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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9화 (31/233)

몸에 이상이 생긴 듯, 윈터는 비틀거리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윈터! 괜찮아?”

유리가 얼른 다가가 윈터를 강제로 무릎 꿇리며, 황태자에게 보이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목에 꽂힌 마비 침을 빼냈다.

“윈터가 며칠 전 마물의 독에 당한 이후로 계속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무리한 모양입니다!”

“윈터, 아직도 몸이 좋지 않았으면 말을 했어야지!”

유리와 알타이르가 너무나도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외쳤다. 윈터의 왼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른 유리가 근처에 있던 이시나에게 눈짓했다.

“윈터를 빨리 부축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윈터의 오른쪽 팔을 두르며 이시나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윈터 님, 죄송합니다….”

“아니, 나는 마물의 독이….”

“그 마물의 독이 그렇게 강할 줄 몰랐다고? 아직 더 쉬어야겠어!”

유리는 윈터의 입을 틀어막은 채 그를 질질 끌고 갔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해서 많이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대신, 이 부대에서 제가 두 번째로 검술을 잘하니 감히 대련을 청하고 싶습니다!”

알타이르는 어느새 챙긴 자신의 검을 들고 윈터를 대신하여 황태자와 전투를 하기 시작했다….

“크윽! 오러가…!”

“이런, 생각지도 못했던 기술을 사용하시다니…!”

“후우,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시군….”

“빈틈이다! 아니, 함정이었다니!”

나는 본인의 입으로 상황을 중계하며 전투하는 알타이르와, 유리에 의해 질질 끌려간 윈터를 떠올리며 짜게 식은 눈을 했다. 저게 정녕 원작 남주2의 처우란 말인가.

‘윈터, 상등병이 되었으니 상황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하긴, 부대에 갑자기 황태자가 등장해서 중대장까지 절절매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국경방위군에서 자신의 신념이든 가오든 그것들을 굽힐 생각이 없다면, 윈터처럼 강제로 꺾이게 되는 것이다….

“새로 온 지휘사관이 정말로 능력 있군.”

“맞습니다. 그리고 윈터 부대원의 동기인 알타이르 부대원도 역시 엘리트인 것 같습니다. 저 모습을 보십시오.”

중대장과 소대장은 이 상황이 이상하지도 않은지 흐뭇하게 타로와 알타이르를 칭찬했고.

“제, 제법입니다! 저를 패배시키다니…!”

소년 만화의 졸개처럼 대사를 치는 알타이르를 보며 나는 다시금 뼈저리게 현실을 체감했다.

‘이게 뭔 개막장 군대냐….’

* * *

그 어이없는 대련 이후, 우리는 함께 식사를 했다.

참고로 여기서 ‘함께’라는 것은, 황태자를 포함해서 함께라는 말이다, XX….

‘베타 소대랑 감마 소대에서는 식사 안 했다는데 부럽다….’

우리가 생활하는 이 부대에 외부인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데, 주방에서 요리를 담당하시는 분들은 모두 국가에 의해 고용된 형태였다. 황태자가 온다는 소식이 미리 전달되었기에, 오늘의 요리는 정말로 엄청났다.

“평소에도 늘 이렇게 먹나?”

“예, 감사하게도 제국의 황제 폐하가 군을 위해 베풀어 주셔서 늘 부족함 없는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흠, 식사를 잘 먹어야 국경을 잘 지킬 수 있겠지.”

‘아니, 평소에 부족함 없이 먹던 건 맞는데….’

나는 아연한 눈으로 접시 위에 놓인 스테이크를 내려다봤다.

‘우리가 언제 스테이크를 먹었냐고….’

그리고 더 최악은, 내 옆자리가 바로 황태자라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황태자의 앞자리에 앉은 알타이르가 모든 어그로를 다 끌어 주는 탓에 황태자가 내게도 관심을 가지는 일은 없었지만, 이 자리에서 어떻게 식사가 잘 넘어가겠는가.

‘도대체 스테이크는 몇 년 만이야.’

빙의 전에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빙의 이후에는 먹은 적이 없으니 1년도 더 넘은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이프를 잡고 스테이크를 썰었으나, 하도 오랜만인지라 당연히 스테이크를 잘 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에 따라 썰어야 했나? 왜 이렇게 안 썰려?’

내가 누가 봐도 어색한 손짓으로 칼질을 하자, 내 대각선에 앉은 알타이르가 입 모양으로 말을 전했다.

‘어색한 티 내면 뒤진다.’

…XX.

‘평소에 늘 먹던 척하라고.’

…결국 나는 황태자에게 보이지 않도록 나이프에 오러를 실어 스테이크를 썰었다….

윈터가 나한테 전투용 검이 아니더라도 모든 물건에 오러를 실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떡밥을 회수하게 되다니, XX.

오러가 실린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써는 내 모습을 본 카론이 자신의 눈을 비비며 본인이 보고 있는 광경을 의심했지만, 식사를 남기는 것보단 이 편이 낫다.

‘보통 오러 나오는 세계관에서는 막 소드 마스터 이런 거 있지 않냐…?’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가 이 오러로 될 수 있는 건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스테이크 마스터밖에 없었다.

눈물겨운 노력을 한 나를 비롯해, 부대원들 모두는 평소에 늘 먹는 음식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식사를 했다. 황태자는 그 모습을 보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군 생활에 부족한 건 없나 보군.”

“예, 전혀 없습니다, 하하!”

“식사도 잘 지원해 주시고 보급품도 최상의 것들입니다.”

알타이르와 플라토가 빠르게 황태자의 말을 받았다.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네, 네?!”

황태자가 갑자기 말을 건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

“넌 이름이 뭐지?”

“사루비아입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내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사루비아. 혹시 부대 내 건의사항이 있나?”

‘XX…. 대체 여기서 뭘 말해….’

여기서 미친 척하고 솔직하게 “탈영하고 싶습니다!”, “이종족 대우 완전 부당합니다!”, “훈련이 너무 빡셉니다!” 따위의 대답을 했다가는, 으악, 그 미래를 상상도 하고 싶지 않군.

나는 우물쭈물 대답을 미루다가, 그 순간 나를 노려보던 알타이르와 유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뒷일 생각해라.’

‘대답 즐흐르.’

도대체 어떻게 눈빛만으로 저 정도의 대화를 전달할 수 있는 거지…?

“너, 너무 좋습니다!”

결국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기계적인 대답이었다.

“자연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서 부대에 온 뒤 하루하루 건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선임들과 동기들이 정말 잘 도와주어서 군 생활이 즐겁습니다! 아돌브 제국을 위해 제 한 몸을 바칠 수 있다는 게 너무 영광입니다!”

흐흑….

나는 울음소리가 나오려는 걸 속으로 꾹 밀어 넣었고, 내가 말을 마치자 부대원들 모두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음, 다들 군기는 바짝 들어 있군.”

황태자 저놈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걸까? 아까부터 저 자식은 왜 저렇게 얄미운 거지?

망할, 로판 세계에 빙의한 후 나도 황태자처럼 화려한 곳에서 편히 지낼 줄 알았는데…. 이제는 온실 속 화초들을 보면 어쩐지 빡치는 기분이다.

‘XX, 황태자에게 지구의 맛을 보여 줘야 하는데….’

보통 로판 세계에 빙의하게 된 지구 출신 여주들은, 지구나 대한민국의 문물을 이용하고는 한다.

예를 들면 한식 맛을 보여 준다든가, 아니면 수학 공식이라든가, 패션 유행이라든가, 그 외에 온갖 발명품들….

그중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역시 한식이다. 입맛이 까다로운 남주는 여주가 만든 한식을 먹고 여주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지.

그러나 내가 이 황태자 자식에게 보여 주고 싶은 ‘지구의 맛’은 따로 있었다.

‘혁명, 이 XX한테는 혁명 맛을 보여 줘야 한다….’

진정한 ‘붉은 맛’이라 한다면, 역시 ‘한식’이 아니라 ‘혁명’ 아닐까?

역시 에이프릴이 보고 싶어진다. 이제부터 내 장래희망은 ‘체제 파괴하기’이다.

‘혁명, 오직 혁명뿐이다….’

내가 황태자에게 단두대의 맛을 보여 줄 생각을 하는 동안, 숨 막히던 식사 시간도 마무리되었다.

“그럼, 다들 수고가 많았네.”

부대의 입구에서 황태자가 나름의 근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숨길 수 없는 앳된 목소리와 지금까지의 행보로 인해 얄밉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덕분에 내가 앞으로 다스리게 될 이 나라를 다시 돌아보고, 앞으로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리고 좋은 대련도 했고.”

“저도 평생 기억할 큰 영광이었습니다.”

“예, 저희도 대련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알타이르가 재빨리 끼어들어 웃는 얼굴로 아부했고, 플라토가 그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정말 즐거웠나?”

그러나 황태자는 예상치 못했던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XX, 왠지 불안한데….’

아까부터 느꼈지만, 황태자 저 XX는 정말로 눈치가 없단 말이지….

“이렇게 된 김에 하룻밤 자고 가는 거도 나쁘지 않겠군.”

“코, 콜록콜록!”

“커흡!”

‘소, 속이 안 좋아….’

아무래도 조금 전에 먹은 스테이크가 얹힌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다른 부대원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유리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타로의 짙은 다크서클은 이제 턱 끝까지 내려왔으며, 여기저기서 사레 걸린 기침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하, 하하…. 이런 누추한 곳에서 전하가 어찌….”

“하,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나의 국민들이 지내는 곳인데 누추하다니. 나도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그, 그래도 황태자 전하께서 지내시기에는 너무….”

소대장이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를 했고, 내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빙빙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황태자 저 XX를 돌려보내야 한다.’

일 분 일 초라도 황태자가 이 부대에 더 있게 둬서는 안 된다!

“마, 마물….”

순간 내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단어를 입 밖으로 내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고참들의 따가운 눈빛이 내 피부에 와 박혔지만, 지금 중요한 일은 황태자를 보내 버리는 것뿐이었다.

“그, 가끔 밤에 마물 때문에 긴급 출동을 하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며 알타이르에게 무언의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냈고, 처세술의 달인인 알타이르는 그 뜻을 알아차린 듯 내 말을 이어받았다.

“예, 맞습니다. 가끔 저희가 밤에 마물 때문에 긴급 출동을 하기도 해서, 황태자 전하께서도 위험하실 수 있지 말입니다.”

“맞습니다. 거기다가 저희 부대는 늘 경계 근무를 서기 때문에 밤에도 소란스러우실 겁니다.”

“흠, 하긴. 내가 그대들의 일을 방해할 수는 없지.”

중대장까지 나서서 알타이르의 말을 거들자, 황태자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참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따뜻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

‘XX, 내가 이렇게까지 머리를 써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부대에서 지낼수록, 나도 점점 폭력과 공포를 신봉하게 되는 기분이다….

* * *

“그럼 나는 이만 떠나도록 하지.”

“정말 아쉽습니다.”

소대장은 하나도 안 아쉬워 보이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다가, 자신의 표정을 깨달았는지 입꼬리를 슬쩍 아래로 내렸다.

“황태자 전하께 경례!”

마침내 소대장의 지시에 우리가 일제히 황태자에게 경례했고, 마침내 황태자는 그렇게 부대를 떠났다.

황태자의 뒷모습이 점점 산 아래로 내려가며 사라지고, 마침내 황태자가 타고 왔던 말의 말굽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됐을 때, 타로가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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