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떻게 해야 하지?’
원작의 ‘네미집’은, 군부물이라는 특성상 마땅한 악역은 없었다.
원작 남주들이 모두 짬밥을 먹고 부대 내 실세였기 때문에, 그들과 대적할 인물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악역 노릇을 하는 사람이 바로 자이든이었다. 달린이 입대할 당시에 일등병이었던 그는 선임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에서 달린을 괴롭혔고, 상등병이 되었을 때는 아퀼라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이를테면 마물 소탕에 나갔을 때 아퀼라를 의도적으로 위험한 곳으로 이끈다든가 하는 식으로.
물론 군대에서는 기수가 절대적인 만큼 그는 아퀼라에게 유효한 타격을 먹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꽤 거슬리는 인물임에는 분명했다.
그리고 난 내 동기를 거슬리게 하는 후임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XX.
그렇다면 내가 자이든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자이든에게 잘해 줘서 처음부터 우리 편으로 만들어 놓기? 저 XX는 나한테 건방지게 굴던 것부터 이미 틀려먹었다, XX.
역시 남은 방법은….
“야, 너는 지금 청소를 하고 있는 거니, 아니면 걸레질을 음미하고 있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벌써부터 꾀부리는 거냐고. 더 빨리 안 하냐?”
“시정하겠습니다!”
같이 청소를 하는 처지인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이제부터 이 XX와 내 사이에 분명한 벽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아예 이 부대 내에서 힘을 키우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서열을 확실히 다져 놓는 것이다.
그가 가그네 라인이라고는 하지만, 훈련병들끼리 일할 때마다 나는 가그네의 눈을 피해 그에게 시비를 걸고는 했다.
“야, 너는 왜 이시나 님한테 눈깔을 그렇게 뜨냐?”
“그, 그런 사실 없습니다!”
“사루비아, 나는 괜찮….”
“이시나 님, 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에휴….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나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하며 정을 쌓아 온 이시나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휴우….”
“왜, 왜 그러십니까?”
“그냥 한숨 쉰 건데? 불만 있냐?”
“그런 사실 없습니다….”
“하아….”
“…제가 혹시 뭐 잘못했습니까?”
“네 금발이 마음에 안 들어.”
“…잘 못 들었습니다?”
“네 머리카락이 금발인 게 마음에 안 든다고! 왜! 왜, 금색이야! 난 금발을 싫어한다고!”
“시, 시정하겠…. 아니, 그런 사실 없습…. 아니, 죄송합….”
“아아악, 금발이 너무 싫어!”
내가 눈을 희번득하게 뜨고 그렇게 외치자, 자이든은 이제 나를 미친 사람 보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금발이 싫다는 내 말은 괜한 트집이 아니라 사실이다. 에이프릴과 황태자. 두 인물이 모두 금발이었기 때문에 나는 금발을 보면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병이 있다.
“사루비아 쟤도 점점 맛 가는 거 같지 않냐?”
“쯧쯧, 부대에 오래 갇혀 있었더니 성격 나빠진 것 좀 봐.”
“킥킥, 역시 욕하면서 일해야 일이 잘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나 보지?”
“하긴, 역시 일할 때는 욕을 해야지.”
“그리고 나도 금발은 좀 싫긴 하더라.”
“제기랄, 그건 아마 우리 부대원들 전부 마찬가지일 거야….”
내 모습을 보고 블레어와 토비오가 혀를 차며 지나갔다. 내가 저 인성 파탄자들한테서 저런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냐, 내가 설마 저 정도로 성격이 나빠졌을 리는 없어.’
* * *
시간이 꽤 흘러 신병들도 본격적인 마물 소탕에 투입된 지 두 달.
그중 두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역시나 꽤 강한 자이든은 마물 소탕에서 나름의 활약을 하며 멀쩡히 목이 붙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내가 자이든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 시작한 지도 두 달이 되었다.
이시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불러냈다.
“사루비아,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보자.”
“무슨 일이십니까?”
아퀼라랑 카론도 떼어 놓고, 나를 제 앞에 앉혀 놓은 채로 이시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자이든이 너한테 무슨 큰 실수라도 저질렀니?”
“음, 그게….”
자이든이 나에게 건방지게 굴었던 일이나 나를 위험에 빠뜨렸던 일을 말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이시나가 말을 이어 갔다.
“자이든이 처음에 너한테 보이는 태도가 불손했다는 건 나도 아는데….”
‘알고 있었어?’
역시 흑막캐. 사람을 보는 눈이 아주 정확하다.
“혹시 특별히 너를 곤경에 빠뜨린 적이 있니?”
“…제 지시만 듣지 않는다든가, 이전에 오러를 잘못 날려서 제가 다칠 뻔했는데 사과 대신 혼잣말로 욕을 한 적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이든이 싫은 거야?”
어쨌든 그는 내 선임이었기 때문에, 나는 차마 무슨 상관이냐는 말은 하지 못하고 얌전히 입을 닫은 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음, 그렇습니다.”
일단 지금 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핑계가 그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에 그 자식이 아퀼라를 괴롭힐 거라고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신병을 그렇게 괴롭히면 어떡해? 사루비아, 좀 마음을 넓게 가져 보란 말이야.”
“넷슴다….”
“지금은 자이든도 너를 그리 만만하게 보는 것 같지는 않던데. 네가 걔를 싫어하는 것도 알지만, 이쯤이면 적당하지 않을까?”
물론 이쯤 했으면 그도 더 이상 나를 만만하게 여기지 않겠지만, 나는 미래에 그가 아퀼라를 건드릴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제거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신병 괴롭히면, 고참들도 눈치 못 챌 줄 알아? 자이든은 가그네 님과 친하잖아. 그러니까 이쯤에서 그만둬.”
“고참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고참들. 특히 가그네 님 말이야. 아직 훈련병 주제에 다른 훈련병 괴롭히는 걸 상등병들이 알게 된다면….”
“…역시 이시나 님.”
이시나의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내가 눈을 빛내며 이시나를 올려다봤다. 이시나가 그런 내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시나 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 그렇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나 보네.”
“네, 이해했습니다.”
역시 원작에서 다정흑막 역할이었던 사람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
내가 훈련병 주제에 자이든을 괴롭혀 봤자, 괴롭힐 수 있는 정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껏해야 이전에 블레어와 토피오가 말로 인성질을 했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고참들한테 걸리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고작해야 이런 방법으로 미래의 자이든의 힘을 꺾을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자이든의 힘은 그가 가그네의 라인이라는 데에서 나오니, 내가 그를 찍어 누르려 해도 그의 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여러모로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자이든을 찍어 누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라인을 타자!’
그래, 라인, 라인을 타는 거다!
그렇게 된다면 라인을 탄 고참의 비호를 받으면서, 이후에 진급하며 부대 내 권력을 차차 쌓아 가는 데에도 더 유리하다!
가그네뿐 아니라 나도 다른 고참의 라인을 타면 된다!
이시나는 ‘고참’을 이용해야 한다고, 은근슬쩍 내게 힌트를 던져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시나 님,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그렇게 감사할 말을 했던가? 아닌 것 같은데….”
“이시나 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너 내 말뜻 또 이상하게 이해했지? 어휴, 답답해…. 진짜 지긋지긋하게 말 안 들어….”
이시나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일단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라인, 이제부터 라인을 탄다!
* * *
‘젠장.’
자신의 동기들만 남아 있는 연병장. 자이든은 두 명의 동기들과 함께 검날을 관리하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 X같은 국경방위군에 들어온 지도 두 달. 모든 생활이 X같았다.
두 명의 죽은 동기들, 마찬가지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남아 있는 두 명의 동기들, 지옥의 훈련, 수많은 잡무들….
그리고 부대원들 중에서도 참 또라이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틈만 나면 “시간!”을 외치며 주변 인물들을 인간 시계로 만드는 지휘사관 엘리엇, 평소에는 정말 아무것도 시키지 않아서 있는 줄도 모르다가 후임들이 자신의 잠을 깨우기만 하면 “조용히 있다 가고 싶댔지?”라는 말과 함께 후임들을 굴리는 지휘사관 타로, 웃으면서 친근하게 굴다가 실수하면 싸이코로 돌변하는 상등병 알타이르, 후임들에게 욕하는 게 일상인 것 같은 일등병 블레어와 토피오….
그중에서도 유난히 미친 것 같은 사람은, 바로 같은 훈련병인 사루비아였다.
처음 봤을 때는 이 끔찍한 곳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이 화사해지는 기분이었다.
눈길을 주지 않을 수가 없는 얼굴에, 자이든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입대하기 전부터 강했던 그의 소유욕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렇지만 사루비아는 자이든이 생각했던 것처럼 순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뭘 꼬라보냐는 말과 함께 자이든에게 날을 세웠다.
당연히 자이든보다 그녀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자이든은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자이든은 사루비아의 앞에서 위축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자이든이 계속 기가 죽지 않는다면, 역으로 사루비아도 당황하고 자신의 눈치를 볼 순간이 올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그리고 사루비아의 반응은 자이든의 예상 범주를 훌쩍 뛰어넘었다.
‘차라리 화를 냈다면 나쁘지 않았을 텐데….’
그 얼굴로 화를 냈다면 오히려 그것도 귀엽게 보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사루비아는 나날이 눈을 번뜩이며 미친 것처럼 굴었다. 사랑스럽기보다는 공포스럽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 여자는 미친X이었어.’
지금까지 자신에게 시비를 털어 대는 사루비아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저절로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는 길가에 사루비아의 머리색과 비슷한 색의 꽃이 피어 있는 것만 봐도 놀라서 펄쩍 뛰게 될 지경이었다.
그의 동기들은 다들 사루비아에 대해 “미친X은 피하는 게 상책이야.”라는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사루비아는 자신의 손에 잡히기는커녕 먼저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 올 기세였지만, 자이든은 자신이 기가 밀렸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번 정한 목표에서 물러나지 않기로 했다.
‘반드시 내 손에 넣을 거야.’
자이든은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무시하고 사루비아를 눌러 버리겠다는 마음을 활활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