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39화 (41/233)

일등병 중에서 제일 기수가 낮은 블레어와 토피오가 툴툴거리며 아퀼라와 내 기수에게 철조망을 보수하는 법을 알려 주고 난 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블레어 님, 토피오 님.”

“XX, 뭐야?”

토피오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욕을 하며 나를 쳐다봤다.

‘정말 답 없는 인성이군.’

배를 누르면 “사랑해.”가 튀어나오는 곰돌이 인형처럼, 그들은 후임이 이름을 부르면 일단 욕부터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를 꾸며 내며 친근한 태도로 말을 붙였다.

“저 요즘 윈터 님께 글을 배우고 있는데, 예전에 두 분도 글을 배우셨다는 걸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XX. 너 지금 나 놀리냐?”

“이게 선임 보고 무식하다고 엿 먹이나, XX.”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윈터 님은 원래 그렇게 꼼꼼하신지 궁금해서 여쭤 봤습니다.”

내 목소리에는 은근히 지친 기색이 담겼다. 그러자 그걸 들은 블레어와 토피오의 얼굴이 갑자기 아련해졌다.

“하, XX…. XX 힘들었지….”

“끔찍하군, XX….”

“아,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비밀 얘기라도 하는 양 주위를 둘러본 뒤 말했다.

“윈터 님께서 이번에는 후임에게 군법을 가르치겠다고 하셨는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록 그 대상이 나로 한정된 것이라는 사실은 빠뜨렸지만.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블레어와 토피오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해졌다.

“뭐? XX?!”

“뭐라고?! 그 X같은 공부를 또 해야 한다고?!”

“확정된 건 아니지만… 그냥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시라고 알려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내 말은 더 이상 그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넋 나간 얼굴로 비척비척 사라지더니, 우울하게 작업을 시작했다.

우리 밑의 후임들에게도 철조망 보수 작업 방법을 알려 줘야 한다는 건 완전히 잊은 모양새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가, 자이든과 밀피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여기 도와줄 사람?”

“예, 예?!”

그러자 밀피가 화들짝 놀라며 뛰어왔다.

‘자이든이 자발적으로 나를 도울 리가 없지.’

그렇다고 블레어와 토피오에게 다가가서 먼저 물어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걸리기만 하면 누구라도 잡아 족치겠다는 표정이었으니까.

그리하여 밀피에게 철조망 보수 작업을 설명해 주며, 나는 엉성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자이든을 흘끔대기만 할 뿐이었다.

* * *

조금 뒤, 중대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중대장은 너희들에게 실망했다.”

이게 미연시였다면 현재 호감도 –200쯤은 거뜬하게 달성했을 것이다.

작심삼일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중대장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성실히 우리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내가 일 년 동안 쓴 일기의 횟수보다 중대장이 우리에게 실망한 횟수가 월등히 많을 것이다.

그리고 중대장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바로 자이든이 담당한 구역이었다.

“대체 이 부분의 철조망은 어떤 소대가 담당한 거지?”

‘중대장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기껏해야 소대장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이 좀 커진 것 같았다. 그래도 내 계획의 범주를 벗어난 건 아니었으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제일 기수가 높은 우리 소대의 일등병 두 명이 당황한 얼굴로 서로 눈을 마주쳤다. 소심한 일등병 캐롯이 우물쭈물하자 그의 동기 드림이 대신 답했다.

“알파 소대입니다.”

“그래? 다시 작업하도록.”

중대장은 우리에게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였으며. 당연하지만, 모든 일이 소문나는 군대에서 상등병들이 그 소식을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 위에서 잔소리 좀 안 내려오게 하자, 좀~.”

조금 뒤의 집합에서, 오랜만에 어슬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레온과 브레이브가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진급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은 최근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 이들이야말로 ‘폭력과 공포 어쩌구’의 대명사이자 전문가였다.

“실수 좀 하지 말자고, 어? 누구냐?”

레온이 껄렁거리며 묻자, 사실을 숨길 수 없음을 직감한 듯 자이든이 손을 들었다.

“저, 접니다.”

“아오, 장난하나, 진짜….”

“저, 근데….”

자이든은 가그네의 얼굴을 본 뒤 용기를 얻은 듯 아까보다 힘이 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방법을 안 알려 주셔서….”

“아니, 걍 부딪쳐 가면서 배우는 거지, 진짜!”

브레이브는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이었지만, 매사에 공명정대한 플라토는 자이든의 말을 귀담아들은 것 같았다.

플라토는 일등병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힘주어 물었다.

“너희가 알려 줘야 했을 텐데, 아니야? 그게 너희 일일 텐데.”

“예, 블레어랑 토피오 보고 맡겨 뒀습니다.”

드림의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블레어와 토피오에게로 꽂혔다. 그들은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저 인간들 인성은 뻔하지.’

곧 동시에 입을 열었다.

“부, 분명히 알려 준 것 같습니다.”

“예, 맞습니다….”

“알려 준 것 ‘같아’? 장난하냐?”

“아, 아니, 저희가 알려 줬습니다!”

그들이 당당하게 거짓말을 하는 걸 보며, 나는 내가 지금보다 좀 더 신병이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나도 그때 저 XX 인성 파탄 85기 때문에 참 많이 고생했지….

군대에서는 언제나 짬 많이 먹은 쪽의 말을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시선은 다시 자이든에게로 쏠렸다.

늘 내 앞에서 허세를 부리던 자이든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좀 즐거워하고 있을 때, 자이든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변명을 꺼냈다.

“그, 그 전에 가그네 님 심부름을 다녀오느라 제가 좀 늦어서 방법을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본능적인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잘못된 선택이었지. 왜냐하면 이 자리에는 가그네보다 기수가 높은 선임들이 있으니까.

플라토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가그네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가그네, 진짜야? 넌 요즘 쟤한테 왜 저렇게 심부름을 자주 시켜.”

그게 플라토의 핀잔이나 다름없다는 걸 가그네가 모를 리 없었다.

‘가그네는 평소에 자기보다 선임인 상등병들의 눈치를 너무 안 봤단 말이지….’

그는 오로지 자신의 고향 동기인 자이든의 편의를 봐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거기다 더불어 늘 자신과 비교되어 온 탓에 거슬리는 맞후임들, 쿨민트아이스 78기를 견제하는 데에 집중했고.

가그네가 여기서 자이든의 말을 인정한다면, 공명정대함을 중시하는 플라토는 최근 가그네가 너무 불공평하게 행동했다면서 그를 탈탈 털 것이다.

결국 가그네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저는 그런 적 없지 말입니다.”

자신을 당연히 보호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자이든의 표정이 충격으로 굳었다.

“…그럼 네가 거짓말했냐?”

“에휴, 싹수 노란 놈.”

선임들의 비난은 이제 자이든에게 쏟아졌고, 그 사이에서 자이든은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다.

애초에 이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가그네는 누가 보더라도 티 날 정도로 자이든을 챙겼다.

그러나 자이든이 가그네보다 선임인 기수들의 눈에 들어갈 정도의 큰 실수를 한다면, 선임들의 질타를 피하기 위해 가그네가 자이든을 버려야 하는 건 당연했다.

고작 그 정도의 관계인지도 모르고 가그네를 지나치게 신뢰했던 자이든이 멍청했지.

일단 자이든의 빽을 잘라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고작 일이 이걸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자이든은 여전히 내게 뻣뻣한 태도고, 자이든과 멀어진 이후 가그네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알 수 없는 문제니까.

‘…상황이 안 좋아진다면 와일드카드라도 쓰자.’

그래도 아직 나에게 남아 있는 패가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 * *

역시나, 그 일로 인해 자이든과 가그네의 사이가 서먹해진 후 가그네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가그네는 자신의 수족을 잃은 것이 불만인 듯 후임들에게 매우 가혹하게 굴기 시작했다.

“야, 오늘 자 식단 정도는 외워 오란 말이야!”

“어제 잘 때 숨소리 시끄럽게 낸 XX 누구냐?”

“야, 방금 내가 빨래 떨어뜨렸으니까 다시 해라.”

가그네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뻔했다.

‘권력을 완전히 다져 놓으려는 거군.’

동향 후임을 자신의 라인으로 만들어 제 무리를 구축하려다 실패했으니, 자신의 맞후임 쿨민트아이스 78기의 권력이 더 강해지기 전에 자신의 입지를 완전히 다져 놓으려는 게 분명했다.

‘자이든이야 뭐 가그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제대로 꺾어야 할 건 가그네지.’

가그네와 서먹해진 뒤로 자이든은 좀 얌전해졌다. 그건 지금까지 자이든이 방종하게 굴던 힘이 가그네로부터 나왔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고향의 연이 있으니, 가그네는 언제 다시 자이든과 관계를 회복할지 모른다.

‘…그냥 극단적으로 가자.’

조금 위험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차라리 바로 이때 확실하게 행동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중대 보수 작업을 하며 열심히 후임들을 털고 있는 가그네의 모습을 보다가, 카론에게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카론, 너도 지금 이 상황이 별로지?”

“예? 예.”

눈을 동그랗게 뜬 카론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머릿속에는 계획이 하나 있었는데, 그걸 위해서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 계획을 듣는다면 이시나는 나를 뜯어말릴 테고….

‘아퀼라도 절대 안 도와주겠지.’

왜냐하면 이건 나도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는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론이라면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고 내 말을 잘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카론,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내가 얘기할 내용은 충분히 긴장할 만큼의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사편을 쓰자.”

“예? 그게 뭡니까?”

카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기에, 내가 다시 한번 말했다.

“사랑의 편지를 쓰자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