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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38화 (40/233)

“뭔 소리야? 밀피랑 대화한 건 방금이 처음인데?”

“예전엔 말을 섞으려고 하신 적도 없지 않습니까….”

“음, 밀피한테 신경을 써 줬다기보다는, 블레어 님과 토피오 님의 인성을 신경 쓴 거라고나 할까….”

그 말에 카론은 불만스러운 얼굴이기는 해도 내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도 그들의 인성에 대해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카론은 여기서 그칠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자이든에게는 왜 신경 쓰시는 겁니까?”

대체 여기서 자이든이 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설마 자이든보다 카론을 후순위로 생각할 리가 있겠는가?

“자이든이 왜?”

“아, 아퀼라 님이 그러셨습니다.”

카론이 아퀼라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요즘 자이든이 성가시게 해서 윈터 님과 알타이르 님이랑 친해지시려는 거라고….”

“아니, 야….”

내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아퀼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는 무슨 애한테 그런 얘기를 해?”

“왜, 맞는 얘기잖아. 네가 잘 챙겨 주라며.”

“애한테 그런 얘기까지 하라는 건 아니었지! 아, 못 살아, 진짜.”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라, 나는 아퀼라의 팔을 가볍게 몇 대 때렸다. 정말 더 피곤해지는 기분이다. 아퀼라, 다 이게 미래의 너를 위한 거란 말이야.

내가 구상한 큰 계획에 이들도 좀 협조해 줬으면 좋으련만, 카론은 왜 요즘 자기한테 관심을 안 주냐는 소리나 하고 있고 아퀼라는 내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툭하면 예민해진다.

안 되겠다. 큰 계획이고 뭐고, 일을 좀 더 빠르게 처리해야겠어.

일단 자이든이 나에게서 얻어 내고자 하는 반응이 무엇인지 확인해야겠다.

나는 그대로 자이든에게 직진해서, 다시 한번 자이든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곤 그의 회색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끔 거울을 보면서 나 스스로도 감탄하곤 하는 ‘사루비아 3대 예쁜 표정’ 중 하나였다.

‘내가 자신한테 화내는 걸 즐기는 게 아니라면, 내가 자기 앞에서 얌전해지기를 바라나 보지?’

반쯤은 찍은 거였는데, 자이든은 정말로 볼을 붉혔다.

‘…이 미친 XX.’

좋아, 이걸로 확실해졌다. 자이든 저 자식이 나한테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이유는 나를 만만하게 여기기 때문이며, 더해서 내가 자신의 앞에서 기가 죽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사루비아의 얼굴이 자기 취향이기 때문이겠지. 저 미친 XX.

물론 객관적으로 사루비아는 사랑스러운 얼굴이지만, 꼭 저 XX는 좋아하는 여자애를 놀리는 초등학생과 수준이 다를 바 없었다.

“XX, 정확히 네가 원하는 반대로 해 주겠다….”

기가 죽는 건 내가 아니라 자이든이 될 것이다.

자이든이 가지고 있는 가그네라는 뒷배와. 가그네가 가지고 있는 파워. 그것들을 차례차례 무너뜨릴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역시 윈터 기수의 도움이겠지.

‘유리는 자신의 동기들이 행동하는 걸 구박하면서도 따라가는 타입이니….’

일단 당분간은 지금처럼 윈터나 알타이르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 * *

“사루비아, 알파벳.”

그 말에 나는 방금 내가 적은 철자를 다시 확인했다.

…알파벳 하나를 뒤집어서 S라고 썼던 흔적이 보였다. 이건 아무리 많이 써도 헷갈린다. S를 뒤집어쓴 모양은 영 손에 익지가 않는다.

“그럼 오늘 수업은 이만 마치겠다. 몇 번이나 말한 그것만 고친다면, 더 연습할 건 없겠군.”

그 말에 내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윈터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이제 수업은 끝입니까?”

윈터가 청회색 눈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내 실언이었군….

“…역시 저는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눈을 살짝 굴린 내가 앞으로도 수업을 열심히 받겠다고 하며 미소 지어 보이자, 윈터가 꾹 닫고 있었던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너에게 신기한 점이 있었는데….”

“예?”

“혹시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과 알고 지낸 적이 있나?”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멍한 얼굴로 윈터의 말을 부정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거야 원작 남주2, 윈터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이 세계에 또 있을 리가 없었다.

윈터는 꼭 조각한 것처럼 완벽해 보이는 이목구비에 깊은 청회색 눈, 완벽한 대칭형의 얼굴과 더 말할 것도 없이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몸이 정말 완벽했다. 그와 필적하는 외형의 소유자는 다른 세 명의 남주들뿐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단순히 네 성격이 겁 없는 게 확실하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윈터는 이전부터 내게 ‘당돌하다’거나 ‘겁 없다’와 같은 소리를 자주 해 댔는데, 아무래도 지금 하고 있는 얘기가 바로 그 말들과 관련된 것이 틀림없다.

“너는 날 전혀 어렵게 여기지 않지.”

“예?”

“보통은 나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

‘아.’

나는 그의 눈에 내가 이상해 보이는 이유를 깨달았다.

보통 후임들은 윈터 앞에서는 아주 빳빳하게 긴장했고, 감히 그에게 말을 걸지도 못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보는 것조차 어려워할 정도였다.

아마 그 이유는….

옥에 티도 없이 완벽한 얼굴 때문이려나? 아니면 수많은 마물들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오싹한 청회색 눈?

아,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태연함을 유지하는 딱딱한 표정 때문일 수도 있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무감각한 폭군 같은 살벌한 분위기?

이 중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다 문제인 것 같긴 하지만….

나도 윈터를 어렵게 여기기는 했다. 그거야 윈터는 쿨하고 민트하고 아이시했으니까.

하지만 윈터가 무섭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윈터는 앞서 나열한 대로 사람이 겁먹을 만한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로판 표지에서 많이 본 얼굴인걸.’

로판을 하도 많이 본 탓에, 내게 있어 윈터는 그저 평범한 로판 남주의 얼굴이었던 것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북부 대공의 정석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솔직히 좀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여서, 나는 윈터가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끔 윈터가 가오 없이 행동할 때는 그에게 실망할 지경이었지.

‘그렇게 보면 내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네.’

윈터와 알타이르가 나보고 당돌하다고 말한 것도 이해가 갔다.

“윈터 님이 두렵게 생긴 건…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애초에 사람을 보고 두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음….”

물론 누가 보더라도 깡패 엑스트라처럼 생긴 사람들이 열 명쯤 있는 골목에 갇힌다면 나라도 두려움을 느낄 테지만, 나는 이 세계에서 아직까지 그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으니까.

사실 이 세계는 가상의 세계라 그런지 사람들이 모두 미적으로 휼륭하기 때문에 내 눈이 즐거운 감이 있다, 음.

“사람의 생김새가 아무리 무섭게 생겨 봤자, 그런 것보다 훨씬 무서워해야 할 것들이 세상에 수없이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마물이라든가, 에이프릴이라든가, 우리를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천천히 끌고 가는 아포칼립스 세계라든가.

내 대답을 듣고 윈터는 납득한 얼굴을 했다. 외모로 사람을 무서워해 봤자 그런 것보다 더 무서운 것들은 따로 있다는 내 말을 납득한 것 같았다.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군. 외형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잘못된 일이지.”

“예….”

“이전에 열두 번 말했듯이, 목소리에 좀 더 힘을 넣어서 대답하는 편이 좋다.”

정말 사람 빡치게 하는군.

“윈터 님은 정말 무슨 상황에서든 원칙을 지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순전히 글만을 배우기 위해 윈터와 시간을 보냈던 것이 아니다. 그래, 이제 윈터의 속내를 떠볼 시간이었다.

“원칙을 따르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그런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정말로 없으십니까? …그럼 윈터 님의 원칙 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들은 어떤 겁니까?”

내가 ‘원칙’에 대해 물었기 때문인지 윈터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윤리가 가장 중요하겠지. 그다음으로는 아돌브 제국의 법이 있고, 그 아래로 국경방위군의 군법이 있다. 그리고 명문화되어있지는 않지만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 규칙들이 있지.”

“아돌브 제국의 법은 왜 지키시는 겁니까?”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국가니까.”

“윈터 님은 정말 아돌브 제국에 충성을 다하실 수 있는 겁니까? 아르콘인데 그게 가능하십니까…?”

“내가 이종족이긴 하더라도, 나는 이 제국에서 태어났고,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있다. 내게는 그저 그게 당연한 일일 뿐이야.”

지금 보니 윈터는 ‘아르콘’이 아니라 ‘이종족’이라고 하고 있었다.

‘아르콘은 국가 차원에서 금지한 단어니까 그런 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아돌브 제국에 대한 윈터의 충성심이 아니라.

“윈터 님은 정말로 그 원칙들에 모두 동의하실 수 있는 겁니까?”

나는 윈터의 청회색 눈을 마주했다.

“예를 들어, 선임과 갈등이 생겼을 때 무조건적으로 선임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군대의 원칙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지켜야지.”

그렇게 답했지만, 그 순간 윈터의 눈은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꼭 선임의 거슬리는 행동을 몇 번이고 인내한 적이 있는 것처럼.

덕분에 나는 깨달았다.

내가 만약 가그네의 권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제공한다면, 그 기회는 절대로 헛되이 날아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 * *

내가 목표로 하던 사람들을 X되게 할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정확히는 자이든을 X되게 만들 기회 말이다.

“XX, 어떤 XX가 철조망을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거야?”

국경 보수 작업을 하며, 엉망으로 찌그러진 한쪽 철조망을 발견한 내가 중얼거렸다.

이건 틀림없이 국경 너머에서 마물이 넘어온 흔적이었다. 조만간 또 토벌을 나가게 생겼군.

국경 보수는 중대 본부 건물 보수에는 비견될 수 없는 크고 중요한 작업이었다. 마물이 넘어오는 것을 막으려면 국경에 설치한 철조망이 튼튼해야 했다.

그리하여 이번 보수에는 훈련병뿐만 아니라 일등병들도 모두 참여한 상태였다. 그 누구도 빠지지 않고 중대의 모든 훈련병과 일등병이 참여한 것이다. 대신 일등병들이 해야 했을 경계 근무는 상등병들로 대체되었다.

“자, 일등병들은 후임들에게 잘 알려 주면서 하도록.”

행정보급관의 말에 우리 소대의 블레어와 토피오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역시 인성이 파탄 났군.’

참고로 나는 78기의 윈터, 알타이르, 유리를 통틀어 쿨민트아이스 3인방이라고 바꿔 부르기로 했다. 이전에는 쿨민트 3인방이었는데, 요즘 보면 볼수록 쿨민트라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들의 호칭은 내가 심심할 때마다 더 길어질 예정이다.

어쨌든 내가 그들을 쿨민트아이스 78기라고 하듯이, 내게는 85기의 일등병 블레어와 토피오를 부르는 명칭도 따로 있었다.

‘인성 파탄 85기.’

그들은 언제나 입에 욕을 달고 살며 후임들을 은근슬쩍 갈궜고 늘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었는데, 인성이 정말 총체적 난국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깐, 지금이 기회인가?’

문득 기막힌 아이디어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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