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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1화 (23/233)

조약돌 위에서 쇠구슬을 찾아낸다는 것은 이름만 들어서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 부대에는 조약돌이 넓게 깔린 장소가 있는데, 조약돌의 양이 워낙 많기도 하고 범위도 방대하다.

게다가 조약돌의 사이즈는 쇠구슬과 비슷하고, 에이프릴이 던진 쇠구슬은 약간 녹슬어 있기 때문에 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정도도 똑같다….

‘XX…. 그냥 연병장을 밤새 달리는 게 낫겠다고.’

아르콘의 강한 신체 능력은 힘든 훈련을 이겨내는 것을 도왔지만, 이렇게 쪼그려 앉아서 땅을 샅샅이 뒤지는 일에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쪼그려 앉아 있었더니 몸은 뻐근하고, 돌투성이 땅을 긁어내는 손끝은 얼얼했고, 무엇보다 눈알이 빠질 것 같다. 지금 바닥에 깔린 이것들이 조약돌인지 아니면 내 눈알인지 이제 구분도 되지 않는군.

‘도대체 이게 신병의 적응을 돕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냐고.’

미친X에게 잘못 걸린 불쌍한 신병은 이제 울먹거리는 눈으로 땅바닥을 긁어 대고 있었다.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선임들의 시선은 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 소설에 빙의하고 느낀 거지만….

‘원작 남주들 가오 어쩔 거냐고.’

원작에서 그렇게 가오가 넘쳤던 남주들은, 지금 내 옆에서 함께 땅바닥을 긁고 있었다.

아니, 인간적으로 원작 작가는 로판 남주들에게 어떻게 이런 과거를 부여할 수 있는 거지? 가오가 없잖아, 가오가!

이시나는 늘 그렇듯 성실한 얼굴로 땅바닥을 뒤지고 있었다. 왜 이런 데에서까지 성실한 거지? 아니, 차라리 이럴 때 흑막 성격을 발휘해 주면 안 되는 건가? 역시 흑막이더라도 까마득한 선임인 에이프릴에게는 흑막 짓을 하지 못하는 거겠지?

한편 카론은 정신이 나간 듯 멍한 눈빛을 하고 있길래, 내가 그의 어깨를 잘 다독여 주었다.

아퀼라는 조약돌을 죽여 버릴 것 같은 눈으로 땅바닥을 보고 있었다.

‘보통 로판 남주는 저런 시선을 여주한테 찝쩍대는 귀족 영식에게 보낸다고….’

나는 눈물을 삼키며 열심히 땅바닥을 뒤졌다.

그래, 이럴 시간에 쇠구슬이나 찾아내고 빨리 자자. 피로가 몰려와서 지금 당장 이 돌바닥 위에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우리들의 머리 위로 번쩍 들렸다.

모두가 달빛 아래에서 빛나는 그 손을 쳐다봤다.

쇠구슬이 들려 있었다!

“위, 윈터 님…!”

윈터는 마침내 찾아낸 단 하나의 쇠구슬을 머리 위로 들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냉철해서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윈터! 네가 해낼 줄 알았어!”

“대단해, 윈터!”

그의 동기 알타이르가 감격 어린 눈으로 윈터에게 달려들었다. 또 다른 동기인 유리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달콤한 눈으로 쇠구슬을 쳐다봤다.

‘역시 윈터는 완벽주의자라더니, 이런 일에서도 완벽하구나…!’

우리 알파 소대 안에서, 윈터는 완벽주의자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아니, 알파 소대를 넘어서서, 윈터는 우리 18중대 내에서 유명한 완벽주의자였다.

다른 소대에서도 ‘알파 소대의 다 잘하는 걔’로 윈터를 지칭했고, 중대장도 ‘그… 알파 소대에 검 잘 쓰고 작업 잘하고 훤칠하게 생긴 병사 있지 않나?’ 정도로 윈터를 부르고는 했다.

…물론 그의 실력이 너무 뇌리에 박혀 버린 탓에 윈터는 중대 본부에 자주 끌려가서 작업을 했고, 나에게 ‘군대에서는 중간만 가라.’라는 교훈을 주기는 했지만, 어쨌든….

다 잘하는 그는 마침내 쇠구슬마저 찾아낸 것이었다!

평소에는 딱딱하고 정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만큼은 쇠구슬을 찾아내고도 생색내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나는 다른 선임들과 마찬가지로 감격 어린 눈으로 윈터를 쳐다봤다.

그래, 일반적인 로판 남주의 가오 따위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저게 가오고 간지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귀족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황태자의 정치력?

아니면 깊은 역사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제국에서 가장 높은 가문인 북부 대공의 작위?

혹은 뒷받침해 주는 가문이 없으면서도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젊은 천재 마탑주?

대륙의 유행을 주도하고 대륙에서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유쾌한 상단주의 재력?

지금 나한테 멋있어 보이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니다! 날 설레게 하는 건 조약돌 사이에서 쇠구슬을 찾아내서 이 지옥을 끝낼 수 있는 능력! 이게 바로 로판 남주 후보의 능력이다!

굴착기보다도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 짐승도 이길 수 있는 훌륭한 시력과 감지 능력! 정말 이 순간만큼은 윈터에게 반할 수 있을 것 같다….

“흑흑, 윈터 님 너무 멋있으셔….”

“…멋있다고?”

“하지만 정말 그렇잖아….”

“고작 저런… 저런 것에 멋있어하는 거였어?”

“고작 저런 거라니…. 지금 우리가 잘 수 있는 게 다 누구 덕분인데….”

“…하, 내가 얘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윈터를 칭송하자 아퀼라가 뒷목을 잡고 어이없다는 반응을 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윈터는 누구보다 훌륭한 남주감이었으니까….

* * *

‘진짜 긴 하루였다….’

지옥 같은 하루를 마치고, 나는 유리와 함께 터덜터덜 걸어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레이나는 멘탈이 나간 것 같아 보이는 자신의 동기를 달래 주느라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히 에이프릴이 잠에 들었는지, 숙소 불은 꺼져 있었다.

“사루비아.”

“예, 예?!”

내 자리를 찾아 더듬거리던 나는,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이, 에이프릴의 연녹색 눈동자를 찾아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는 기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오늘 피곤했니?”

“아, 아닙니다!”

“풉, 거짓말하고 있네.”

에이프릴은 어둠 속에서 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꼭 미친 사람 같아서, 나는 긴장한 채 움직이지 못하고 눈알만 조심스럽게 굴렸다.

유리는 나에게 불쌍하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이미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워 있었다. 지금 자기 일 아니라는 거지….

“너 내가 X같지?”

그렇게 묻는 에이프릴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맑고 고왔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물론 그녀는 X같았다. 하지만 상식이라는 게 있다면 그녀가 아무리 X같아도 면전에서 X같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부정하자, 에이프릴은 흥미가 식었다는 듯 웃음을 멈췄다.

“흐음, 그래?”

“네, 절대 아닙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에이프릴의 연녹색 눈이 빛나더니, 이내 그녀가 특유의 높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그리고. 여기서 천사 짓 하다가는 너부터 죽는다, 응?”

“…시정하겠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말을 마치고, 에이프릴은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일단 입에 붙은 시정하겠다는 말을 하기는 했는데, 에이프릴이 대뜸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역시 아직 짬도 안 찼는데 내가 후임들을 챙겨 주려던 건 문제라는 얘기일까?

‘아니면 그냥 싸패라서 누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돕는 꼴을 보면 거슬리는 건가?’

…뭐, 그 말뜻을 알 수는 없었지만, 역시 군대에서는 그냥 생각을 안 하는 게 답인 것 같다. 괜히 이런 걸로 머리 아파하지 말아야지.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나를 괴롭게 만들었던 에이프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도대체 어떻게 사람을 이토록 고생시키고도 죄책감 같은 게 없어 보이는 걸까.’

나도 상등병쯤 되면 저렇게 변해 있을까? 뭐,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만….

‘그런데 상등병까지는 얼마나 남았더라? 3년 5개월?’

XX, 너무 먼 미래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잠이나 자야겠다….

* * *

제대 D-2700일.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고.

이번 92기 신병들은 전신에 화상을 입은 채 죽고야 말았다.

2급 마물 ‘라이디언’은 자신이 죽으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적을 함께 죽이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미처 외우지 못한 신병들이 몸을 피하지 않은 것이었다.

선임들의 지시에 조금이라도 빠르게 움직였다면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신병들이 죽었다는 건, 내가 그토록 챙겨 주려고 노력하던 레이나도 함께 죽었다는 의미였다.

“…아, 미치겠네.”

92기의 전멸 앞에서 내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내가 정 주지 말랬지.”

내 옆에서 유리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무심한 눈동자를 보다가, 이를 악물고 총을 더욱 꽉 쥐었다.

그래, 어차피 후임들 중 누가 죽을지 모르는데, 내가 미리 공들여 챙겨 줘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에이프릴의 말대로, 아껴 준 후임의 죽음을 보게 된다면 나까지 멘탈이 나가서 휘말려 죽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말한 ‘천사 짓 하다가 너까지 죽을 수 있다.’라는 건 그런 뜻일 것이다.

괜히 나까지 휘말리지 말고, 살아서 나가려면 때로는 좀 미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에이프릴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한 건, 후임들이 더 들어오고 난 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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