78기 분들만 존재하셔도 부대는 잘 굴러갈 게 분명합니다.”
그들이 이전부터 선임들에게 인정받아 왔으며, 지금도 부대 내의 일을 대부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되짚어 줬다.
엘리트 기수였던 78기는 단순히 질투심만으로 그들을 갈궈 온 77기, 즉 가그네의 기수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나는 그들에게 77기를 적대할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다.
게다가 알타이르는….
‘78기의 유일한 사회성!’
늘 쿨하고 민트하고 아이시하며 원칙주의자인 윈터나 유리와 달리, 알타이르는 후임들에게는 꼰대이지만 선임들에게는 아부 전문가였다. 그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줄 알았고, 필요할 때면 굽힐 줄 알았다.
그런 그가 가그네의 파워를 꺾어 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가그네 님은 당분간 좀 쉬고 계십시오. 저희가 잘 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저희만으로도 부대는 그동안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알타이르의 말에도, 상황이 상황이기에 가그네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꽉 깨물었다.
심지어 윈터조차도 가시가 돋혀 있는 동기를 만류하지 않았다. 선임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윈터도 가그네를 거슬리게 여기고는 있었으니까.’
윈터도 사람인데, 스스로의 손을 쓰지 않고도 거슬리는 선임을 제거할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그래, 너희라면 믿을 만하지.”
“앞으로 너희가 잘해라~.”
선임들은 가그네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동안 늘 잘해 왔던 엘리트 기수인 78기를 격려할 뿐이었고.
가그네가 완전히 파워를 잃은 모습을 보며, 나는 몹시 즐거워졌다.
‘싫은 사람이 있으면, 아예 그 사람이 서 있는 기반을 파괴해야지.’
이제 어떤 식으로든 자이든은 다시 뒷배를 얻지 못할 것이다.
* * *
그 이후로 일주일이 흘렀다.
가그네는 더 이상 우리를 건드리지도 못했으며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구석에 쭈그러져 있었고, 78기가 주로 후임들을 관리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전부터 부대의 전반적인 것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78기였기 때문에, 달라진 것이라고는 더 이상 가그네가 우리를 갈구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권력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선임들의 눈치를 보았지만, 다른 선임들은 78기의 부대 운영에 만족했기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그 결과, 부대 분위기는 조금 더 밝아져 있었다.
‘윈터의 라인을 타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윈터와 알타이르의 생각을 알게 됐으니까.’
역시 윈터 라인을 타는 것은 난이도가 너무 높았나 보다.
‘원작을 더 활용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나는 원작 ‘네미집’의 대략적인 내용밖에 기억하지 못하니, 빙의물 여주들처럼 원작 정보를 활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뭐, 라인 타기는 실패한 대신 그들이 선임들에게 가진 적개심을 확인하고 그것을 각인시켜 주어 가그네를 꺾도록 만들었으니, 결과적으로 내가 목표하던 것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사루비아 님, 혹시 저희 비품 관리는 어떤 분이 담당하시는 겁니까?”
“아, 네 신발? 윈터 님이나 알타이르 님께 여쭤봐.”
“네, 감사합니다.”
밀피가 나한테 질문을 하고 떠나려다가, 나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기분 좋은 얼굴로 카론과 벌초를 하던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할 말 있어?”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드려도 됩니까?”
“어디 한번 해보시지.”
“예?”
“아, 기분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밀피의 표정이 순간 오묘해졌다가, 곧 평온한 표정을 되찾은 그가 물었다.
“저희 지휘사관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응?”
“아, 저번에 보니깐 궁금해져서….”
“아하.”
밀피가 입대한 뒤로 알파 소대에 있는 두 명의 지휘사관은 늘 어딘가에 짱박혀 있었으니, 가그네 사건 때 주도적으로 소대 일에 개입한 그들의 모습을 보며 밀피는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엘리엇 님은 뭐, 평범한 분이시지. 평범한 말년이셔. 음, 그리고 타로 님은….”
순식간에 내 표정이 아련해졌다.
“타로 님은… ‘그 사건’을 겪은 후 모든 에너지를 잃고 조용히 지내시지….”
“예?”
“‘그 사건’만 없었어도, 지금처럼 피곤에 지쳐 있지는 않으실 텐데…. 어쨌든 늘 피곤해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돼….”
‘황태자 습격 사건’을 떠올리자니 갑자기 우리 중대의 모두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밀피는 황당한 얼굴로 슬쩍 카론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카론도 나를 따라 그때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아…. ‘그 사건’ 말씀이지 말입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래, 난 그때 정말 탈영할 뻔했어….”
“다시는 ‘그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으으, 부정 타니까 그건 말이라도 꺼내지 마.”
밀피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대체 ‘그 사건’이 뭡니까…?”
“안 돼. 부정 타니까 말해 줄 수 없어.”
“아, 예….”
미친 사람을 보듯 우리를 쳐다보던 밀피는, 결국 우리에게 인사를 한 후 자리를 떠났다.
음, 역시 후임은 자이든처럼 건방진 쪽보다 저렇게 적당히 놀려먹을 수 있는 쪽이 낫지.
* * *
“사루비아 님, 윈터 님께서 찾으십니다.”
“아, 그래?”
나는 즐거운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른 자이든을 쳐다보았다.
나한테 고까운 태도를 보이던 이전과 다르게, 자이든은 나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 눈을 잘 마주치지도 않았고 이제 공손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의 라인을 박살 냈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뒷배가 없어졌다는 데에서 자신감이 사라진 것도 같았다.
뭐, 어떻게 됐든 이걸로 소대 내에서 자이든의 힘은 완전히 약화될 테니 나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나중에 감히 아퀼라한테 대적할 생각도 하지 못하겠지.’
나는 내 동기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사람이 가끔씩 이렇게 정치질도 해 줘야 사회생활이 수월한 편인데, 아퀼라는 그렇게 정직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다. 진짜 얘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지?
‘그나저나 윈터는 대체 날 왜 부르는 거지?’
가그네의 일이 터진 뒤로 상등병들은 한동안 혼란스러운 상태였기에, 윈터와 내 수업도 거기서 끝났다. 윈터는 나에게 글에 대해 더 알려 줄 것이 없다고 확언한 상태였다.
‘설마 뭘 더 가르치려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나는 내가 아는 윈터라면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자신이 한 말을 어길 리가 없었다.
‘뭐, 일단 가 보면 알겠지.’
나는 여전히 내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자이든을 뒤로한 채, 윈터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 * *
사루비아가 떠난 자리, 자이든은 한동안 땅만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사루비아의 모습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으.”
사루비아를 떠올리자니 저절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아서, 그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는 사루비아가 두려워졌다.
사루비아의 얼굴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던 그는 그녀가 좀 더 순종적으로 굴기만 한다면 자신의 이상형에 완전히 부합하리라 생각했다. 선임이지만 워낙 여려 보였기에 그 정도 컨트롤은 가능하리라 생각했으나….
‘완전히 미쳤어.’
사랑의 편지가 발견되었던 바로 그날, 상등병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후임들은 한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유리의 심부름으로 잠시 물을 떠오러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사루비아의 표정을 보고 말았다.
상등병들은 후임들 쪽에 신경도 쓰지 않고, 후임들은 감히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는 분위기였으므로, 오직 자리에서 일어난 자이든만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사루비아는 예쁘게 웃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신비롭다고 생각한 머리카락이 하나로 묶여 있고, 그 아래의 얼굴은 희고 말갰다.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청초한 느낌을 주며, 피부에 도는 생기가 그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사루비아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누구보다 밝고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건 비록 자이든이 상상했던 ‘밝고 환한 웃음’이기는 했지만….
‘저건 미친X이야.’
그 모습을 본 순간, 자이든은 탈영 예고를 적은 주인이 바로 그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제야 알았다. 사루비아는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을 것이고, 남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실천으로 옮길 것이다.
자이든 자신을 제거하는 건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그 후로, 그는 사루비아가 진심으로 두려워지게 된 것이었다….
“으.”
다시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해서, 그가 얼른 자리를 떠났다. 최대한 사루비아와 마주칠 일이 없도록 빨래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윈터 님?”
무기고 당번이었는지, 무기고 안에서 막 나오는 윈터를 발견한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윈터는 고개를 돌리더니 청회색 눈동자로 무심하게 나를 쳐다봤다.
“사루비아, 왔나.”
“예,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무기고 안에는 그 혼자만 있었던 듯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의 앞에 가까이 서자, 윈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뭐지?’
왠지 긴장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건 내가 오바하는 게 아니라, 원래 군대에서는 중간만 가는 게 최고였다. 누구도 내 존재를 깊이 기억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예를 들어 윈터만 해도 지나치게 일을 잘하는 엘리트로 중대에 소문이 났기 때문에, 일등병 때 매일 중대 본부에 끌려가서 한 마리 소처럼 일만 하지 않았는가.
그 대가로 그는 매일 내 마음속에서 –2씩 가오를 잃고 있었다.
하긴 나 또한 가그네에게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고, 윈터에게는 붙잡혀 글을 배워야 했으니, 정말 선임들과 극단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중간만 가는 건 글렀긴 했지.’
내가 긴장한 얼굴로 윈터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마침내 윈터가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혼내는 건가?’
“글자 뒤집어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예?”
분명 최근에는 윈터의 앞에서 글을 쓸 일이 없었다.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윈터를 쳐다보자, 윈터가 일말의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은 채 말했다.
“너는 중요한 순간에도 계속 글자를 뒤집어써.”
“예? 그게 무슨… 아!”
무언가를 깨닫자마자,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느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마 지금쯤 얼굴도 하얗게 질려 있을 것이다.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어서, 이러다 팡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사랑의 편지.’
깨달았다.
나는 거기에서도 ‘뒤집힌 S 모양의 철자’를, ‘그냥 S 모양’으로 적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더라도, 지금까지 내가 글을 적는 것을 봐온 윈터라면 틀림없이 그 편지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X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