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윈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걸 어떻게 알지?”
“바닥이 진동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원작에서 굉장히 능력 있는 남주들 중 하나였던 윈터는, 땅의 울림까지 느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윈터는 정말로 인간인지 기계인지 모르겠다.
“…다들 긴장해라. 실수하면 죽인다. 죽여 버린다.”
타로가 그렇게 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이상으로 긴장을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느껴지는 이 일정한 진동음이 내 심장 소리인지 아니면 옆 사람 심장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윈터의 말대로 정말 황태자 일행이 곧 도착하는지,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거 백마야?’
윤기가 차르르 흐를 정도로 잘 관리된 새하얀 말을 탄 황태자가 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산이 워낙 가파른 탓에 마차보다는 말을 타고 온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눈부신 금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언덕을 올라올수록 그의 전신이 드러났다.
황태자는 내가 이 세계에 도착한 후로 처음 보는 화려한 붉은색 옷감을 입고 백마를 타고 있었고, 그의 뒤로 열 명쯤 돼 보이는 병사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중대장이 비굴한 표정으로 서 있었는데, 그의 목까지 땀이 흐르는 걸로 보아 우리보다 앞서 감마 소대와 베타 소대를 순방하는 동안 어지간히 고생했던 것이 분명했다.
‘정말 황태자처럼 생겼네.’
황태자는 전형적인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소년이었다. 그에게서는 곱게 큰 귀족 특유의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고고하게 고개를 든 채로, 그는 우리를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흩어봤다.
꿀꺽-.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고, 타로는 침묵이 길어지자 거의 혼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마침내 황태자의 입이 열리고 오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군들, 반갑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소대장의 외침에 모두 그를 따라 어젯밤에 수십 번을 연습한 인사를 했다. 관절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몸에서 뚜두둑 소리가 난 것 같은데.
“흐음….”
그러나 황태자는 어쩐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앞선 두 소대도 그랬지만… 다들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거지? 형편없군.”
…침묵이 감돌았다.
‘너 때문에 긴장하고 있는 거잖아, XX.’
황태자에게 꿀밤을 먹이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죽을 것 같다….
모두가 어색하게 눈알만 굴려 황태자의 눈치를 봤고, 황태자는 우리와 대비되는 고고한 눈빛을 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황태자라는 신분, 저 새침한 말투,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깔보는 듯한 표정, 그렇지만 잘생긴 얼굴을 종합해 보자면….’
저놈은 츤데레 황태자 속성의 캐릭터일 게 분명하다.
사실 이 세계가 로판이었다면 충분히 남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캐릭터가 아닌가.
‘하지만 그렇든 말든, 지금 나에게는 재수 없는 간부일 뿐이지….’
내가 이를 악물고 저놈이 빨리 이 부대에서 꺼지기를 간절히 바랄 때, 황태자는 중대장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중대장은 어떻게든 황태자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지 우리 중대의 특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병사들을 위한 영양 풍부한 식사, 개인 특성에 맞는 훈련, 뛰어난 실력을 가진 병사들까지….
“병사들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황태자가 흥미가 생긴 얼굴을 했다.
“예, 특히 검술 실력이 뛰어난 병사도 있고….”
“검술 실력이라….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스승도 없을 텐데 뛰어날 수 있나?”
그건 우리들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었지만, 중대장은 억지로 허허 웃는 얼굴을 하고 답했다.
“예, 이종족은 생존을 위한 능력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선천적인 재능이라….”
갑자기 황태자가 어쩐지 불길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 그래! 어디 한번 나랑 검술 대련을 하지!”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XX, 방금 폭탄이 터진 것 같은데.’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대결 신청에 아까부터 하얗게 질려 있던 타로의 얼굴은 이제 흙빛을 넘어 돌빛이 되어갔고, 엘리엇의 동공은 마구 흔들렸다.
“검… 검술 대련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부대에 실력이 아주 뛰어난 병사가 있다는데.”
그 말에 다들 티 나지 않게 윈터를 흘긋거렸다.
자신의 미래도 알지 못한 채 검술 얘기를 꺼냈던 중대장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하지만 위험하십니다…!”
소대장이 금방이라도 먹은 것을 토해 낼 것 같은 표정으로 만류했다.
“지금 나를 약해 빠졌다고 생각하는 건가? 건방지군.”
‘저 XX는 왜 저렇게 철이 안 든 거야. 부대에서 1년쯤 굴러 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러나 황태자는 자신의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거만한 태도로 우리들을 훑어보더니 물었다.
“여기서 가장 강한 자가 누구지?”
중대장이 촉촉한 눈으로 윈터에게 눈짓하자, 그 신호를 알아차린 윈터는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접니다.”
“이리 나와 보도록!”
윈터가 묵묵한 얼굴로 황태자에게로 걸어 나갔다.
그의 탄탄해 보이는 체격과 각 잡힌 걸음걸이를 본 황태자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하! 그래, 네가 제일 강한가?”
“과분한 말씀입니다.”
윈터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말의 눈치라도 있는 사람이면 알 수 있듯이, 이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다.
‘황태자면 도대체 별이 몇 개냐?’
황태자와 대련을 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일단 그것부터가 문제다. 손이 덜덜 떨려서 검을 잡지도 못할 것이다.
늘 이성적이고 침착한 윈터가 평소처럼 검을 다룬다고 해도, 절대로 황태자를 이겨서는 안 된다. 그건 그냥 미친 일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무색하게, 황태자는 대련 의사를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가 정말 강하다면, 너와 한번 겨뤄 보고 싶군.”
“위,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명령에 불복종하는 건가?”
소대장이 필사적으로 황태자를 말렸지만, 황태자가 눈을 치켜뜨자 소대장은 결국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다면 연병장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안내하도록.”
소대장이 연병장으로 앞장서고 황태자가 그를 따라 뒤 돌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윈터에게로 쏟아졌다. 엘리엇, 타로, 레온, 브레이브, 플라토 등…. 모든 선임들이 그에게 입을 뻥긋댔다.
‘잘해라. 잘 져 주라고.’
‘티 안 나게 자연스럽게 져라.’
‘황태자 몸에 상처라도 생기면 우린 다 같이 죽는 거다.’
‘윈터, 너만 믿는다….’
모든 부담을 떠안게 됐지만, 언제나 그렇듯 윈터의 표정은 일말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나도 우리 모두의 안위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제발 메소드 연기를 잘 발휘할 수 있길….’
윈터가 쿨민트 완벽주의 남주2인 건 알지만, 제발 캐릭터성과 가오를 버리고 황태자에게 자연스럽게 져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황태자와 소대장, 그리고 중대장의 모습이 먼저 사라지고.
정말로 대련을 진행할 분위기가 되자, 지휘사관 엘리엇이 황태자를 호위하던 황궁 기사들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전하 좀 말려 주십시오.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원래 저런 분이십니다. 수고하십시오.”
황궁 기사들은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피로한 목소리였다.
황태자의 성격을 짐작한 엘리엇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 없이 절규했다.
황태자는 보나 마나 자기주장이 강하고 독단적이지만 스스로를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라고 착각하는 타입의 재수 없는 인물이 분명했다.
결국 우리가 현실을 부정하면서 연병장에 도착했을 때, 황태자와 윈터는 이미 각자의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다들 잘 지켜보도록.”
황태자가 재수 없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고….
“하하! 정말 기대됩니다!”
쿨민트 3인방 중 유일하게 친화력이 뛰어난 알타이르가 정말 너무 기대된다는 듯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대체 저 반짝거리는 눈빛 연기는 어떻게 하는 거지?
“자, 너희들도 빨리 오도록!”
황태자 앞에서는 즐겁게 웃던 알타이르가 우리를 째릿 노려보며 그렇게 외쳤고, 우리도 억지로 환한 미소를 띠며 황태자와 윈터를 둘러싸고 섰다.
황태자와 윈터가 검을 맞대고 마주 섰다.
지금까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윈터의 첫 말은 다음과 같았다.
“오러를 쓸 수 있으십니까?”
“뭐? 설마 미래에 제국을 이끌어 갈 내가 검술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은가?”
황태자가 조금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말하자, 엘리엇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며 윈터에게만 보이게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오러를 사용하실 수 있는지에 따라, 대련의 양상도 달라질 것 같아 여쭈었습니다.”
“지금 나를 뭘로 보고…!”
황태자는 발끈했지만, 윈터는 그에 대비되는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X된 거 같은데….’
그야말로 규칙주의자에 완벽주의자인 윈터는 정말로 황태자의 수준을 알기 위해 그렇게 물어봤을 테지만, 황태자는 아마도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준비되신 것 같으니 대련 시작하겠습니다!”
아까부터 점점 낯빛이 하얗게 질려 가더니 이제 나보다도 더 피부가 하얘진 소대장이 대화가 길어지기 전에 빠르게 외쳤다.
대련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황태자와 윈터가 들고 있던 검에 동시에 오러가 담기며 환한 빛이 났다.
먼저 검을 휘두른 건 황태자였다. 금빛 오러를 두른 황태자는 빠른 손놀림으로 윈터를 공격했고, 윈터는 조금의 실수도 없이 그 검을 모두 막아 내고 있었다.
‘황태자도 꽤 잘하는데?’
지금 보니 황태자는 곱게 자란 귀족 특유의 고상한 느낌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날쌘 몸놀림과 정확한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르콘이 아닌 이상 고도로 훈련된 사람만 실을 수 있는 오러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검술 면에서 꽤 강한 게 틀림없었다.
확실히 제국에 대한 책임감은 있는 게 분명하다. 이렇게 국경방위군을 순방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본인의 실력 양성을 위해서도 꽤 노력한 것 같고.
다만 문제는….
‘윈터가 너무 강해….’
원작에서도 네 명의 남주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고 묘사된 윈터. 그는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범이었고, 선임들은 늘 윈터의 전투가 정석이라고 칭찬하고는 했다.
지금도 황태자가 공격하고 윈터가 막아 내면서 둘이 비등하게 싸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전투 양상을 잘 살펴보면 윈터는 결코 먼저 공격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저기서 전력을 다하면 미친 거지….’
몇 번의 합을 주고받으며, 황태자도 윈터가 자신을 봐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이를 악물었다.
“왜 공격하지 않는 거지? 지금 나를 얕보는 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똑바로 전력을 다하란 말이다!”
그러자 윈터는 차가운 냉기가 감도는 검을 황태자에게 휘두르기 시작했고.
‘저, 저 융통성 없는 놈….’
분명 적당히 자연스럽게 잘 져 주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윈터는 무려 진심으로 공격을 하고 있었다!
급소는 나름 피하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윈터가 공격을 시작한 이상 황태자가 막기에는 무리였다. 황태자의 몸이 점점 가장자리로 밀려 나갔다.
“제길…! 이 자식이…!”
황태자가 분한 듯이 외치자, 소대장은 이제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안 돼….”
“저, 저 XX가 눈치를 어디로 팔아먹은 거야?”
“윈터 쟤 지금 이럴 때까지 원칙을 지키고 있는 거야…?”
지금 윈터의 행동에 누구보다 어이없어하는 건 알타이르와 유리였다. 그들은 자신의 동기가 진심으로 황태자를 이겨 먹으려 한다는 사실에 금방이라도 혼절할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점점 황태자가 위기에 몰리며 검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 바로 그때.
“이봐, 비키도록.”
타로가 갑자기 나를 밀치며 내 자리에 섰다. 윈터의 뒷모습이 정확히 잘 보이는 바로 그 자리였다.
품속에서 기다란 파이프 같은 것을 꺼낸 타로가, 그것을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훅-!
“큭….”
갑자기 윈터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뭐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황태자에게 보이지 않게 자신의 품에 파이프를 집어넣는 타로의 모습을 보며 내 표정은 더욱 황당해졌다. 왜냐하면 분명 윈터의 뒷목에 꽂혀 있는 저것은….
‘마, 마비 침을 꽂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