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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3화 (25/233)

* * *

4년의 시간이 지나고, 아퀼라가 사루비아의 취향대로 잘 꾸며 놓은 그의 집에서 달린이 번뜩 눈을 뜨자마자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아, XX.”

그 말을 듣자마자 아퀼라는 자신의 앞에 누워 있는 이 애가 달린이 아니라 사루비아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주술이 성공한 것이다.

“…뭐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사루비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사루비아.”

“어. 나 지금 기억이 흐릿한데, 여기가 어디냐?”

“사루비아.”

“아, 어디냐고.”

“…사루비아.”

“아, 사람 빡치게 왜?”

아퀼라는 사루비아의 두 손을 붙잡고 울듯이 웃었다.

사루비아였다. 정말, 사루비아였다.

아퀼라가 갑작스럽게 손을 붙잡더니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채 무너져 내리자, 사루비아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답답하니까 빨리 말 좀 해 봐.”

아퀼라는 달콤한 목소리와 그에 반해 퉁명스럽고 거친 이 말투를 사랑했다.

“마지막에 네가, 네가… 어떻게 됐는지 기억나?”

“…아, 맞아.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있었네. 여기는 뭐, 병원인가? 부대는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죽었어.”

“…뭐?”

“그래서 너를 되살리려고, 나는….”

아퀼라는 말을 끝맺는 대신 사루비아를 꼭 껴안았으나, 갑자기 사루비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거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 비켜 봐 봐. 지금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사루비아, 너무 놀라지 마. 그게 최선의 몸이었으니까.”

거울 앞에 선 사루비아가 잠시 침묵하더니.

“…야! 이 미친 XX야!”

집 안에 그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사루비아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한 뒤, 아퀼라는 가만히 앉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혹시나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때를 대비해 두 손을 자연스럽게 붙잡은 채였다.

사루비아는 의외로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아퀼라가 예상했던 바였다. 사루비아는 이상한 포인트에서 상식과 벗어나게 행동하고는 했으니까.

“그래, 뭐. 나도 이해했어.”

사루비아가 의자에 몸을 쭉 기대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나는 눈 감았다 떠보니 4년이 지나 있고 제대한 건 좋네. 그러고 보니 카론은? 나 죽어서 애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잘 챙겨 줬어. 카론은 두 달 뒤면 제대야.”

“살아 있다니 다행이네. 그나저나 네가 카론을 잘 챙겨 줬다고?”

“…육아 연습이라고 쳤어.”

“그래, 잘했어.”

사루비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퀼라는 사루비아가 자신의 속내를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저렇게 반응하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사루비아는 원래 그런 애니까.

“생각해 보니까 그 고생을 해놓고도 3,000마크네를 결국 못 받은 건 빡치는데.”

“어차피 내 돈이 네 돈이잖아.”

“그건 그래.”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온 영향인지는 몰라도, 오늘의 사루비아는 평소보다 더 멍해 보였다.

아퀼라는 자연스럽게 사루비아의 허리에 팔을 올리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사루비아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몸에 따뜻한 열기가 돌기 시작하자 금세 표정을 풀고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있잖아.”

아퀼라의 품에 안긴 채 사루비아가 입을 열었다.

“응, 말해 봐.”

“그래도 총이 없으니깐 되게 어색해.”

“이제 싸울 일 없는데 왜.”

“그놈의 국경방위군 때문에 화만 늘었어. 게다가 빡치면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간단 말이야.”

“괜찮아, 내가 너 빡칠 일 없게 할게.”

“됐고, 집에 산탄총이 하나 있어야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은데. 무기 상점에서 사 오면 되는 건가? 사냥용으로 팔잖아.”

“너 여기 있으면 내가 갔다 올게.”

“같이 안 가고?”

“응, 너 여기 있어.”

아퀼라는 사루비아를 위한 총을 사러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루비아의 심정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본인도 제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자신이 쓰던 검을 두었으니까.

아주 가끔 마물들이 마을까지 내려오는 일이 있으니, 집에 무기를 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사루비아가 그 무기를 쓸 일은 없겠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면.

“사루비아, 다녀올게. 어디 가지 말고.”

“내가 어딜 가겠어.”

철컥-.

아퀼라가 문을 닫고 나가고, 사루비아만이 홀로 남아 조용해진 집 안.

사루비아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집 안 곳곳을 확인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문, 창문…. 아, 여기 뒷문도 있네.’

아퀼라가 집을 비운 동안에, 마침내 집안 곳곳을 살핀 사루비아는 확언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 아퀼라 이 새끼.”

모든 출입구는 밖에서 잠겨 있었다.

“이 XX 지금 나 감금했어.”

* * *

아퀼라가 집 안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사루비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루비아는 이 집에 완벽하게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지금 몸은 좀 괜찮아? 어색하지는 않고?”

“거울 볼 때 빡치는 거 말고는 다 괜찮아.”

아퀼라는 테이블 위에 기다란 산탄총을 올려놓았다.

“네가 쓰던 거랑 같은 종류야. 확인해 보고, 문제없으면 수납장 안에 넣어 둘게.”

“아, 분명 죽기 전까지 총을 잡고 있었는데….”

사루비아가 산탄총 안에 총알을 장전했다.

철컥-.

“왜 이렇게 오랜만에 잡는 기분이 들지.”

“어쨌든 4년간의 공백이 있었으니까.”

총을 잡은 사루비아가 투덜거렸다.

“이 몸 주인 대체 뭐야? 손에 굳은살이 전혀 없어. 총 쏘기 불편할 것 같은데.”

“앞으로 총 쏠 일 없을 텐데, 응?”

“앉아 봐. 할 말이 있어.”

사루비아가 이리 오라며 가까이 손짓하길래, 아퀼라는 그녀의 맞은편 테이블 앞에 가서 앉았다.

사루비아가 아퀼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꺼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그런데 감금되어 있으면 나 혼자 쉬는 시간 같은 건 아예 없어?”

“풉! 콜록, 콜록! 뭐라고?”

아퀼라의 입에서 요란한 기침이 튀어나왔다.

“너랑 사는 건 좋은데, 역시 24시간 함께 지내는 건 내가 좀 힘들어지지 않을까.”

“아니, 잠깐만, 잠깐만.”

뭔가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다 싶어서, 아퀼라가 손을 들어 사루비아의 입을 막았다.

“…내가 널 가둬 놓은 걸 알아차렸구나.”

아퀼라가 고요하게 가라앉은 주황색 눈동자로 사루비아를 응시했다. 사루비아가 다시 특유의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너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난 대부분 상관없긴 한데, 그래도 미리 논의가 필요한 것 같아.”

…아퀼라는 자신이 사루비아를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사루비아의 사고방식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도 이상한 포인트에서 이상한 곳으로 새는 일이 잦았다.

“내가 널 가둬 놓은 건 그냥 네가 날 버리고 떠날까 봐 그랬던 거야.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야, 상식적으로 내가 여기서 널 버리고 튀면 어딜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길에서 노숙? 여기 있으면 네가 알아서 잘해 줄 텐데 얌전히 감금되어 있는 게 낫지.”

아퀼라는 사루비아의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곧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여기 얌전히 갇혀 있어 주겠다고?”

“어차피 나랑 결혼할 거 아니었어?”

“…그건 또 왜 그렇게 생각한 건데?”

“네가 아까 카론 챙기던 걸 육아 연습이라고 했잖아. 내가 네 말뜻도 모를까 봐? 그냥 대놓고 날 XX해서 XX하고 싶다고 얘기를….”

“알았어, 일단 조용히 해 봐.”

아퀼라가 다시 사루비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뜨거운 손이 입가에 닿았기 때문에, 사루비아는 얌전해졌다.

아퀼라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사루비아가 달콤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난 너랑 다 할 수 있어.”

이번에는 사루비아가 먼저 아퀼라의 손을 붙잡았다.

“가둬 놓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돼. 난 너랑 진짜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사루비아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날 너한테 줄게. 처음부터 나한테는 너밖에 없었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날 너한테 줄 테니까, 네 마음대로 해도 돼.”

아퀼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래, 눈앞의 이 애가 바로 그가 사랑하는 사루비아였다.

“그런데 자기야.”

철컥-.

갑작스러운 장전 소리가 들리자, 아퀼라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사루비아를 올려다보았다.

사루비아가 익숙한 자세로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너 왜 아까부터 내 몸 만지는 게 자연스럽냐? 분명히 이 몸 주인이 따로 있었을 텐데, 왜 자연스럽냐고.”

…아. 아퀼라는 그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다시금 말하지만 아퀼라는 사루비아가 “왜 네가 불러와 놓고 내 몸에 낯 가리냐고.”의 방향으로 짜증을 낼 거라고 예상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 사루비아가 짜증 내기로 선택한 방향은 “너 이 몸 주인이랑 무슨 사이였냐?”의 방향이었던 것이다.

“XX, 자기야, 진짜 뒤지고 싶어? 대체 누구의 몸을 데려다 날 집어넣어 놓은 건데.”

아퀼라는 지금 사루비아가 자신에게 ‘자기’라는 애칭을 쓰고 있어야 함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왠지 앞으로도 저 애칭은 사루비아가 빡칠 때만 튀어나올 것 같다는 예감에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적응하려고 노력했어. 안 그러면, 네가 불안해할까 봐.”

“아니, XX, 적응을 왜 해. 야, 대체 이 몸 주인 영혼은 어디 갔냐? 그리고 이 몸 주인이랑 적응은 어떤 방식으로 한 건데, 응? 한번 말해 보시지.”

“잠깐, 오해하는 것 같아 해명을 하자면.”

아퀼라가 두 손을 들여 보이며 말했다.

“일단 원래 몸 주인과의 합의가 이루어졌어.”

“뭐?”

“원래 몸 주인도, 자신의 몸에 다른 영혼을 불러 넣는 데 동의했다고.”

“뭔 소리야? 어떤 또라이가 그런 짓에 동의해?”

사루비아가 두 눈을 매섭게 뜨며 아퀼라를 노려보자, 아퀼라는 품 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휙 낚아챈 사루비아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원래의 몸 주인이 너에게 보여 주라고 쓴 편지야. 너에게 부탁하는 글 몇 가지를 적어 놓았어.”

“아니, 대체 어떤 또라이가….”

그러나 그 편지의 내용을 빠르게 흩은 사루비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다시 처음부터 편지를 천천히 읽어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아퀼라.”

“그래.”

사루비아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그가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되겠어. 이 몸의 영혼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고, 내 새로운 몸을 만들어야겠어.”

“…새로운 몸?”

“그래, 이 몸 주인도 좀 미친놈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 일단 새로운 몸은 불가능할까?”

“아니,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지…. 단지 어려울 뿐이지만. 드래곤을 여러 마리 잡아 다시 흑마술로 새로운 인체를 연성한다면….”

“방법이 있구나. 그럼 그렇게 하자.”

아퀼라는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루비아가 그걸 원한다면, 그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알았어, 천천히 할까?”

그 말에 사루비아가 웃는 얼굴로 다시 총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 아직 네가 이 몸에 적응했다는 헛소리를 지껄인 데 화 푼 거 아닌데.”

“사루비아, 다시 한번 설명하자면….”

“설명은 필요 없고, 천천히 하든 빨리 하든 상관은 없는데, 내가 원래 몸으로 되돌아가기 전까지 결혼은 고사하고 손도 못 댈 줄 알아라.”

“…내일 당장 흑마술사한테 의뢰 넣을게.”

총을 들이대고 협박하는 상황임에도, 아퀼라는 사루비아가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사루비아는 지금 무려 질투라는 걸 하고 있었으니까.

“사루비아, 그런데 진짜 가둬 놔도 돼?”

“…야, 너 역시 내가 도망갈까 봐는 그냥 핑계인 거지.”

“글쎄.”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런데 아직 내가 이 몸에 있는 동안 이 몸에 익숙한 티 조금이라도 내면, 바로 탄환 날아가는 거로 알아라.”

그러나 아퀼라는 사루비아의 협박마저도 즐겁게 느껴졌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조금 이상한 감정이었지만, 아퀼라는 정말로 사루비아가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이시나, 아퀼라가 그 주술에 성공한 것 같던데.”

“아.”

이시나는 제대 후 자신이 평화롭게 살던 집에 찾아온 윈터가 꺼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만나러 가지 않겠나?”

“하하, 윈터 님…. 아니, 윈터.”

이제 더 이상 계급이 없다는 걸 상기하고는, 이시나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윈터 너는 ‘그 일’을 준비하느라 지금 바쁜 걸로 아는데.”

“그 일이라면 곧 성공할 수 있을 것 같군. 그 전에 잠깐 시간을 내서 사루비아를 만나고 온다면,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나도 아퀼라가 사루비아를 데려오도록 돕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기는 했지.”

그렇게 말하는 이시나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렇지만 사루비아를 다시 만나러 가는 건 조금 나중으로 미뤄 둬야겠어. 일단 지금은 둘이 막 만났으니까, 당장 보러 가고 싶지는 않네….”

“왜지?”

“걔네들은 쌍으로 미쳐 있어….”

이시나는 지난날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이 정신적으로 나름 강한 사람이라고 자부했지만, 그놈들은 이상한 데에서 이상한 사고방식으로 행동해서 자신의 정신을 괴롭게 만들었다.

“둘 다 그냥 미친놈들이야. 당분간은 그 광기가 절정에 이를 게 분명해…. 제발 미친놈들끼리 평화롭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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