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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30화 (32/233)

“새 부대에 배정받자마자 황태자라니…. 내 에너지는 이걸로 끝났어…. 앞으로 2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

엘리엇도 타로의 옆에 풀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제대가 반년 남은 시점에 황태자라니, 망할! 남은 반년만큼은 누구보다 꿀을 빨며 보낼 테다….”

“이번 달 중대 훈련은 취소다…. 아니, 다음 달도 취소다….”

“이번 주에 예정되어 있었던 경계 초소 공사는…. 모르겠다, 언젠가 하겠지….”

중대장과 소대장도 그들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을 해 댔고, 나는 그들도 일개 하급자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는지,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야, 오늘은 훈련 없다…. 알아서들 쉬어라…. 오늘은 청소도 하지 말고 빨래도 안 해도 된다…. 오늘 하루만큼은 그냥 더럽게 좀 살자.”

플라토는 피곤한 얼굴로 대충 손을 휘적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야, 너 아까 도대체 왜 그랬는데? 진짜 융통성 없는 건 알지만 때와 장소를 좀 가려야 할 거 아니냐고.”

“내 동기 윈터야, 정신 나갔었니?”

한편 알타이르와 유리는 윈터를 쪼아대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다 같이 뒤질 뻔했잖아.”

“동기야, 정신 차려, 응?”

그래도 저 모습을 보면 쿨민트 3인방이라도 동기끼리는 허물없이 지내는 모양이다.

그때, 그들의 비난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윈터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언가를 감지한 듯한 표정이었다.

“…오고 있다.”

“뭐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 분명 다시 돌아오고 있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뭐? 도대체 뭐가 돌아오고 있다는…! 으아악!”

그 말에 부대 입구를 돌아본 알타이르가 입을 크게 열리며 짧은 비명을 질렀고.

“으, 으악!”

“…뭐, 뭐지? 앗, 따가워!”

“아, 안 돼….”

유리는 알타이르를 따라 비명을 질렀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던 타로는 모래가 묻은 손으로 자신의 눈을 비볐다가 바보같이 눈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다. 이시나는 병약한 여주인공처럼 자신의 관자놀이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그래, 지금 부대원들은 그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부대 입구에 서 있는 건 분명히….

‘황태자가 왜 저기 있어, XX?’

분명히 저기 서 있는 건 황태자와 그의 병사들이었다!

‘뭐, 뭐지…?’

황태자가 너무나도 태연한 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이젠 내 기억이 잘못된 거였는지 혼란이 오는 지경이다.

분명 황태자가 부대를 떠났는데, 황태자를 너무 보내 버리고 싶은 마음에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이었던 걸까…?

“뭐, 뭐, 뭐, 뭐, 뭐지?”

그러나 리듬을 만들어 낼 정도로 ‘뭐’를 반복하고 있는 타로를 보자니, 내 기억이 잘못된 건 아닌 것 같다. 그는 꼭 비트박스를 하는 사람 같았다.

우리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자, 황태자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다들 바닥에 주저앉아서 뭐 하고 있었나?”

“저, 전하…. 분명 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나마 정신을 차린 중대장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중대장이 이렇게까지 친숙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내려가던 중이었는데, 큰 나무 하나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더군.”

“예, 예?”

“거기다 곳곳에 큰 구덩이가 파여서 길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어. 아무래도 마물의 소행이 아닐까 싶은데….”

“예, 전하의 말대로 흙에서 서식하는 마물의 짓이 아닐까 싶습니다.”

황태자의 옆에 서 있던 호위 기사가 설명을 도왔다.

“일단 그대들이 그 마물을 잡아 줘야 할 것 같군. 그렇다 하더라도 길을 복구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테니, 일단 오늘 밤은 여기서 묵어야….”

“할 수 있습니다!”

중대장이 그 어느 때보다 처절하게 외쳤다. 아무리 위험한 마물을 사냥할 때도 들어 본 적 없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몇 시간 안에 길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지금 당장 내려가서 해결하겠습니다!”

“아니, 무리해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

“절대 무리가 아닙니다! 길 복구는 자주 해 본 일이라, 저희한테는 엄청나게 쉬운 일입니다! 우리 부대원들, 그렇지?”

중대장이 우리를 돌아보자마자, 우리는 한마음이 되어 외쳤다. 중대장과 병사가 한마음이 되다니, 정말 일어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다.

“예, 그렇습니다!”

“쓰러진 나무 정도야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구덩이 메우는 건 5분이면 가능하지 말입니다!”

물론 내가 입대한 후 1년 동안 길 복구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XX.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하냐? 빨리 저 황태자를 산 아래로 보내 버려야 했다.

상황을 파악한 모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며, 다들 눈에서 의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부대원들, 가자.”

중대장과 소대장이 나란히 서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길을 복구하러.”

* * *

“복구해! 어떻게든 복구해! 복구하라고!”

“땅을 메워어어어억! 컥! 콜록, 콜록!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엘리엇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칠 때마다 머리가 한 움큼씩 빠져 나왔고, 타로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다 기침을 했지만 소리 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황태자가 안전한 부대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엉망이 된 길 위에서 허겁지겁 작업을 시작했다.

‘XX, 이, 이게 또 뭔 개고생이야….’

나는 삽을 들고 엉망으로 파헤쳐진 구덩이를 다시 메웠다. 삽을 한 번 들 때마다, 흙이 허공으로 흩뿌려지며 모두에게 흙이 튀었지만 아무도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이 망할 두더지 놈들, 모두 해치워!”

산을 엉망으로 만든 마물인 자이언트 두더지 떼를 발견하고 타로는 그 어느 때보다 열정 넘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역시 윈터! 우리 부대의 특급 병사야!”

“그래! 이게 윈터지! 돌아왔구나!”

얼음의 오러를 두른 검으로 한 번에 두더지를 열 마리씩 해치우는 윈터를 보며 모두가 박수를 쳤다. 손에 삽이 들려 있지만 않았다면 나도 박수를 쳤을 것이다.

‘그래, 저게 바로 남주의 능력이지!’

“아퀼라! 아주 휼륭해! 잘하고 있어!”

“그래, 역시 아퀼라야!”

아퀼라는 불의 오러를 두른 검을 들고 윈터의 얼음에 의해 얼어붙은 땅을 녹였고, 울퉁불퉁한 땅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부대원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퀼라와 윈터가 오랜만에 남주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그래, 이게 남주지!

분명 옛날에는 ‘남주답다’가 이런 의미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 안에서 남주의 뜻은 변질된 지 오래였다.

‘지금부터 일을 잘하는 특A급 병사일수록 남주력이 높아지는 걸로 하자….’

“얼마 안 남았어! 메워! 전부 메우라고!”

물론 아퀼라와 윈터가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이 흙구덩이들을 메우며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전생에서 투스타는 산을 옮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어 봤는데….

‘황태자면 도대체 별이 몇 개인 거지…?’

황태자가 산을 옮기지는 못했지만, 일단 확실히 산을 메울 수는 있다는 사실이 이로써 증명되었다.

‘이게 되네, XX….’

* * *

“…정말 끝났다.”

마침내 우리가 완벽할 정도로 평평하게 다져 놓은 길을 따라 황태자가 산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부대 안에서 서로를 얼싸안으며 승리를 자축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공허한 눈으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며칠 동안 많은 일들이 갑자기 휘몰아친 것 같아서, 더 이상 생각할 기력도 없다….

“하아….”

카론이 지친 티가 역력한 한숨을 내뱉으며 내 옆에 주저앉았다.

“카론, 정말 고생이 많았어….”

“저, 저는…. 황태자 전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기대했습니다….”

“아하, 동화 속 왕자님이라도 떠올렸던 거야? 하긴,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님이긴 했지.”

내가 놀리듯이 킥킥 웃으며 말하자, 카론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백마 탄 왕자님…말이십니까?”

“응, 백마 탄 왕자님.”

그러나 카론은 그 말을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동화에 대한 기억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꿈과 동심을 되살려 줘야겠군.

“백마 탄 왕자님은 동화에 자주 나오는데… 보통 금발의 왕자가 백마를 타고 나타나서 용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해 주지. 그다음에 둘이 결혼하는 거야.”

“드래곤이 인간도 납치합니까?”

“아니, 동화에 나오는 용은 드래곤은 아니고….”

생각해 보니 이미 이 국경방위군 생활 때문에 머릿속에 온갖 잔인한 마물들이 들어 있는데, 동심을 되살려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용은…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는데 공주를 납치해… 음, 왜 납치하냐면….”

…생각해 보니까 용은 왜 공주를 납치하는 거지? 도대체 왜지? 이거 완전 불합리한데?

“그러니까 국, 국경방위군 같은 거야…. 원래 동화 속에서 공주들은 용에게 한 번씩 납치되어야 하는 존재거든.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자신을 강제로 끌고 가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음, 그러니까 우리가 국경방위군에서 강제 복무할 때 공주들은 용 아래에서 강제 복무한다고 보면 되겠지. 솔직히 내가 여기 온 것도 납치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고.

“아하, 이해했습니다!”

결국 내 거지 같은 설명에 카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중요한 건 동화 속에서 왕자들은 잘생기고 검술도 잘 쓰고 신분도 높은 멋진 사람이라는 거야.”

“으음….”

카론이 어딘지 찜찜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황태자가 돌아갔던 부대 입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전 황태자 전하가 별로 멋있지 않았습니다….”

“맞아, 현실에서 황태자는 얼굴만 멀쩡하고, 본질은 그냥 우리의 상관일 뿐이야…. 저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고.”

확실히 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이나 고상한 느낌의 이목구비, 하얀 피부는 그야말로 동화 속 왕자님 같긴 했지만, 어쨌든 난 황태자가 싫다.

‘심지어 그 XX 아까 백마도 타고 왔지…. 이쯤 되면 컨셉질 아니냐?’

그때, 어쩐지 언짢다는 목소리를 한 아퀼라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얼굴은 멀쩡해?”

“응. 멀쩡했잖아?”

“저런 얼굴이 좋아?”

“음, 일단 객관적으로는 잘생기긴 했지.”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저쪽에 있는 선임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물론 잘생겼다고 해서 좋다는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마. 난 황태자가 싫어.”

“그거야 당연히 그렇겠지.”

“그리고 우리 부대만 해도 윈터 님이나, 어쨌든 황태자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있으니까.”

“…윈터 님?”

“응, 엄청 잘생기긴 했잖아.”

늘 느끼는 거지만, 윈터의 얼굴은 정말로 조각가가 하나하나 정성 들여 빚은 얼굴 같았다. 그야말로 ‘완벽하다’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고나 할까.

“…하, 윈터 님 얼굴이 네 취향이야?”

“일단 금발보다는 흑발이 더 좋긴 해. 그리고 난 황태자처럼 곱게 자란 사람을 보면 좀 배알이 꼴리는 감이 있어서….”

“…사루비아, 일단 입을 닫는 게 어떨까?”

아까부터 우리의 옆에 서 있기만 하던 이시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꼬리를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다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잠깐. 다정한 얼굴에 다정한 목소리, 올라간 입꼬리. 그러나 웃고 있지 않은 눈. 이건 분명…!

‘저거 흑막 특유의 표정인데.’

로판에서 흑막들이 자주 짓는 표정인데, 텍스트가 이미지화되었다고 해서 내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설마 무슨 일을 꾸미는 건가?’

내가 조금 미심쩍은 눈으로 이시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휴우, 그거야 지금 아퀼라가….”

“사루비아, 나 할 말이 있었는데.”

아퀼라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이시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시나가 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푸욱 내쉬고 나에게 가라며 손짓했다.

“그래, 그냥 가 버려라….”

“그, 원래 하려던 말씀은 뭐였는지 안 들어도 됩니까?”

“들어도 너는 이해 못 할 것 같으니깐 그냥 가….”

‘일반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인가?’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물어볼 틈도 없이 나는 아퀼라에게 팔을 잡힌 채 이동해야만 했다.

“제대하고 싶다, 제대하고 싶다고…!”

이시나가 아퀼라에게 끌려가는 내 뒤에서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음, 아무래도 탈영할 계획이라도 짜고 있던 모양이군.’

하긴, 황태자 때문에 저렇게 고생하고 난 뒤라면 탈영 계획을 꾸밀 만도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X같은 국경방위군의 하루는 오늘도 이렇게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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