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전원! 크리스 님께 경례!”
마주 보고 선 부대원들이 검을 높이 쳐들었다. 각자의 오러를 담은 검은 알록달록한 빛깔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는 그 검들이 만들어 낸 길 앞에 서서, 뻘쭘한 얼굴로 우리들을 쳐다봤다.
“…이 부대에서는 진짜 짱박혀 있기만 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모두 고마웠고 수고했다! 몸 건강히 제대해라! 꼭 살아서 나와라!”
그는 그대로 검이 만들어 낸 길을 당당히 걸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꼭 눈물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8년을 버티면 어떤 기분일까.’
크리스는 저 멀리 있는 수레의 앞까지 걸어갔다. 내가 이곳에 올 때 타고 왔던 수레였으며, 동시에 부대를 떠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갈 수레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중대 본부에 모여서, 각 소대에서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해 주고 있었다.
우리뿐 아니라 감마 소대의 지휘사관 하나도 전역하는 날이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그에게 경례했다.
마침내 지휘사관의 배웅이 끝나고, 이제 진급하여 떠나는 상등병들을 배웅해 줄 시간이 되었다.
‘에이프릴 혼자네.’
다른 소대에도 그녀의 동기는 없거나 죽은 듯했다. 에이프릴 혼자만이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전원! 에이프릴 님께 경례!”
그 말에 우리는 내렸던 검을 다시 높이 들었다.
에이프릴은 언제나 그렇듯 방긋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저 미친X도 드디어 가는구나, 감사합니다….’
“살아남아라. 나와서는 보지 말자!”
그녀다운 짧은 인사를 남긴 에이프릴은 그대로 길을 걸었다.
길을 걷던 에이프릴이, 가장 끝에 서 있었던 내 앞에서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정면만 본 채, 그녀가 나에게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흑마술 수색 특수군.”
“예?”
“너도 이 체계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 같으니까 특별히 보상을 줄게. 만일 이 체계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제대할 때까지 유지된다면, 제대하고 나서 흑마술 수색 특수군에서 나를 찾아.”
“뭐, 뭘 하시려는….”
“난 체계를 파괴할 거야.”
그 말을 마친 후 에이프릴은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나만 입을 쩍 벌린 채 그 자리에 남아 있었고.
‘지,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체계라면, 국경방위군 자체를 파괴하겠다는 건가?
내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에이프릴과 크리스, 그리고 다른 지휘사관 하나는 그대로 수레에 탔다.
그들이 탄 수레가 출발했을 때, 그들은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세계는 소설 ‘네미집’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세계이다. 그리고 미처 소설에 나오지 않는, 뻥 뚫려 있는 구멍이 이 세계에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이 세계는 어떤 식으로든 자체적으로 그 구멍을 메웠을 것이다.
예를 들어 상하 관계가 존재하는 집단에서 극단적인 가혹 행위가 없던 것은,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함께하며 아르콘끼리 유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소설만 읽었던 나는 이 세계가 아포칼립스임을 알지 못했지만, 실제로 이 세계는 한 편의 처절한 비극이었다.
그렇다면, 국경방위군이라는 이 체계는?
끊이지 않고 나타나는 마물과 아르콘이 목숨을 걸고 전투하는 체계.
단지 소설의 배경을 위해 만들어진 이 불합리한 세계는, 어떤 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걸까?
“난 체계를 파괴할 거야.”
나는 왠지 전역하고 나서도 에이프릴을 찾아가게 될 것 같다는 이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 * *
에이프릴이 진급하여 떠난 다음 날.
“…야, 우리 언제 제대하냐.”
왠지 허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내 옆에 서 있던 아퀼라를 괜히 툭툭 쳤다. 그가 주황빛 눈으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내가 그 생각을 안 했네.”
“뭘? 설마 제대할 생각을?”
내가 미쳤나는 눈으로 아퀼라를 쳐다보자, 그도 곧장 응수했다.
“아니, 그 생각은 매일 했고.”
“아, 역시 그렇지?”
원작 남주였어도 인간인지라 사고방식은 다 똑같은 것이다….
“사루비아, 내가 제대한 후에 할 일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응, 그거 나도 있지.”
“그 계획에 네가 있어야 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단 말이야. 생각해 보니 네 동의를 안 구한 것 같아서.”
“아, 그래? 걱정 마, 내가 뭐든지 다 해 줄게!”
내가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그래, 제대해 봤자 이 세계에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데 아퀼라랑 연락이나 해야지.
‘…잠깐만.’
문득 내 머릿속에 원작 여주 달린이 떠올랐다.
이미 남주들이 나한테 집착하는 전개 같은 건 박살 난 지 오래니깐, 이 네 명의 원작 남주들이 달린한테 집착하든 말든 별 관심은 없는데.
‘그럼 아퀼라 이 XX, 제대하고 달린이랑 결혼해서 사는 거 아니야?’
그건 좀 곤란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계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은 아퀼라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혼부부 사이에 눈치 없이 낀 거슬리는 ‘남편의 여자 사람 친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달린 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띨띨한데?’
원작 ‘네미집’을 읽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소설에 빙의한 후 나는 원작 여주가 고문관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고문관한테 내 소중한 동기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야, 아퀼라.”
“어.”
“너 혹시 멍청한 여자애랑 결혼하겠다고 하면.”
내가 아퀼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죽여 버릴 거야.”
“…뭐?”
아퀼라의 동공이 잠깐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아니, 내 표현이 원래 이렇게 과격하지는 않았는데.’
입대한 후로 날이 갈수록 말이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원래 의미만 전달된다면 상관없지 않을까?
“야, 이해했냐?”
“…아까 말한 내 계획을, 사루비아 네가 같이 해 주기만 하면 그럴 일 없을 것 같아.”
“좋아, 약속할게.”
나는 그의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시나가 우리를 스쳐 지나가며 어쩐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대체 쟤네는 사고방식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 * *
군대의 시간은 더럽게 느리게 흘러간다.
오늘은 우리가 입대한 지 정확히 1년째 되는 날이었다.
또한 오늘은 다른 부대에서 새로운 지휘사관이 도착하는 날이기도 했다.
3개월 전 에이프릴이 진급하여 다른 부대로 떠났듯이, 어제는 루이즈가 부대를 떠났다. 그리고 오늘은 다른 부대의 사람이 우리 부대로 오는 것이다.
‘성격 좀 멀쩡한 사람이면 좋겠다.’
하지만 국경방위군에서 6년을 보내고 나면 성격이 멀쩡할 수가 없겠지, XX.
“얘들아, 윈터 님이 빨리 들어오라고 하셨어.”
“아, 새로운 지휘사관 님이 도착했나 봅니다?”
오랜만에 생긴 쉬는 틈을 타 건물 구석에 짱박혀 있던 나는, 아퀼라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흙을 털고 이시나의 뒤를 따라갔다. 새로운 지휘사관이 도착했으니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건물에 도착했을 때, 나는 처음 보는 보라색 머리의 남자가 부대원들의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라색 머리에 보라색 눈의 그는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약간 음침한 느낌까지 들었다.
내가 얼른 부대원들의 틈에 섞여 서고 다른 부대원들도 전부 도착했을 때에야, 새로운 지휘사관이 입을 열었다.
“반갑다. 나는 70기 지휘사관으로 이 부대에 오게 된 타로라고 한다.”
‘아, 루이즈 님 기수겠구나.’
어제 상등병이었던 루이즈가 지휘사관으로 진급하며 이 부대를 떠났으니, 그와 같은 70기 기수가 지휘사관이 되어 이 부대에 오게 된 것이다.
“나도 너희들이 힘든 걸 알고 있으니, 되도록이면 여기서 조용히 지내다 가….”
“큰일입니다! 큰일!”
그때, 누군가가 타로의 말을 끊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지휘사관 말을 끊다니, 미쳤나?’
모두가 기겁하여 막 말을 끊고 자리에 도착한 사람을 쳐다봤다. 상등병 플라토가,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플라토 님은 일이 있어서 중대 본부에 간다고 하셨는데?’
내 기억에 따르자면 플라토는 새로운 무기 보급을 위해 이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중대 본부에 다녀온다고 했다.
늘 꼼꼼한 플라토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나도 짱박혀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잘못 기억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너는 상등병 같은데. 내 말을 끊을 정도면 대체 무슨 일이지?”
“바, 방금 중대 본부에서 듣고 오는 길인데 큰일 났습니다!”
플라토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여 흥분한 기색으로 외치자, 타로가 자신의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게 불편하다는 태도로 물었다.
“왜지? 1급 마물이라도 나타났나?”
“지금 마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지만, 타로는 짐작 가는 게 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설마 중대 연합 훈련이라도 있는 건가?”
“그, 그게 아니라….”
“그럼 우리 부대에 여단장님이라도 방문하시나?”
“아, 아닙니다!”
“그럼 뭐 사단장이라도 오시나?”
“아닙니다!”
“하긴, 그럴 리가 없겠지. 그럼 도대체 무슨 일로….”
“황태자님께서 저희 부대에 순방을 오신다고 합니다!”
플라토의 말이 끝나자 잠시 분위기가 싸해지더니.
“으악!”
알타이르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십시오.”
윈터가 플라토를 보며 말했다. 나는 윈터가 그런 절박한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봤다.
“아, 안 돼….”
플라토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화를 내려던 타로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황태자?’
그건 오랜만에 듣는 로판 같은 단어였다.
‘…잠깐, 황태자면 로판 남주 재질이지 않나?’
국경방위군에서 가오를 잃은 남주들보다는, 직위가 있는 황태자가 더 로판에 가깝지 않나?
내 머릿속에서 1년 만에 로판 회로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혹시 순찰하러 왔던 황태자가, 나를 보고 집착 남주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강인한 모습을 보고, “너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군.” 따위의 멍청한 말을 할 수도 있겠다.
물론 모든 여자들은 원래 다르니까 당연한 얘기이긴 한데, 로판 남주들은 이상한 데서 멍청한 경향이 있으니까.
‘황태자면… 약간 피도 눈물도 없는 폭군 느낌인 거 아니야?’
황태자가 온다는 말에 공포에 가득 질린 것처럼 보이는 선임들의 모습을 보면, 황태자가 뭔가 엄청난 사람인 건 확실했다!
그래, 이거다!
“이시나 님, 황태자님이 혹시 엄청 매정한 분이십니까?”
“뭐?”
내가 그렇게 질문하자, 이시나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의 안색은 부대원들과 마찬가지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들 엄청 두려워하시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겁니까?”
제발 폭군 황태자가 이 부대에 왔다가 나한테 집착하며 로판 전개를 시작해 줬으면 좋겠다.
“무, 무슨 소리야, 사루비아….”
이시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왜 이렇게 겁에 질렸는지 모르는 거야…?”
“그게 뭡니까…?”
이시나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내 어깨를 탁 붙잡았다.
“청소… 청소해야 돼….”
“…잘 못 들었습니다?”
“청소, 청소를, 청소를 해야… 얼마나 해야 하는 거지…? 청소를 해야 한다고….”
‘XX….’
결국 나도 힘없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XX, 로판 전개는 무슨….’
역시 황태자가 부대에 도착하기 전에 암살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