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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7화 (29/233)

* * *

제대 D-2555일.

나는 황태자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터무니없다. 황태자가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는 끝없는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이게 뭐지…?”

나는 지금 마른걸레로 조약돌을 깨끗이 닦고 있었다.

혹시 이해가 되지 않을까 봐 다시 설명한다. 나는 걸레로 조약돌을 닦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조약돌이라 함은, 바닥에 깔려 있는 그 조약돌이 맞다. 에이프릴 그 미친X이 쇠구슬을 던져 놓고 찾으라고 시켰던 그 조약돌 밭이 맞다.

“제기랄! 조약돌이 더럽잖아! 더 깨끗이 닦으란 말이야!”

“흐흑, 알겠습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이 상황이 서럽고 어이없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황제 즉위를 준비하고 있는 황태자는, 보여 주기 식인지는 몰라도 제국을 수호하는 국군들을 격려한다는 의미로 부대를 순방한다고 했다.

그리고 국경방위사령부의 제72특공사단 중 하필 우리 18중대가 걸린 것이었다….

18중대는 우리 알파 소대, 그리고 베타 소대와 감마 소대 세 개의 소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소대 세 개가 모여 있는 대신 우리 중대는 서로 이십 분쯤 차이가 나는 곳에 각각 떨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중대 본부 건물과 함께 붙어 있는 곳은 베타 소대의 건물이었고, 중대장이나 행정 관련 인력들이 모여 있는 곳도 그곳이었다.

소대를 각각 떨어뜨려 놓은 이유는 국경 경계를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무기 보급이나 행정 관련 업무를 위해서는 우리도 중대 본부에 다녀와야 했다.

그리고 지난번의 드래곤 사태와 같은 위험한 마물은 중대가 협력하여 전투했고, 중대 본부에 위치한 훈련장들을 함께 쓰기도 했기 때문에 우리 세 개의 소대는 멀면서도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우리 18중대의 세 개의 소대는 나란히 비상이 걸렸다.

황태자가 나흘 후에 우리 중대에 순방한다는 소식에 중대는 발칵 뒤집혔고.

“훈련 전부 취소한다! 지금부터는 청소만 한다!”

중대장과 소대장들은 미친 듯이 병사들을 쪼아 댔으며.

“소대가 더럽군! 중대장은 너희들에게 실망했다!”

“우리 소대원들! 다들 정신 차리도록!”

“조용히 지내다 가고 싶다.”라고 말했던 타로는 눈이 뒤집어져서 얼룩 한 점이라도 보일 때마다 청소를 지시했다.

“천장이 더럽잖아, 천장이!”

“화장실에서 화장실의 냄새가 나는군!”

“나무들 좀 봐! 나뭇가지 모양이 안 예뻐!”

“국기! 국기를 한 시간마다 닦도록! 먼지가 쌓이지 않게!”

“그래! 우리 새로운 지휘사관이 아주 깔끔하군!”

타로는 온갖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 댔고, 소대장도 타로의 뒤를 쫓아다니며 매의 눈으로 우리들을 감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그래, 그들은 황태자의 앞에서는 까마득한 하급자에 불과했다.

이 모든 만악의 근원은 황태자인 것이다.

“조약돌을 더 빨리 닦으란 말이야! 더 빨리! 손이 안 보이도록! 조약돌을 다 닦으면 수레바퀴를 닦도록!”

“네, 알겠습니다….”

조약돌을 반지르르하게 닦고 있는 카론과 내 옆에서 상등병인 브레이브가 우리를 갈궈 댔지만, 지금 정신이 반쯤 나간 건 우리뿐 아니라 브레이브도 마찬가지였다.

브레이브는 험악한 눈깔을 하고 철조망을 닦고 있었다….

아니, 철조망을 어떻게 닦고 있는 거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는 것을 보면, 군대란 곳은 크툴루 세계관 속인지도 모른다….

‘탈영하고 싶다.’

보통 청소라 함은 훈련병들과 일등병들이 도맡아 하던 거지만, ‘황태자 방문’이라는 이 초유의 사태에 상등병들까지 모두 눈이 뒤집혀서는 청소를 하고 있었다.

특히 이번 달에 상등병으로 진급한 쿨민트 3인방, 윈터, 알타이르, 유리.

그들은 일등병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윈터, 상등병이 됐으니 이제 원작 남주의 가오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무에 개미가 있군.”

나는 나무 위에 올라가 가지치기를 하며 이제는 줄기에 있는 벌레들까지 박멸해 버릴 기세인 윈터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완벽주의자!’

도대체 왜 이런 곳에서까지 완벽한 거지? 그가 섬세한 손으로 가위를 움직일 때마다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황태자의 방문으로 불쌍한 건 상등병들뿐 아니라 새로 도착한 훈련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타로와 함께 새로 도착한 두 명의 남자 훈련병. 원래대로라면 지옥의 신병 교육과 함께 지옥의 신병 훈련을 받아야 했겠지만….

“나뭇잎!! 나뭇잎이 바닥에 떨어져 있잖아!!”

그들은 플라토의 노성 아래에 나뭇잎들을 열심히 쓸고 있었다.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나뭇잎을 쓰는 그들은 자신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보나 마나 우리가 장난치는 건지 아닌지 의심하고 있겠지.’

눈앞에서 선임들이 청소를 한다면서 바닥의 조약돌을 닦고 있는데, 나 같아도 이 모든 상황이 거짓말 같겠다, XX.

“사, 사루비아 님…. 훈련이 하고 싶습니다….”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조약돌을 닦는 임무를 맡은 카론이 촉촉한 눈동자로 말했다. 내 맞후임의 모습을 보니 나도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흐흑, 울 막냉….”

“잘 못 들었습니다?”

“몰라도 돼…. 울 막냉은 평생 막냉이야….”

이제는 전생에서 쓰이던 말까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어지니 내 입이 통제 능력을 잃은 것 같다….

“야, 너희. 조약돌 좀 보자. 그래, 깨끗해졌군!”

아까부터 피곤한 눈으로 부대를 돌아다니던 타로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만족스러운 눈빛을 했다.

그의 옆에는 오랜만에 보는 지휘사관 엘리엇도 있었다. 엘리엇은 곧 제대이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 짱박혀 있느라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이런 비상 상황에는 그도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모양이군.

“그래! 이제 너희는 가서 수레바퀴를 닦아! 아니, 그냥 수레를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아라!”

“네, 알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울먹거리는 눈을 한 카론을 토닥여 주며 그를 데리고 걸레를 빨러 이동했다. 대체 바퀴는 어떻게 닦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마도 해내게 될 것이다. 그야 여기는 군대니까, XX….

“저, 사루비아 님….”

그때, 카론이 작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왜?”

“저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뭔데?”

“으음, 저희가 왜 황태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카론이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기에, 나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짐작해 보았다.

아마도 아르콘에게 노예 계약이나 다름없는 계약 마법을 맺은 아돌브 제국 황실의 일원인 황태자를, 왜 우리가 극진히 모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일 터이다. 우리에게 있어 황태자는 원수 그 자체이니까.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국경방위군으로 복무하고 있고, 우리가 모셔야 할 상관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다들 이 상황이 너무 익숙해져서 황태자를 원망할 생각도 못 하는 거 아니냐?’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나는 황태자를 암살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사근사근한 말투로 대답했다.

“응, 일단 황태자님은 우리가 모시고 있는 상관이니까.”

“아, 그게 아니라… 황태자님이 오셔서 다들 이렇게 고생하신다면, 황태자님이 부대에 못 오시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응? 어떻게? 방법이 있어?”

“네, 방법이 있습니다….”

‘흠, 카론이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긴 한데.’

이시나라면 뭔가 흑막스러운 생각을 해냈을 거라 의심했겠지만, 카론의 성격상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가끔 기본적인 것들도 잊어버리니, 카론이 생각해 낸 방법은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겠지만 나는 막내를 놀아 주는 심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 뭔데? 한번 말해 줄 수 있어?”

“네, 그게 뭐냐면….”

카론이 수줍은 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산에 불을 내는 겁니다.”

“…어?”

“산 입구에 불을 지르고 마물의 소행이었다고 하면, 황태자님도 저희 부대에 일이 생겼으니 다른 부대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산을 불태우자는 거야?”

“예, 혹시 별로 안 좋은 생각입니까…?”

‘…뭐지?’

나는 할 말을 잃고 아연한 표정으로 카론을 쳐다봤다. 도대체, 저놈의 사고방식은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카론, 잘 들어 봐.”

“네, 네…!”

“우선 산에 불을 지르면 안 돼.”

“아….”

“산에 불을 지르면 산에 살고 있는 동식물들이 죽거든. 그러면 안 돼.”

“아, 동식물들을 죽이면 안 되는 겁니까…?”

…화재 사고로 기억이 듬성듬성한 건 알겠는데, 이렇게 기본적인 윤리까지 잊어버릴 줄은 몰랐다.

‘아냐, 내가 이해하자…. 카론이 나쁜 애인 게 아니라, 몰라서 그런 거니까.’

결국 다시 한번 카론을 잘 챙기기로 결심한 나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산에 불을 지르면 안 된다는 거 잘 이해했지?”

“네, 이제 알았습니다…!”

“그럼 걸레나 빨러 가자….”

어쩐지 이렇게 기본적인 윤리까지 가르치고 나니 더욱 지친 기분이었다.

‘육체와 정신이 동시에 피로하군….’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걷던 나는, 빨래장 안에서 너무나도 반가운 얼굴을 맞이하고는 표정을 확 피며 외쳤다.

“아퀼라!”

이곳에서 누구보다 믿음직한 내 동기…!

나는 몇 시간 만에 아퀼라와 눈물겨운 상봉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와 내 상태는 모두 엉망이었다.

아퀼라는 눈 밑이 퀭해진 채로 열심히 걸레를 빨고 있었다. 늘 무표정을 유지했던 그의 눈빛에서는 탈영하고 싶다는 속내가 오랜만에 엿보였다.

“사루비아. 뭐 하다 왔어?”

“카론이랑, 조약돌을 닦았어….”

“…뭘 닦았다고?”

“조약돌….”

그 말에 아퀼라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퀼라 너는 뭘 하다 왔는데…?”

“천장을 닦았어.”

“그건 어떻게 닦는 건데…?”

“나도 내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 말에 나는 눈물이 촉촉하게 맺힌 눈으로 아퀼라를 향해 팔을 벌려 보였다. 마찬가지로 피곤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의 아퀼라도 한쪽 팔로 나를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정말 눈물겨운 동료애였다.

“얘들아.”

“넷슴다?”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내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아퀼라에게서 떨어져 자세를 바로 했다.

이시나가 왠지 촉촉한 눈으로 우리들을 보고 있었다.

“얘들아, 얼른 걸레 빨아야 할 것 같아….”

“아, 넷슴다! 얼른 빨고 수레바퀴 닦으러 가겠습니다!”

“아니, 타로 님께서 다른 일 말고 더 급하게 청소해야 할 곳이 있다고 하셨어….”

왠지 불안해진 마음에, 나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이시나를 올려다봤다.

원작에서의 ‘겉으로는 다정하지만 속으로는 냉철한 최신 트렌드 흑막 남주’ 어쩌구의 이시나의 동공도 나와 마찬가지로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대체 뭡니까…?”

“으응, 화장실 천장이 더럽대….”

“흐윽, 대체 그건 어떻게 닦는 겁니까….”

그 말에 나는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XX, 네가 집착 남주든 뭐든 기필코 죽여 버린다, 황태자 이 자식아….

* * *

그리하여 황태자가 도착하는 바로 그날 아침.

우리는 부대 입구에 일렬로 도열한 채, 황태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소대장부터 지휘사관들, 새로 들어온 이름 모를 훈련병들까지, 우리는 모두 피곤해서 뒤질 것 같은 눈깔을 하고 있었다.

어제 열심히 빨래하고 뻣뻣하게 다렸던 옷은 각이 잡혀 있었고, 신발에서는 윤기가 흘렀다. 밤새 닦아놨던 도로도 반딱반딱 빛났다.

“…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잔뜩 긴장하여 숨죽이고 서 있을 때, 침묵을 깨고 윈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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