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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37화 (39/233)

분명 이번에는 건드린 게 전혀 없는데? 윈터의 능력치에 대해 객관적인 수준에서 평가한 거고, 내게 윈터가 필요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너 왜 기분 안 좋아…?”

“아니, 기분 괜찮은데.”

“무슨 소리야…? 내가 네 표정도 못 읽을 줄 알아…? 기분 완전 안 좋아 보이는데…?”

“하….”

이번에는 아퀼라가 아까보다 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 머리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루비아.”

“헉!”

놀라 뒤돌아보니, 그곳에 서 있는 건 이시나였다.

“이시나 님?”

“난 왜 이럴 때만 너희 근처를 지나가는 걸까…?”

“예? 이럴 때가 무슨 뜻입니까?”

“너 일부러 조련하는 거니?”

“잘 못 들었습니다…?”

“아니, 됐다….”

이시나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짓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여전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아퀼라 앞에서 난 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시 나도 모르는 트라우마가 또 있었던 건가? 어렵네….

* * *

어쨌든 윈터의 수업은 계속 이어졌다.

매일 낮 두 시간, 그는 나를 붙잡고 글공부를 시켰고, 나는 매일 한 시간의 자유 시간을 잃었고 대신 한 시간의 작업 시간에서 빠졌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아니, 여기서 좋아하면 그냥 조삼모사 속 원숭이랑 다를 바가 없는 거 아닌가?

“사루비아, 집중하도록. 오늘 벌써 네 번째로 집중력을 잃었다.”

“예….”

난 얼른 눈의 초점을 되찾고 그가 내 앞에 적어 보인 철자를 노려보았다.

“너는 자꾸 이 알파벳을 뒤집어쓰는 습관이 있어. 벌써 스물여덟 번째다. 대체 왜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알 수 없는 일이라니, 아니, 생각해 보면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역시 미친 통제광 정보수집 슈퍼컴퓨터 완벽주의자 윈터, 자신이 알 수 없는 일을 견뎌 내지 못하는군….

“음…. 저는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이 알파벳을 뒤집어쓰게 되는 이유가 뭔지….”

그리고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돌브 제국어의 알파벳에서는 영어의 S를 뒤집어쓴 것이 있는데, 당연히 나는 늘 그것을 S로 적었다. 나에게 익숙한 건 그 모양이었으므로.

“보통 어린애들은 이 철자를 뒤집어쓰고는 하지만, 넌 어린애가 아닌데. 심지어 블레어와 토피오도 이 철자는 뒤집어쓰지 않았다.”

‘어떻게 블레어와 토피오랑 비교할 수가….’

내 모든 자존심이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차마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나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윈터를 보았다가, 내 표정을 자각하고는 얼른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선임을 대할 때의 기본 표정이었다.

그러나 윈터는 아까 전 내 표정을 지적하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정말 겁이 없군.”

“예?”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내가 되물었다. 뭐지? 지금 무슨 의도로 내가 겁이 없다고 말한 거지?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수업이 끝날 시간이 됐는지 알타이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끝났냐?”

알타이르는 늘 윈터와 붙어 다녔기 때문에, 최근 윈터가 나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나와 자주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알타이르에게 가그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 두는 데에도 도움이 됐는데…. 일단 이 일의 효과는 다음에 확인하도록 하자.

“알타이르.”

윈터가 진지한 눈빛으로 알타이르를 보며 말했다.

“이전에 말했듯이, 정말 당돌해.”

“이야, 역시~ 사루비아, 아마 네가 알파 소대원들 중 가장 겁 없을 거다.”

윈터와 알타이르의 연이은 말을 들으며, 나는 좀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두 사람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저 말을 보자니 이전에 나에 관한 대화가 오갔던 건 분명한데, 그게 과연 긍정적인 뉘앙스였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슬쩍 알타이르에게 눈짓을 보냈다.

“무슨 얘기를 하신 겁니까?”

“글쎄?”

평소라면 어딜 선임에게 먼저 질문을 하냐며 꼰대처럼 굴었을 알타이르, 내 머릿속에서 이르기를 ‘꼰타이르’였지만, 지금의 알타이르는 오히려 재미있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나중에 윈터가 말해 줄지도 모르지?”

알타이르는 내 질문을 가볍게 넘겨 버렸고, 내가 그에게 시선을 돌린 틈을 타 윈터는 다시 나를 쪼아 댔다.

“사루비아, 아직 7분이 남았으니 다시 집중하는 게 좋겠다.”

“예….”

“목소리에는 좀 더 힘을 넣어서 대답하도록. 그리고 표정 관리에 더욱 신경 쓰도록 해라. 마지막으로….”

정말 괴로웠다. 저 잔소리가 모두 맞는 말이라서 더 괴로웠다….

“윈터 님은 정말 부대 내의 모든 일을 혼자서 통제하시는 것 같습니다…. 78기 분들만 존재하셔도 부대는 잘 굴러갈 게 분명합니다.”

“사루비아, 네 머릿속의 생각을 그렇게 입 밖으로 내는 행위도 자제하도록 해라.”

…인내하자, 인내해.

‘가그네 타파’와 ‘자이든 타파’를 연이어 떠올리며, 나는 윈터의 잔소리를 꾹 참았다….

* * *

나는 지금 중대 보수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XX, 졸려 뒤지겠네.”

삽질을 하며 내가 중얼거렸다.

참, 여기서 말한 ‘삽질’은 남주와 여주가 서로 좋아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로판 용어의 ‘삽질’이 아니라, 사전적 정의의 ‘삽질’을 뜻한다.

‘XX, 적어도 로판 삽질은 육체적으로 이렇게 고생하지는 않던데.’

입대한 뒤로 나날이 발전하는 내 삽질 실력으로 흙을 퍼내며, 내가 다시 한번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흐아암….”

“졸리십니까?”

어느새 내 옆에 달라붙은 카론이 물었다.

“뭐, 언제나 그렇지….”

나는 그렇게 답하며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이 공사를 감독하는 선임이 가그네와 그의 동기 자라였기 때문에, 자이든은 그들의 곁에서 설렁설렁 삽질을 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자이든은 삐딱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저게 진짜….’

마음 같아서는 폭력과 공포로 모두를 구원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나는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꾹꾹 참았다. 그래…. 그는 가그네의 비호를 받고 있고 나는 큰 그림을 그려야 했다.

‘저 XX는 왜 나중에 X될 걸 알면서도 저렇게 막 나가는 거지?’

입대하기 전에 내가 그에게 원한을 산 일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니, 쟤는 후환이 오리라는 걸 생각도 못 하는 건가?

분노를 참은 채 그에게 경멸의 눈빛만 보낸 후 심호흡을 하던 나는,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

‘잠깐, 경멸의 눈빛…?’

생각해 보니까 나한테 저딴 식으로 군다면 자신에게 불이익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러는 이유라면….

‘혹시 경멸받는 걸 즐기나?’

내가 지금까지 그를 경멸의 눈빛으로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설마 내가 자이든에게 좋은 일만 해 준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내가 그를 꺾어 놓으려고 들수록 그는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그건 정말 곤란한 취향인데. 그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내 대처 방안을 좀 바꿔야 한다.

나는 해답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자이든의 동기 밀피가 낑낑거리며 일하는 것을 발견했다.

‘쟤는 알고 있으려나?’

자이든의 동기 네 명 중 세 명이 벌써 죽었기 때문에, 밀피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자이든의 동기였다.

밀피는 밀빛 머리카락에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는 유약한 인상의 후임이었다. 그러나 민첩성이 좋고 선임들의 지시를 빠르게 따랐기 때문에 마물과의 전투에서 잘 살아남고 있었다.

삐딱한 성격의 자이든과 달리, 밀피는 오히려 눈치를 심하게 보며 늘 긴장해 있는 상태였고, 가끔은 자이든의 대범한 행동을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밀피.”

“예, 예?!”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밀피가 긴장한 태도로 이쪽으로 뛰어왔다.

“내가 지금 너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밀피는 내가 자이든과 묘한 기 싸움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자이든의 동기인 자신에게 화풀이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겁먹은 기색이었다.

“입단속 잘하고, 내가 묻는 말에 아는 대로 솔직하게 답변해 봐.”

“아, 알겠습니다.”

“그래, 혹시….”

나는 밀피 쪽으로 몸을 기울인 뒤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자이든 쟤 혹시 이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니?”

“…예?”

“혹시 선임에게 경멸받는 걸 즐기는 타입은 아니겠지?”

“예, 예?”

그 말에 밀피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다가, 내가 그렇게 질문한 이유를 깨달았는지 입을 벌렸다.

“어…. 제가 알기로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그래? 확실하지?”

“예, 자이든은 굉장히 평범한 취향으로… 남이 자신을 싫어하는 걸 즐기는 타입은 아닙니다.”

“좋아, 그렇군. 그럼 이제 가서 일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나는 저 멀리서 일하고 있는 블레어와 토피오 쪽으로 고갯짓을 하며 속삭였다.

“참고로 저분들 눈에는 띄지 마…. 저분들은 작업할 때면 주위 후임들에게 욕을 하는 습관이 있으니까. 네가 반응하거나 말거나 계속 욕을 할 거야.”

“아, 알겠습니다!”

조언을 마친 나는 밀피에게 마저 가서 작업하라며 손짓했고, 밀피는 내 말을 귀담아들은 듯 블레어와 토피오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작업을 이어 나갔다. 음, 저들의 인성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

‘오늘도 후임 하나를 인성 파탄 85기로부터 구해 냈다.’

모처럼 후임을 챙겨 주고 뿌듯해하는 그때, 뒤에서 카론의 낑낑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루비아 님….”

“왜?”

삽을 양손으로 꽉 쥔 채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던 카론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삽질을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렸습니다.”

“…아니, 왜 거짓말이야?”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는 멀쩡하게 삽질을 했다. 내가 잠깐 밀피와 대화를 나누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일단 일어나 봐.”

“저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갑자기 얘는 왜 이러는 거지?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이없다는 목소리를 하면서도 바닥에 앉아 있는 카론에게 양손을 뻗었다. 하지만 힘을 주어 카론의 손을 잡아당겨 봐도 그를 일으켜 세우기는 무리였다. 당연하지. 체급 차이가 이렇게 큰데.

“야, 안 되겠는데…?”

그렇지만 카론이 초롱거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기 때문에, 나는 결국 다시 힘을 주어 그를 잡아당기려 하다가.

“어우!”

“사루비아, 조심.”

힘을 잃고 뒤로 넘어갈 뻔한 나를 아퀼라가 뒤에서 받쳐 주었다. 그의 높은 체온이 곧장 내 온몸에 퍼졌다.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뜨거워?”

“원래 이랬는데.”

아퀼라가 내 허리에 자신의 손을 감아 일으켜 세우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카론을 가리키며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나저나 얘 지금 괜히 어리광 부리는 거야. 받아 주지 마. 버릇 나빠져.”

“뭐?”

“네가 요즘 관심 안 줬다고 자기한테 관심 달라고 그러는 거라니까.”

아니, 무슨 개도 아니고 그럴 리가….

“사루비아 님, 하지만….”

‘정말이었어…?’

카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맞후임은 저면서, 왜 요즘 자꾸 다른 애들한테 신경 쓰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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