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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32화 (34/233)

“…여기서 막내는 너 아니니?”

“아… 저는 지금 빨래 끝나서 말입니다.”

“신병, 원래 이건 막내가 하는 거야.”

“하지만 그걸 제가 왜 합니까?”

‘저 XX 지금 아까 나를 대놓고 본 것부터 시작해서 태도가 건방진데.’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저 자식을 갈구고 싶었지만, 나는 아직 훈련병에 불과하니 참아야 했다.

그래,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서 이 분노를 해소해 보자.

‘선진 병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군.’

그래, 생각해 보니 원래 자신의 일이 아니었는데 내가 일을 시켰으니 불만이 있을 만도 했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하는 것, 이게 바로 선진 병영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할 수 있지.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나도 이곳과 동화되어 꼰대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우리가 꼰대들을 깊이 들여다볼 때, 꼰대들도 우리를 들여다본다.’

그래, 꼰대들 틈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도 꼰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반성하도록 하자.

난 지금까지 막내가 화장실이나 빨래장의 비품 등을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건 편견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사용하는 물건인데 당연히 우리 모두가 관리해야… 잠깐만.’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내가 합리화를 멈췄다.

‘분명 각자의 역할이 공식적으로 분배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불합리한 관습 같은 게 아니라, 분명 소대 안에는 계급에 따른 할 일이 분류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아직 훈련병인 나는 경계 근무를 서지 않지만, 일등병부터는 경계 근무를 선다.

하루에 정기적으로 몇 시간씩 근무를 서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대신 훈련병들은 빨래 같은 잡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고.

그리고 상등병 중에서도 막내 기수들이 신병들의 훈련과 부대 비품 관리를 책임지고, 윗 기수들은 부대 전체의 훈련을 이끌고….

그래, 이건 편견이 아니라 그냥 공식적으로 정해져 있는 할 일이었다!

그제야 자이든이 나한테 한 말이 ‘선진 병영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아니라 헛소리였다는 것을 깨달은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빨래장의 문이 열렸다.

“야, 신병 너 혹시 가그네 님 어디 계신지 아냐?”

“화장실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래.”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블레어였다.

블레어는 자이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빨래장 밖으로 나가려다가, 무언가를 확인하고는 손가락을 뻗으며 말했다.

“야, 신병. 빨랫비누 떨어졌다. 하나 갖다 놔라.”

“네, 알겠습니다.”

‘…뭔데?’

내가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자이든은 빨래장 안을 나가 버렸다…?

“뭔데?”

다시 한번 그렇게 소리 내어 말한 후에야, 나는 깨달았다.

자이든은 선진 병영을 향해 소대를 이끌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날 무시하고 있는 놈이었다.

“…XX.”

그제야 내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역시, 평소처럼 XX하지 말고 괜히 참아 보려고 했더니 이 꼴이 난 게 분명하다.

‘덕분에 카론을 제외한 후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방향성을 잡았다, 이 XX야….’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으며 나는 결심했다.

원래도 참을성은 없었지만 앞으로도 안 참는다….

“이 XX, 사람 잘못 봤어.”

* * *

“흠….”

소대 단위의 3급 마물 소탕을 나온 어느 날.

총을 단단히 든 채 나는 내 왼쪽에 위치한 자이든을 노려보았다.

자이든은 나와 같은 2분대로 배정받았다.

분대는 소대 생활을 할 때 큰 의미를 가지지 않지만, 마물 소탕에서는 분대 단위로 교대하며 전투를 이뤘기에 분대 구성원들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의 문제는 아주 중요했다.

지난번 일 이후로 자이든과 직접적으로 부딪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분대에서 옆자리에 있으니 좀 찜찜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뱀 마물이라고 했지.’

아무리 국경을 경계하더라도 넘어오는 것을 막기 힘든 마물들이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뱀 마물이었다. 뱀 마물은 땅속을 통해 이동하기 때문에 국경을 다 넘어오기 전까지는 미처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래봤자 3급 마물이기 때문에 전혀 어려운 건 아니지만.’

긴장을 푼 채, 나는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이동하는 듯 꿈틀거리는 흙을 노려봤고.

“1분대, 2분대! 동시에 공격!”

레온의 지시가 들리자마자, 흙 위로 나타난 뱀에게 빠르게 총구를 겨눴다.

탕-! 탕-! 탕-!

탄환이 연달아 뱀들에게 적중하는 것이 느껴졌고.

윈터가 얼음의 오러 블레이드를 쏘아 보내 뱀들의 움직임을 묶어 놓는 것이 보였다. 다른 무기를 쓰는 부대원들도 가까이 다가온 뱀을 처리했다.

‘이제 이런 건 쉽게 느껴질 지경이군.’

내가 태평한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총을 겨누고 있을 때.

쾅-!

나는 급하게 뒤로 물러나며 몸을 피했다.

내가 원래 있었던 자리에, 회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스쳐 지나간 채였다.

놀란 내가 총을 내리고 옆을 돌아봤다.

그건 분명히 자이든의 오러였다.

“아.”

의도했던 게 아닌 듯, 잘못 쏘아진 오러를 보고 자이든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부대로 돌아가면 털리겠군.’

나는 오러를 잘못 사용해서 같은 소대원을 위기에 빠뜨린 자이든이 털릴 것을 떠올리며 가벼운 애도를 보냈으나.

“아이, 씨….”

자이든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이다가 뱀에게 공격을 계속했다.

‘…뭐지?’

어차피 상등병들한테 털릴 문제니까 내가 간섭할 생각이 없긴 했는데, 지금은 나한테 죄송하다고 해야 할 타이밍 아니었나?

날 다치게 할 뻔 해 놓고 ‘아이, 씨’라는 말을 선임 앞에서 해도 되는 걸까?

‘역시, 부대로 돌아가고 나면 무슨 수를 써서든 이 자식을 죽여야….’

그 순간, 나는 원작 소설에도 ‘자이든’이라는 인물이 나왔음을 기억해 냈다. 그래, 그런 놈이 있었지!

그리고 원작 속 자이든은….

“이런 XX….”

원작에서의 자이든의 행보를 떠올린 나는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빨을 갈며, 다시 총구를 들어 뱀에게로 그것을 겨눴고.

탕-! 탕-! 탕-!

세 발을 쏠 때마다 새로 탄환을 장전해야 해서 비는 시간이 생길 만도 했지만, 나는 쉬지 않고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총을 쐈다.

자이든이 조금 질린 얼굴로 나를 보는 동안에, 나는 다른 선임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혹시 내가 만만하냐?”

“…아닙니다.”

“괜찮아, 너 나랑 사이 제대로 X돼 보고 싶은 것 같은데….”

내가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제대로 한 번 X돼 보지, 뭐.”

* * *

“아까 뭔데?”

마물 소탕이 끝나고 소대로 돌아가서, 인적이 없는 건물 뒤에서 아퀼라가 나한테 한 말이었다.

“뭐가?”

“아까 자이든한테 뭐라고 하던데. 뭔 일 있었어?”

“음, 봤나 보네.”

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아퀼라가 나를 살살 달래듯 뜨거운 손으로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쌌다.

“왜, 걔가 너한테 건방지게 굴었어? 왜 이렇게 기분이 나빠?”

“음, 그것도 맞긴 한데. 기분 나쁜 이유는 그거 때문이 아냐.”

아까는 아퀼라가 말한 이유들 때문에 기분이 나빴던 거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지금 기분이 불편한 이유는, 원작에서 자이든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럼 기분이 왜 이렇게 안 좋을까, 응?”

“으음, 몰라….”

일단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아퀼라에 의해 몸에 따뜻한 열기가 돌면서 기분이 조금씩 풀리고 있기는 했다. 나는 말끝을 흐리며 내 몸을 아퀼라에게 더 바싹 붙였다. 음,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는 아퀼라 너는 표정이 왜 그런데? 너도 뭔가 표정이 별로인데.”

나는 미묘하게 평소보다 사나운 눈을 한 아퀼라를 흘끔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으응.”

아퀼라의 말에 대충 대답한 뒤, 나는 원작에서의 자이든의 행보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자이든. 그는 우리 기수와 입대 시기가 1년 3개월이나 차이 났지만, 원작에서 아퀼라와 대적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카론과 그의 사이로 다른 부대원들이 없었고, 거기다 그는 자기 할 일도 잘해서 원작에서 나름의 파워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퀼라가 원작 여주 달린을 챙겨 주려 할 때, 자이든은 달린을 괴롭히려 하며 사사건건 아퀼라의 일을 방해하려 했다.

원작에서는 인물들의 감정보다는 사건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그래서 자이든이 아퀼라를 싫어하는 이유가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았으나, 아퀼라는 달린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혹시라도 자이든과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한테 말하도록.”

“네…. 그런데 자이든 님이 왜 그렇게 아퀼라 님을 싫어하시는 겁니까?”

“나를 질투하기 때문일 텐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해결할 테니까.”

“질투….”

아마도 부대의 엘리트인 아퀼라를 질투한 거겠지.

원래 꼴찌가 1등을 질투하기보다는 2등이 1등을 질투하는 법이다. 자이든은 나름의 능력이 있었지만 아퀼라에 묻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으니, 아퀼라를 질투할 만했다.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어.’

자이든이 같잖은 수작으로 아퀼라의 일을 망치려 들었던 걸 떠올리면 괘씸하기 짝이 없다.

물론 자이든이 대놓고 나를 무시하려 하거나 날 위험에 빠뜨렸으면서도 사과 한마디 안 하는 것도 열받아서 죽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내가 기분이 안 좋은 이유는….

‘너 때문이잖아, 멍청아.’

내 동기를 건드리는 XX는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겠다.

“야, 아퀼라! 잘 들어.”

결국 나는 비장한 표정을 하고 아퀼라의 손을 꼭 붙잡았다.

“누가 널 귀찮게 굴려고 하면 내가 꼭 죽여 줄게.”

“…그래.”

내 진지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는지, 아퀼라는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이든 그 XX, 원작에서처럼 내 동기를 귀찮게 구는 순간 죽여 버리겠어.’

* * *

아퀼라는 사납게 눈을 떴지만 전혀 사나워 보이지 않는 사루비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네가 지금 전혀 무서워 보이지 않다고 말하려다가, 그렇게 말하면 맞잡은 손을 놓을 것 같아서 아퀼라는 얌전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시나 님이 보셨다면 또 뒷목을 잡겠군.’

아퀼라는 자신을 쓰레기로 여기는 듯한 이시나를 떠올렸다. 역시 이시나의 입을 닫도록 하기 위해서 이시나의 일까지 더 열심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아까 그 신병.’

조금 전 문제가 있었던 신병 자이든을 떠올린 아퀼라가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자이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루비아한테 태도가 건방진 건 둘째치고…

‘주제 파악이 안 되지.’

사루비아를 보는 그 눈빛에는, 분명 흑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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