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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35화 (37/233)

“무슨 얘기 나누고 계셨습니까?”

“응, 별 얘기 아니야. 그저 올바른 전술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

…내가 정확히 듣지는 못했어도 분명히 그런 얘기가 아니었다는 건 잘 알겠다.

“아퀼라가 뭐 잘못했습니까?”

나는 다시 한번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이시나의 태연한 대답뿐이었다.

“응?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별것 아니었어.”

아퀼라까지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는 태도로 말했기에, 결국 나는 이시나에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며 입을 닫았다. 나중에 아퀼라와 둘이 있을 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캐내 봐야겠다.

“그래서 사루비아, 너는 어쩐 일이야?”

“아. 별건 아니고, 그냥 빨래가 지긋지긋해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애들한테 미루고 나왔니?”

“10분이면 끝날 양이었습니다.”

“그래….”

이시나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내 뒤에 밝은 표정으로 서 있는 카론을 보며 중얼거렸다.

“애한테 참 나쁜 거 가르친다…. 아니, 내가 보기에는 쟤도 원래부터 문제가…. 하아….”

‘요즘 이시나는 혼잣말이 늘었군.’

소설 등장인물에 참 적합한 특성 같다. 혼잣말이 많으면 독자 입장에서는 편하지.

어쨌든 그와 아퀼라의 용건은 이제 끝난 것으로 보였기에, 나는 아퀼라와 평소 같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 맞다, 아퀼라. 무기고 열쇠 누구한테 있더라?”

“이번 주는 자라 님.”

“맞다, 그랬지.”

아퀼라가 내 두 손을 자신의 한 손으로 감싸 쥐며 답해 주었다. 찬물 때문에 꽁꽁 얼어 있었던 손에 금세 온기가 감돌았다.

…그와 함께 내 손에서 치약 냄새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땀이 아무리 많이 나도 냄새가 안 나는 게 로판 버프 때문이 아니라, 그냥 치약 냄새가 너무 강해서 그런 게 아닐까?’

이미 우리가 입는 옷에 치약 냄새가 배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맞을지도….

‘남주라면 상쾌한 민트 향이나 숲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우드 향 같은 게 나야 할 텐데….’

하긴 치약도 민트 향이긴 하지.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쿨민트의 대명사 윈터를 떠올렸다.

“윈터 님.”

그때 이시나가 내 뒤를 향해 인사를 건네기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윈터가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퀼라가 자연스럽게 날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고, 우리도 윈터에게 묵례했다.

“이봐, 너희.”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등장한 윈터가 그의 등장만큼이나 갑작스러운 말을 꺼냈다.

“혹시 군법 제15장 93조에 대해 알고 있나?”

우리는 모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도대체 어떤 인간이 그런 걸 외우고 다닌단 말인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한다는 눈빛을 보내자, 윈터가 카론에게 손짓했다.

“카론, 가서 부대 숙소 내에 있는 군법 책을 가져오도록.”

“아, 알겠습니다!”

윈터의 말에 대답한 카론이 빠르게 사라졌다.

군법 책, 그건 말 그대로 국경방위군의 군법을 모두 정리해 놓은 두꺼운 백과사전 같은 책으로 중대 자료실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읽지는 않았다. 군대에서 뭘 하면 안 되는지는 당연히 몸으로 배워 가는 거지, 누가 그 두꺼운 책을 읽겠는가?

거기다가 이 부대에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인간 따위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부대원들은 모두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가끔 책을 읽는 부대원들도 군법 책 옆에 꽂혀 있는 마물 도감 따위의 실용서를 읽었지.

이전에 에이프릴이 대단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군법 책을 읽고 있길래 정말 미쳤구나 싶었는데, 그녀가 다른 부대로 발령받은 이후부터는 군법 책의 표지를 볼 일도 없었다.

곧 카론이 굉장히 두꺼운 초록색 책 하나를 들고 달려왔다.

“여기 있습니다!”

“사루비아, 받도록.”

나는 윈터가 뭘 하려는지 알지 못한 채, 카론으로부터 두꺼운 군법 책을 받아들었다.

“194쪽을 펼쳐라.”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따라 194쪽을 찾아 펼쳤다. 조그만 글씨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어서, 저절로 눈이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93조를 소리 내어 읽어 보도록.”

“아….”

나는 윈터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우물거렸다. 그의 명령은 따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저 글 못 읽습니다.”

내가 빙의한 사루비아는 원래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차마 보육원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에서 자란 그녀에게 글을 배울 기회가 있었을 리 만무했다.

“…뭐?”

그 말에 윈터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이시나도 당황한 듯한 얼굴을 했다.

‘아니, 글 좀 몰라도 살 만하던데….’

왠지 무식한 사람이 된 기분에 내가 고개를 숙였다. 글 같은 건 몰라도 난 이곳에서 거의 일 년 반 가량을 잘 보내왔다.

‘이 세계에서는 머리를 쓸 필요가 없잖아.’

만약 나에게 원작 ‘네미집’에 대해 후기를 남기라고 한다면, 여주가 얼마나 고문관인지와 함께 반드시 이 말을 쓸 것이다.

-여주가 똑똑한가요? 아니오. 남주가 똑똑한가요? 아니오. 악역이 똑똑한가요? 아니오. 이 소설에서는 똑똑함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 이 세계의 정답은 오로지 ‘폭력과 공포’뿐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전에 마물의 정보를 외우는 건 어떻게 했던 거지?”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은 윈터가 물었다.

“다른 동기들이 소리 내서 읽는 거 듣고 외웠습니다.”

“…그래, 잘 알겠다. 그럼 내가 대신 읽어 주지.”

윈터는 나에 대해 뭐라 더 묻지 않고, 책을 보지도 않은 채 군법 제15장 93조를 읊기 시작했다.

“하나, 군 내 교제가 이루어지는 경우 그 대상자들은 서로 다른 부대로 전출된다. 둘, 지휘 관계에 있는 자들의 교제 시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셋, 군 내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를 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그러니깐 국경방위군 내에서 사귀면 전출 가거나 영창 간다는 거 아냐?’

“혹시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괜히 오해받으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릴 수 있다.”

윈터가 아까 전 아퀼라와 내가 잡고 있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

그렇게 대답하며 슬쩍 본 아퀼라의 얼굴도, 나랑 마찬가지로 황당무계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XX, 로판에 빙의했는데 감옥도 아니고 영창에 갈 위기가 존재하다니….’

차라리 역모죄로 몰린다든가, 아니면 여주인공을 살해 미수한 죄로 감옥에 갇힌 악녀에 빙의하는 편이 영창 가는 것보다 낫겠다.

이 세계에 ‘영창’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이 세계는 로판과 거리가 멂을 나타내 주는 증거 아닐까?

그리고 또 어이없는 건….

‘아니, 원작 여주 달린은 자유롭게 로맨스 찍었잖아?’

달린은 분명히 원작 남주들과 포옹했고, 팔짱도 꼈고, 공주님 안기까지 했다고!

윈터 저놈은 원작에서도 달린에게만 총이 위험하다고 경고해 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원작 여주와의 차별이 너무하다.

“윈터 님, 이 책을 다 외우신 겁니까…?”

아까부터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시나가 수백 페이지는 되어 보일 군법 책을 가리키며 묻자, 윈터가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이다. 군법을 지키려면, 일단 군법을 낱낱이 알고 있어야겠지.”

‘저게 인간이야, 안드로이드야?’

나는 그가 ‘194쪽의 군법 제15장 93조’를 통째로 외우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질린 표정을 했다.

“그러니 너희도 그 책을 잘 읽어 두도록.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다.”

‘윈터 쟤 내가 글 읽을 줄 모른다고 한 건 귓등으로 들었냐?’

그때, 윈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루비아, 당분간은 내가 글을 가르쳐 주겠다. 너도 글은 읽을 줄 알아야겠지.”

“…잘 못 들었습니다?”

선임과 쓸데없이 붙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 추가됐다고?

잠깐, 생각해 보자. 분명 누군가는 이것을 ‘로맨스 전개’가 아니냐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건 로맨스 전개보다는….

‘이거 군 내 부조리 아니냐?’

일 하나가 또 늘어났다. 개빡친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섰다. 윈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이시나가 입을 열었다.

“아퀼라,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네 행동에는 문제가 있다니까…. 봐 봐, 방금 윈터 님도 그러셨잖아.”

“…알겠는데 그건 나중에 둘이 있을 때 얘기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퀼라가 내 쪽을 눈짓하며 이시나에게 말했지만, 난 그들의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 물을 기력도 없었다.

‘왜 이 중에서 나만 글을 못 읽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빡친다. 윈터야 아르콘 부모 사이에서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엘리트라고 들었으니 당연하고….

내가 힘없이 아퀼라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왜 글 읽어…?”

“…읽지 말까?”

“아니, 어디서 배웠는데?”

“어릴 적 부모님한테서.”

…XX, 졸지에 시비 거는 애가 됐군.

“이시나 님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나야 부모님이 두 분 다 아르콘이셔서, 계속 교육받아 왔어.”

아하, 이시나는 윈터와 마찬가지로 엘리트 타입이었나 보다….

“…카론, 너는?”

화재 사고로 기억을 몽땅 잊어버렸으면서 글은 안 잊어버렸다니.

“으음,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아마 친부모님이 가르쳐 주셨을 겁니다.”

“친부모님?”

“네, 두 분 다 국경방위군 장교셨는데 사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XX, 이 중에서 어릴 때부터 보호자 아르콘 없이 완전히 혼자였던 건 나뿐이었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충동적으로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제대하면 나도 아르콘 가족을 만들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가족을 만들 거고, 그리고 반드시 같은 아르콘이랑 결혼할 거다. 진심이다.

* * *

“자, 이제 읽어 보도록.”

“…하나, 적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으며 전푸… 아니, 전투에서는….”

“조금 더 연습하면 훌륭할 것 같군.”

“예….”

윈터의 앞에 앉은 내가 지루한 얼굴로 대답했다. 공부는 결코 즐거울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이 세계의 문자를 익히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기는 했다. 난 이미 이 세계의 언어를 잘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그저 알파벳 한 자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만 외우면 그다음부터는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헷갈리는 부분도 많았고, 그동안 의식하지 않고 사용했던 언어의 문법을 익히는 건 좀 까다로웠지만.

‘그래도 영어랑 크게 구조가 다르지 않아서 다행이야.’

기본 알파벳의 모양도 영어와 비슷했기 때문에 외우기 쉬웠다.

뭐, 나로서는 내가 글자를 며칠 만에 쓸 수 있게 된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윈터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윈터는 나를 아예 문맹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이 속도면 나쁘지 않다. 언어적인 감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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