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31화 (33/233)

#4. 군부물이라도 정치질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제대 D-2462일.

“인생….”

여느 날과 같은 X같은 아침, 나는 연병장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왜.”

거듭된 한숨에, 내 옆에 앉아 있던 아퀼라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탈영하고 싶어졌어.”

“그건 그렇지.”

납득되는 이유였는지, 아퀼라가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왼편에 찰싹 붙어 있던 카론도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칭얼거렸다.

“요즘 식사가 예전보다 맛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게. 주방장이 바뀌었나?”

아니면 황태자가 방문한 날에 먹었던 식사의 맛이 잊히지 않는 나머지 지금의 음식이 맛없다고 생각하게 된 건지도 모르지….

“저기 엘리엇 님이야.”

“뭐?”

아퀼라의 말에, 나는 빠르게 오른편을 돌아봤다.

정말로 지휘사관 엘리엇이 입을 쩌억 벌려 태평하게 하품을 하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아 늘 어딘가에 짱박혀 있느라 모습을 본 지도 오랜만이었다.

“야, 시간.”

엘리엇이 우리를 보며 무심하게 툭 내뱉은 그 말에, 우리는 일제히 연병장에 걸려 있던 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빠르게 반응했다.

“엘리엇 님의 제대까지 2개월 29일 13시간 48분 남으셨습니다.”

“역시 사루비아가 빠르긴 해.”

엘리엇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한 표정으로 우리의 앞을 유유히 지나갔다.

“와! 사루비아 님은 어떻게 그렇게 계산이 빠르십니까?”

“글쎄….”

아무래도 내가 이전의 삶에서 이 세계의 사람들보다는 연산을 열심히 했으니 그렇겠지만, 뭐 지금으로서는 딱히 설명해 줄 수 없는 말은 없었다.

어쨌든 제대가 얼마 안 남은 엘리엇은 늘 저렇게 자신의 제대까지 남은 시간을 물으며 시시덕거리고는 했는데, 가끔 반응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후임들을 갈구거나, 혹은 우리가 제때 반응했더라도 각자의 제대 날짜를 떠올리며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걸 즐기는 듯했다.

‘XX, 2개월이라니…. 나는 아직 여기서 2년도 안 보냈는데….’

엘리엇이 저렇게 자신의 제대 시간을 물어보며 후임들을 짜증 나게 만드는 것도, 다 지옥의 국경방위군 생활을 오래 했더니 성격이 더러워졌기 때문이 틀림없다. 그리고 아무래도 황태자 방문 사건을 겪고 난 후 그의 성격이 더 더러워진 감이 있긴 했다.

“오늘 신병 오지.”

“응.”

“이번에는 좀 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신병을 본 지 너무 오래됐어.”

“그렇긴 해.”

아퀼라와 내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갔다.

지난번 황태자 방문 시기에 온 신병 두 명이 얼마 전 전사했기 때문에, 지금 카론은 이 부대에서 1년째 막내였다.

그리고 이 정도로 짬을 먹고도 후임이 카론뿐이라는 건 내게도 굉장히 불행한 일이다, XX….

“이 빨래의 늪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겠어.”

도대체 왜 빨랫감은 해도 해도 계속 생겨나는 거지? 분명 몇 시간 전에 모두 해치웠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우리들이 빨래를 제대로 안 해서 쓸 수건이 없다고 털리고 있다. 이건 굉장히 불합리한 일이다.

현재 이 부대의 훈련병이라고는 나와 아퀼라, 카론, 그리고 이시나뿐. 이시나의 다크서클이 나날이 짙어지는 걸 생각하자면 좀 강한 신병의 보충이 절실했다.

“얘들아, 여기 있었니?”

“이시나 님.”

이시나가 모퉁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묻길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신병 왔는데, 안 보러 가?”

“아, 갑니다!”

우리가 그 무엇보다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소식이었다! 나는 반색하는 얼굴을 하고, 이시나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신병들이다.”

신병들은 뻣뻣하게 굳은 채 윈터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나는 아퀼라와 카론의 팔을 한 짝씩 붙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긴 뒤, 벽에 몸을 붙였다.

“흠…. 어떤 것 같아?”

눈을 가늘게 뜨고 신병들의 모습을 훑어보며 묻자, 아퀼라가 관심 없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어리바리하게 생겼는데.”

“그건 원래 다 그렇잖아.”

솔직히 다시 생각해 보자면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 동기들도 다 어리바리했다. 그리고 아마 나도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고.

이번 기수 신병은 다섯 명으로, 모두 남자였고 참 어리바리해 보였다. 모든 신병들은 처음에는 어리바리하므로 저들 중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흐음….”

내가 계속해서 탐색하는 시선으로 신병들을 쳐다보자, 뒤에서 아퀼라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뭘 그렇게 신경 써? 어차피 네가 쟤네들을 챙겨 줄 것도 아니고, 곧 관심 없어질 거면서.”

“음….”

역시 아퀼라가 나를 잘 알고 있긴 하다. 나도 레이나의 기수가 전부 죽고 난 뒤부터 신병에 대한 관심을 잃은 지 오래니까.

사실 내가 딱히 챙겨 줄 것도 아니면서 신병들이 들어올 때만 매번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건, 그들 중 아는 얼굴이 있는지 찾기 위함이었다.

정확히는, 원작의 ‘네미집’에 나온 등장인물이 있는지.

‘아무래도 얼굴만 봐서는 모르겠는데.’

수많은 로판을 읽다 보면 인물들이 머릿속에서 얽히고설키니, 남주가 아닌 조연까지 기억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원래 로판에서는 빙의하면 원작이 뚜렷하게 기억나고 그러던데, 왜 나는 그게 안 되냐고….’

음, 일단 정 중요한 인물이 있다면, 나중에 이름을 들었을 때 기억나겠지. 결국 나는 흥미를 잃은 눈으로 아퀼라와 카론을 데리고 다시 건물을 나갔다.

* * *

그러나 나는 얼마 안 가 신병과 악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날, 우리는 중대 본부에 있는 대형 훈련장에서 훈련을 마치고 소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몬스터가 화염을 내뿜을 경우를 대비해 불을 피워 놓고 여러 훈련을 했었는데, 자칫하면 산에 불이 옮겨붙을 수 있기 때문에 넓은 훈련장을 가진 중대 본부를 이용했던 것이었다.

몇 시간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산길을 따라 소대로 이동하니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늘 저녁 전까지 일정 없지?”

“응.”

아퀼라의 대답에 그나마 내 얼굴이 좀 밝아졌다. 힘들어 죽겠지만 소대에 돌아가면 쉴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우리를 쫓는 듯한 소리에 부대원들은 일제히 뒤를 돌아봤다.

“라넬라?”

우리와 같은 제복을 입은 여자가 산길을 달려오다 우리를 발견하고는 멈춰 서서 숨을 헐떡였고, 그녀와 아는 사이인 듯 플라토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복에 있는 작은 마크를 보니 베타 소대의 사람 같았다.

급하게 달려온 듯 여자는 숨을 몰아쉬더니, 고개를 들고 우리에게 말했다.

“중대 본부 건물 보수 작업 있는데 열 명만 보내랍니다.”

“열 명씩이나?”

“그렇습니다. 이번에 알파 소대 차례입니다.”

“아, 짜증 나네….”

그녀의 말에 레온이 귀찮은 듯 머리카락을 헤집다가, 우리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야, 들었냐? 열 명만 가란다.”

그러자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열 명이라고는 했지만 누구인지 지정하지 않았고, 방금까지 훈련을 했는데 작업까지 하러 가고 싶을 리가 없었다.

‘XX, 제발 좀 쉬자고….’

내 머릿속에서 긍정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우리는 훈련하는 훈련병이니까, 역시 이런 일들은 일등병들이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주변을 보니 신병들은 물론이고 카론도 하기 싫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왠지 이시나는 체념한 듯 이미 중대 본부 쪽으로 몸을 돌린 상태였지만. 아냐, 아닐 거야….

“야, 빨리빨리 안 가냐?”

레온이 다시 험악한 표정을 짓자, 결국 이 침묵을 깨고 용감하게 질문을 하게 된 건 나였다.

“레온 님, 혹시 누가 가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레온이 갑자기 즐거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늘 양아치 같은 저 인간이 웃음을 보인다니, 왠지 불길해지는데.

이곳의 선임들은 대체로 인성이 파탄 나 있었다. 따라서 먼저 후임들을 괴롭히지는 않더라도, 그들이 즐거워할 때는 보통 후임들이 괴로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다 싶으면 가라.”

…XX…. 나왔다, ‘나다싶’….

결국 나는 얌전히 몸을 돌려 중대 본부 쪽으로 향했고, 아퀼라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내 옆에 붙었다. 카론도 싫은 듯한 표정으로 이시나의 뒤를 따라 중대 본부로 걸었다.

아마 아래부터 열 명이니 신병 다섯 명과, 우리 네 명, 그리고 85기의 블레어와 토피어 중 한 명이 가면 될 것 같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블레어와 토피오는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눈빛으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주먹을 내는 게 아니라 주먹으로 상대방을 때려 부술 기세였다.

그 순간, 상등병 중 한 명인 가그네가 신병들 중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야, 자이든.”

“예.”

금빛 머리카락에 회색 눈을 가진 신병, 자이든이 대답했다.

그는 특별히 엘리트는 아니었지만, 이번 신병들 중에서는 ‘가장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너 저번에 무기 새로 나온 거 확인해야 하니까 넌 바로 소대로 오고. 다른 막내들 중 한 명이 대신 가라.”

‘아, 그러고 보니깐 둘이 친했지.’

신병 자이든은 우리 부대 상등병 가그네와 고향에서부터 알던 사이라고 했다. 그 덕분에 자이든은 가그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부대에 더 원활하게 적응하고 있었다.

즉, 그는 가그네의 라인을 타서 저런 식으로 꿀을 빨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무기를 확인하라는 저 말도 그저 그를 보수 작업에서 빼 주기 위한 핑계 같았다.

‘XX 부럽네….’

내가 이 작업에서 빠진 그를 부러워하는 사이,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던 블레어와 토피오는 동시에 똥 밟은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들의 가위바위보는 무의미했고, 그들은 나란히 보수 작업에 당첨된 것이다….

‘망할, 저 인성 파탄자들이 또 찔을 부리겠군.’

나는 보수 작업을 하는 동안 블레어와 토피오가 쌍으로 인성질을 할 것을 염려하며, 어두운 표정으로 중대 본부로 향했다.

* * *

“낄낄, 역시 일을 할 때는 욕을 해야 일이 잘 된다니깐?”

“맞아, 확실히 욕을 해야 일이 잘돼.”

뒤에서 블레어와 토피오가 킬킬거리며 인성 터진 발언을 주고받는 게 들렸지만, 나는 뒤 돌아보지 말고 지친 표정으로 소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욕을 할 거면 좀 혼자서 하란 말이야, XX들아….’

저 인간들은 자꾸 후임에게 다 들리도록 욕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시나가 왜 자신의 맞선임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들과 친해지지 못했는지 알 것 같다. 정말 인성이 글러 먹은 인간들이다.

“아, 배고파 뒤지겠네.”

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옆에서 카론이 반짝거리는 눈을 한 채 얼른 말했다.

“그래도 곧 식사 시간이라 다행입니다!”

“어, 그래…. 너는 안 힘드냐?”

“예, 별로 안 힘듭니다!”

아퀼라나 이시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까지 쌩쌩한 카론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그가 원작 남주였음을 체감했다.

원작에서도 카론은 지치지 않는 힘과 체력을 가지고 있었지.

“그럼 이따 봐.”

숙소로 향할 아퀼라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 후, 나는 빨래장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나도 바로 숙소로 가서 조금이라도 쉬었겠지만, 아까 훈련에 가기 전에 빨래장에 두고 온 수건들이 있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여자 숙소의 막내라는 끔찍한 상황 속에 놓여 있었고, 괜한 찔을 부리지는 않지만 잘못을 저지르면 곧장 엄해지는 유리의 공명정대함을 피해야 했다.

빨래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는 이미 자이든이 있었다.

그래도 보수 작업을 빠진 동안 일을 대신 해 놓은 건가?

“…흠.”

왠지 자이든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이든이 이 얼굴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하긴, 내가 빙의한 이 사루비아의 얼굴이 어지간히 예뻐야지.

물론 선임 얼굴을 대놓고 빤히 보는 싸가지없는 후임을 그대로 둘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홱 돌려 자이든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이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자신의 자켓을 열심히 빨래하는 척했다.

“야.”

나는 분명 에이프릴의 충고를 기억하고 있다. 아무래도 초장에는 기선 제압이 필요하겠지.

내 당당한 태도에 자이든은 대답하지 않고 몸만 움찔했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눈에 힘을 더 주었다.

“뭘 꼬라봐?”

“아….”

그 말에 자이든은 일단 시선을 회피했지만, 얼굴에 담긴 불만은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의 빨래가 이어지다가, 뭔가를 발견한 나는 다시 먼저 말을 걸었다.

“신병, 빨랫비누 있냐?”

“…예?”

자이든은 회색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입을 열고 말했다.

“방금 제가 다 써서 없습니다. 새로 채워 놔야 합니다.”

“그래? 그럼 비품실에서 하나 가지고 오고, 알타이르 님께 보고 올려 놔. 비품은 하나라도 관리 철저히 해야 한다.”

“제가 합니까?”

…음.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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