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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36화 (38/233)

“으음, 네….”

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그렇게 뛰어난 편도 아닌데 그 까다로운 윈터에게 칭찬을 받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전에 마물 지식도 빠르게 습득했던 걸 보면, 암기 자체가 빠른 것도 같고.”

“아하, 네….”

물론 그것도 원작을 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심이 찔려 온다.

내가 그의 칭찬에 어색해하거나 말거나, 윈터는 오히려 똑똑해 보이는 후임을 만난 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잘하면 군법까지도 전부 외울 수 있겠군.”

“…예?”

“최근에는 이시나를 제외하고는 현명하게 행동하는 후임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오랜만에 가르칠 만한 후임이 나타난 것 같아.”

큰일이다.

군대에서는 중간만 가라는데, 나는 윈터의 앞에서 너무 열심히 나대 버렸다.

‘교, 교수님?’

마치 대학원에 학생을 끌고 가려는 교수처럼 눈을 빛내는 윈터를 보며 내 낯빛이 하얗게 질려갈 때, 큰 소리와 함께 우리가 있던 상담실의 문이 열렸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중대 본부, 중대장이 부대원들과 면담할 때 쓰는 상담실이었는데, 어차피 중대장은 이 상담실을 잘 쓰는 일이 없으므로 그는 흔쾌히 방을 내주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윈터가 워낙 엘리트로 소문났기 때문에 이전부터 중대 본부의 각종 잡일을 해서 중대장이 좋게 봐준 것이라는데, 역시 나는 일을 하고 누가 나를 좋게 봐주는 것보다 일을 안 하고 베짱이 취급받는 게 나을 것 같다.

어쨌든 상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알타이르였다.

‘나이스 타이밍.’

조금만 더 있었다면 윈터의 손에 이끌려 장교 과정 신청을 하거나 제대 후 대학 진학에 관한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타이르는 특유의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쳐다보더니, 어쩐지 신난 목소리로 물었다.

“오, 좋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나 보네. 기특한 자식, 열정이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부대가 이미 산 위에 있는 건 정말 다행이다. 만일 우리 부대가 산 아래에 있었다면, 알타이르는 매일 “열정! 열정! 열정!”을 외치며 등산 훈련을 하자고 했을 것이다.

“알타이르. 무슨 일이지?”

“에이, 꼭 무슨 일이 있어야 보러 와? 나도 후임이 잘하고 있는지 관심 정도야 가질 수 있는 거지.”

윈터의 냉담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받아친 알타이르가 날 돌아보며 물었다.

“아, 블레어랑 토피오도 예전에 윈터에게 붙잡혀 글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어때, 윈터? 사루비아는 좀 잘하고 있냐?”

“사루비아는 언어적인 감각이 있어. 그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

그 인성 터진 85기도 나처럼 윈터에게 글을 배웠다고? 왜 이렇게 요즘 그 사람들과 내 공통점이 발견되는 기분이지?

‘아냐, 적어도 난 85기처럼 인성에 문제가 있지는 않잖아….’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알타이르의 말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분명 나는 입대한 뒤로 블레어와 토피오가 윈터에게 글을 배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내가 입대하기 전에 글을 배웠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내가 입대하기 전이라면 윈터는 일등병이었을 것이다. 고참들이 고작 일등병이 다른 훈련병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해줬단 말인가?

“그럼 윈터 님은 일등병이셨을 때도 블레어와 토피오 님께 글을 가르쳐 주셨던 겁니까?”

내가 궁금한 것을 바로 입 밖으로 꺼내자, 알타이르가 옛날을 회상하는 눈빛을 하며 말했다.

“그래, 그건 원래 상등병들이 해야 하는 게 맞는데, 윈터는 워낙 완벽하니까~ 당시 고참들이 윈터한테 시켰었지.”

‘한마디로 윈터한테 짬 처리를 했다는 거군.’

알타이르의 말속에서 진실을 찾아낸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리고 아마 윈터도 블레어와 토피오를 가르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미친 원칙주의자에 완벽주의자이니까.

윈터는 일등병 시절에 늘 쿨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그는 정석적인 ‘일등병의 할 일’만 했다.

예를 들어, 인성 파탄 85기가 선임들에게 털리며 머리를 박고 있을 때, 청소를 하던 윈터는 태연하게 그들의 몸 아래까지 빗자루로 깔끔하게 쓸어냈고.

에이프릴이 다른 상등병의 머리채를 잡고 있을 때는, 다른 후임들처럼 ‘큰일이다. 곧 우리도 털리겠군.’이라며 걱정하는 대신 묵묵히 한 포기의 잡초를 더 뽑았다.

하지만 상등병이 된 후 윈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원칙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이제 상등병의 일인 ‘후임 관리’를 시작했기에 원칙주의자 성향에 이어 통제광 성향까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전에 일등병일 때 나에게 총기 사용을 권유했을 때도 그가 억누르고 있었던 통제광 성향이 일시적으로 튀어나온 것이 틀림없다.

그 증거로, 그가 상등병이 된 이후로 후임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을 듣고 살아야 했으니까….

“이봐, 허리를 10도 세우도록.”

“그 체조를 할 때는 오른쪽 발을 앞으로 8cm 더 내밀어야 한다.”

“복도의 다섯 번째 창문 우측 하단에 먼지가 붙어 있군.”

심지어 그가 하는 말이 모두 옳은 말이라, 후임들은 불만을 품지도 못하고 그의 말에 따라 시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윈터의 후임들은 늘 고통받고 있었다.

지난날 윈터에게 지적당한 횟수를 떠올리자면 나도 좀 눈물이 나오려 하는군.

“사루비아. 오늘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남은 건 내일 마저 하고, 글자는 좀 더 연습해 오면 좋겠군.”

“예, 그런데 이제 앞으로 저 혼자 공부할 수 있을 것 같….”

“아니.”

갑자기 윈터가 엄청나게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기세에 놀란 내가 몸을 흠칫했지만, 윈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냉철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드문 기회야. 놓칠 수 없지.”

“…예?”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내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묻자, 가뜩이나 진지한 얼굴이었던 윈터의 얼굴이 더 진지해졌다.

“넌 충분히 재능이 있어. 네 안의 재능을 개화시킬 수 있는 기회다.”

“예?”

미친 교수에 빙의한 윈터가 나를 도대체 어디까지 끌고 가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짬 낮은 나는 물기 어린 눈으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렇게 된 김에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윈터는 무려 일등병 때부터 블레어와 토피오를 가르칠 권한을 위임받은 남자이다.

그때부터 남을 가르칠 수 있었다니, 정말….

‘이 남자의 권력, 가지고 싶다…!’

최대한 이 학습 시간을 잘 이용해서 윈터와 친해지고, 윈터의 라인을 타는 거다!

윈터는 지금 이 부대의 실세고, 내가 상등병이 되는 그때까지! 원작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이 부대의 실세일 거니까!

“역시 윈터 님, 일등병 때부터 돋보이는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선임 분들이 후임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해 주신 거 아닙니까.”

내가 권력에 대한 욕망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윈터에게 아부하자, 윈터가 묘한 표정으로 알타이르에게 눈짓했다.

알타이르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곤 나가 버렸지만, 그들의 미지근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나의 타오르는 권력욕은 꺼지지 않았다.

* * *

“사루비아.”

“으응?”

소대로 돌아갔을 때, 나를 반기는 건 아퀼라였다. 조금 지친 표정으로 돌아온 나를 흘끗 쳐다본 아퀼라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힘들진 않고?”

“어, 글 배우는 거? 그건 전혀 안 힘들지.”

아퀼라의 얼굴을 보자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아져서, 나는 쫑알거리며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알파벳을 ‘르’라고 읽는 건 너무 이상한 것 같아. 나는 ‘프’라고 읽고 싶거든. 그리고 나는 ‘브’라고 읽는 알파벳의 대문자와 소문자도 적응이 안 돼. 둘이 뒤바뀌어 있어야 할 것 같아.”

내가 이전에 배웠던 영어 알파벳을 떠올리며 아돌브 제국어의 알파벳에 대해 불평을 토로하자, 아퀼라는 내가 말을 마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어쨌든 오늘은 그랬어.”

“배우는 거 자체가 힘들지는 않나 보네.”

“응, 오히려 그건 좋아.”

비록 이 국경방위군 내에서는 쓸 곳이 없더라도, 언젠가 제대를 하고 나면 나도 글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윈터에게 꼼꼼히 배울 수 있는 건 잘된 일이었다.

“그리고 윈터 님도 잘 가르쳐 주셔.”

그 말에 아퀼라가 주홍빛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내가 조금 잘못 말했음을 깨달았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실수했다.’

내가 보기에 이건 동기들이 죽은 그 사건 이후 아퀼라에게 생긴 트라우마 때문이다. 아퀼라는 내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데에서 동기가 살아 있음을 확인받으려고 했으니까.

그 말인즉슨, 아퀼라는 내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지극히 예민해진다는 뜻이다.

내 입에서 자동으로 칭찬이 튀어나왔다.

“그거야 당연하지. 왜냐하면 너는 윈터 님보다 나를 훨씬 더 잘 알잖아, 안 그래?”

“그렇지.”

“나도 윈터 님보다 네가 훨씬 좋지. 그렇지만 지금 상황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난 그냥 시키니깐 하는 거고, 실제로 나한테 필요한 사람은 너야.”

다행히 그 말에 아퀼라의 표정은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아퀼라의 눈은 아까와 다를 바 없이 보였지만, 나는 그 속에서 아까보다 기분이 나아졌음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친해지고 보면 얘 표정 읽기 진짜 쉽다니까.’

예전에는 왜 그렇게 무표정하다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잘 보면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걸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윈터 님이 불편하게 하진 않지?”

아퀼라가 다시 조용히 물었다. 그가 날 가르친다는 핑계로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는지 걱정인 모양이었다.

“응. 후임들을 통제하는 데에는 도가 트셨으니까, 정신 차려 보면 윈터 님이 가르치신 걸 모두 이해하고 있더라.”

자꾸 나를 학문의 세계로 가도록 만들려는 것 같지만…. 나는 뒷말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확실히 뭐든지 엘리트 같고 모범적이라는 느낌이랄까. 한 분야에서만 모범적인 게 아니라 모든 게 모범적이라는 게 참 신기한 것 같아. 예를 들면 얼굴이라든가.”

“…뭐가 모범적이라고?”

“얼굴…?”

“하….”

한숨을 푹 내쉬는 아퀼라의 눈빛은 다시 사나워져 있었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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