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제대 D-2403일.
연병장에서의 훈련, 평소처럼 총 대신 검을 잡은 나는 오러를 실은 검을 열심히 휘두르며 베기 동작을 반복했다. 주 무기가 총이라고는 해도 다른 무기를 연습해 두는 게 좋으니까, 이렇게 가끔씩 검술 훈련도 하고는 했다.
물론 오늘 내가 검을 잡은 목적은 따로 있지만.
“알타이르 님, 저 이 동작 좀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 그래, 사루비아. 오늘 웬일로 검 들었냐~?”
웃는 얼굴을 한 알타이르가 껄렁이는 발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가끔씩은 이렇게 검도 잡아 줘야 하니깐 말입니다. 아르콘한테 제일 잘 맞는 무기는 일단 검 아니겠습니까.”
“야, 그렇지~!”
“일단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 맞아…. 요즘 애들은 자꾸 검이 기본이라는 사실을 잊던데, 그래도 사루비아 넌 개념이 똑바로 박혀 있구나, 이 자식.”
기분이 좋은지 알타이르가 내 등을 팡팡 치며 웃었다. 나도 그를 보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웃음을 따라 지었다.
‘이제부터 전력으로 라인을 탄다.’
원작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윈터는 이 부대의 지휘사관이었다. 지휘사관은 출신 부대가 아닌 타 부대로 배정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윈터는 운 좋게도 이 부대에 다시 배정되었으니까.
A급 병사였던 훈련병과 일등병 시절을 겪고, 마찬가지로 엘리트인 사이좋은 동기들을 가진 윈터는 상등병이 된 지금 이 부대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파워’ 있는 선임이었단 말이다.
그건 그의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중요한 건 윈터가 이 부대에서 지휘사관까지 이어 갔다는 사실이다. 그때쯤 그가 이 부대에 미치는 파워는 절정을 찍는다.
‘그러니깐 윈터 라인을 타는 거야.’
그리고 윈터의 라인을 타기 위해서는. 접근하기 힘든 ‘쿨민트의 대명사’ 윈터보다는, 비교적 후임들에게는 서글서글한 알타이르와 친해지는 게 우선일 것이다.
알타이르는 꽤 알기 쉬운 인물이었다. 나는 그의 푸른 머리색과 눈 색 때문에 그의 동기들과 함께 ‘쿨민트 3인방’으로 묶어 부르고는 있었지만, 그는 털털함과 꼰대 같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나 할까.
선임들한테는 아부 잘하고 웃긴 말 잘하고, 후임들한테는 우스운 농담을 잘하고 털털하게 잘 지내다가도 조금만 거슬리면 “아, 이 XX들 빠져 가지고~.”를 시전하는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한마디로 자신이 트렌디하고 젊다고 생각하는 부장님 스타일이라는 거지.
‘내가 정치물을 찍게 될 줄 몰랐는데.’
나는 정치물 로판도 꽤 재미있게 봤었다.
황궁, 혹은 귀족 가문에서 목숨을 걸고 정치하는 여주. 여주에 의해 목이 베이는 숙적의 부하들! 여주와 숙적과의 아슬아슬한 두뇌 싸움! 그런 게 또 정치물의 묘미였다.
내가 로판에 빙의한 후 이런 방향으로 정치물을 찍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나도 이제부터 정치물을 찍게 될 것이다.
‘역시 정치질 중에서도 제일은, 군대 내 정치질이다.’
“후후후….”
내가 갑자기 불길하게 웃자, 알타이르가 몸을 움찔했다.
“야, 어디서 방금 에이프릴 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냐? 착각인가….”
나는 앞으로 내가 펼칠 정쟁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 * *
이 부대는 라인 간 갈등이 심하거나 정치질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편은 아니었다. 툭하면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그 시간에 자기 실력이나 더 쌓는 편이 나으니까.
하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파벌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단지 갈등이 심하지 않을 뿐, 라인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특히 상등병들 중 78기수의 윈터, 알타이르, 유리는, 77기의 가그네, 자라와 반목하는 사이였다.
그래, 자이든을 라인으로 태워 준 바로 그 가그네 말이다.
아마 78기수의 쿨민트 3인방이 너무 뛰어나서 계속 비교되어 왔다 보니, 77기도 맞후임들을 싫어하게 된 것이라고 나는 추측하고 있다.
‘지금 상등병들 중에는 윈터 쪽 라인이 제일 기수가 낮긴 하지만, 그래도 미래를 고려한다면 역시 윈터 쪽 라인을 타는 게 최고지.’
그리하여 나는 알타이르에게 붙잡힌 채 이딴 얘기나 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때 그 큰 바위를 혼자서 옮겼다는 거지~.”
“와,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 무거운 걸 어떻게 옮기셨습니까?”
“그때 내 손바닥이 보자기 모양이었거든.”
“하하하하!”
“코, 콜록콜록!”
내가 알타이르의 개그에 가식적으로 웃자, 생수통에 담긴 물을 입 안으로 털어 넣으며 우리 옆을 지나가던 유리가 격렬하게 물을 뿜었다.
“야,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유리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알타이르를 가리켰다. 알타이르가 껄렁한 태도로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여어, 왜?”
“사루비아, 많이 힘들었겠다….”
유리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따스한 눈빛을 하며 내 손을 감싸 주었다.
“네가 참 고생이 많았구나…. 내가 동기로서 미안하다.”
그렇게 말한 유리가 쓰레기를 보는 시선으로 알타이르를 보며 외쳤다.
“너는 왜 애를 괴롭히고 있냐?”
“괴롭히긴 뭐가? 방금 못 봤어? 잘 웃으면서 대화하고 있었잖아?”
“닥쳐! 후임들한테 부조리한 행동 하지 마!”
“아니, 이게 무슨 부조리….”
“네 개그가 부조리 그 자체야!”
유리가 알타이르를 질질 끌고 데려가며 나에게 미안함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아니, 타로 님이 자기 잘 때 조금이라도 시끄러운 소리 나면 짜증 내는 거나, 가그네 님이 애들한테 쌍욕 박는 게 부조리지, 이게 왜 부조리야!”
“네 개그가 그중에서도 제일 큰 부조리라고!”
나는 멀어지는 알타이르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여튼 멀쩡한 사람이 없어….”
검술 실력이 뛰어난 알타이르는 쾌활한 인상을 가진 미청년이었다.
반복된 훈련으로 많은 선임들이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것과 달리 그는 호리호리한 체형이었고, 푸른 머리카락에서는 윤기가 흘렀으며 푸른 눈은 속눈썹이 참 길었고 피부도 하얀 편이었다. 한마디로, 아이돌 상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는 상큼한 외모와 달리 이 부대에서 누구보다 더 꼰대스러운 발언을 해 댔으며 재미없는 개그의 1인자였다….
그래도 성격 자체는 괜찮아서 후임들이랑은 친하게 지내지만, 그가 후임들이 자신을 잘 따르는 이유는 자신이 유머러스하고 트렌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였다.
“아니야, 참을 수 있다…. 난 반드시 알타이르의 측근이 될 테니까….”
크으으…. 나는 저절로 나오는 침음을 꾹 삼키며 자리를 떠났다. 빨래가 가득 쌓여 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터벅터벅 걸어 빨래장에 도착하자, 카론이 눈을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알타이르 님.”
나는 대강 대답한 뒤 카론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유, 잘하고 있었네.”
옆에서 자이든을 포함한 신병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이걸로 자이든도 내가 선임들과 원만한 사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
바구니 안에 담겨 있는 흰색 와이셔츠 뭉텅이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어제 마물과의 전투에서 다들 한바탕 피를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XX, 대체 어떤 머리 빈 윗대가리 놈들이 흰 와이셔츠를 입힐 생각을 한 거야?”
나는 짜증을 내며 찬물에 담가 놓았던 와이셔츠 하나를 꺼낸 뒤 솔에 치약을 묻혔다.
이 X같은 생활 때문에 자주 잊고는 하는 사실인데, 원작의 ‘네미집’은 로판이었다. 그 뜻은 로판의 요소들이 내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도 적용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어 훈련을 하며 한참을 굴러도 고약한 땀 냄새가 나지 않는다든가, 훈련으로 땀에 젖어도 머리카락은 떡지지 않는다든가, 주변 인물들의 외모가 평균적으로 준수하다든가, 그런 것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의복이었는데….
‘누가 전투할 때 와이셔츠를 입냐고, XX.’
원작의 작가는 남주들의 가오를 고려했는지 빳빳한 남색 자켓과 바지 속에 흰 와이셔츠를 입혔다.
다시 한번 말한다. 흰색 와이셔츠다.
작가가 오로지 남주들의 멋만을 고려한 결과, 우리는 매 전투가 끝날 때마다 피 묻은 와이셔츠를 말끔히 세탁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했던 것이다.
‘겉으로만 가오를 챙겨 주면 뭐하냐고, XX. 그래 봤자 하는 행동에서 가오가 부족한데.’
나는… 내가 로판에 빙의했는데 치약으로 빨래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피 묻은 와이셔츠를 세탁할 때는 치약이 직빵이었다.
예전 세계에서 과산화수소로 세탁하는 법을 봤던 것도 같은데 여기서 그런 걸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치약을 사용해서 오랫동안 핏물을 빼내고 나면, 양치할 때도 치약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린다.
“남은 건 제가 하겠습니다!”
“우리 막내 착한 것 좀 봐.”
카론이 꼭 한 마리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찡그리고 있었던 얼굴을 풀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카론은 막내가 아니지만 나한테 있어서 얘는 평생 막내다, 응.
“그나저나 이시나 님이랑, 아퀼라는 어디 갔어?”
“아, 아까 두 분이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나갔습니다.”
“뭐라고?”
내가 막 세탁을 마친 와이셔츠 하나를 바구니로 옮기며 벌떡 일어났고, 카론이 내 모습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 따라가야지!”
가뜩이나 빨래가 지겨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둘이서만 이 자리를 빠져나갔다니 나도 탈출하고 말 테다.
“빨리 일어나. 따라가자!”
“남은 일은….”
“괜찮아, 곧 끝나겠네!”
어차피 핏물을 지워 내는 일은 모두 끝나서, 이제 따뜻한 햇볕 아래 말리기만 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럼 이제 가도 되겠네!’
신병들에게는 유감이지만, 기수가 1년 3개월 정도 차이 난다면 짬 처리 정도야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