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뭐, 큰 문제라도 있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그냥 적당히 못 하는 신병들 같았는데, 엄청나게 못 하는 수준인 건가? 아니면 너한테 뭐 실수라도 했어?”
“그런 건 아닌데.”
내가 질문을 다다다 쏟아 내자, 아퀼라는 다시 침묵을 고수하다가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을 꺼냈다.
“신병들 중에 회색 머리 있잖아.”
“아, 저 기억합니다! 그 이름이 뭐였더라….”
“그레이 말이지.”
“아하, 정말 정직한 이름이지 말입니다.”
“어쨌든 그레이, 걔가 왜?”
카론과 내가 번갈아 가며 말하는 것을 듣던 아퀼라가 대답했다.
“눈빛이 건방져.”
“어?”
“물론 군대 X같아서 눈빛 썩어 있는 거야 이해할 수 있지. 하지만 걔는 눈빛이 찝찝해.”
“왜, 너한테 대들 것 같아?”
“미쳤다고 나한테 그러겠어.”
나는 아퀼라의 사나운 눈매와 주황빛 눈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다가 너는 불 속성 오러도 쓰는데 제정신이라면 너한테 대들 리가 없지.
아퀼라가 아무 말 없이 눈을 오른쪽으로 슥 굴렸다.
‘아.’
나는 그 자리에 있는 카론을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이 만만해 보였나 본데.’
카론이 늘 방긋방긋 웃고 다니고 고작 한 기수밖에 차이 나지 않으니, 좀 건방지다면 기수를 먹을 생각을 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고작 한 기수 차이라도 선임은 선임이고, 아무리 멍청해 보이더라도 선임은 선임인 것이다. 군대에서 그레이의 태도는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알았어. 나도 다음에 그 새끼 눈빛이 건방져 보이면 가만 안 둘 거야.”
“네가 뭘 한다고.”
아퀼라가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울 막내는 평생 막내거든! 내가 챙겨 준다고 했잖아. 물론 아무 일도 안 생기면 가장 좋겠지만….”
내가 정확히 그렇게 말한 순간에, 막 건물 안에서 나온 블레어가 우리에게 마구 손짓했다. 그의 손동작은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급박한 상황이 터졌음을 짐작 가능하게 했다.
몇 개월간의 군 생활로 눈치가 생긴 우리는 서둘러 블레어에게로 뛰어갔다.
우리를 부른 블레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벌써부터 불길해지는 얼굴색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다시 한번 내 세계가 로판이 아닌 것에 대해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블레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으니까.
“비상! 에이프릴 님이 신병 위로 본인 밑으로 집합시키셨어!”
XX,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 엄청난 일이 터졌다는 건 알겠다. 그냥 차라리 죽여 줘.
* * *
‘XX아, 제발 로판으로 보내 달라고. 집착 남주들도 괜찮으니까, 제발 이 세계 좀 탈출하게 해 주라. 내가 취향을 바꿔서 집착을 좀 즐겨 볼 자신 있다고….’
블레임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에, 나는 도대체 이 빌어먹을 세계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고민했다.
아니, 상식적으로 사루비아라는 이름에, 코랄빛 머리카락에 금색 눈의 외모는 누가 봐도 로판식 이름과 외모 아닌가?
아르콘이라는 민족과 마물이 등장하는 세계관도 전형적인 판타지스러웠고.
거기다가 아퀼라나 윈터의 저 얼굴과 능력과 몸을 보아라. 저건 누가 봐도 남주 재질이었다.
‘그런데 왜 이 세계에 현실 군대를 적용하냐고?!’
심지어 최신 군대도 아니고, 온갖 폭력과 공포가 난무하는 이 군대는 쌍팔년도식 군대일 것이다.
‘XX, 집합이라니.’
집합, 단언컨대 그건 이 X같은 군대 문화 중에서도 최악이다. 그건 모든 내리갈굼의 시발점이었으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게 바로….
‘네 위로 내 밑으로 다 집합.’
이건 실수한 당사자나 훈련병들의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까마득한 고참부터 차례로 털어 버리겠다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당사자로 하여금 정말 탈영하고 싶게 만들지.
‘도대체 신병이 무슨 실수를 저지른 거지?’
심지어 사람 미치게 하기의 전문가 에이프릴이 건 집합이라니, 벌써 나까지 탈영하고 싶어졌다.
이놈의 군대는 선임이 문제 있든 후임이 문제 있든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날이 없다, XX.
선임들이 일렬로 서 있는 그 공간에 들어간 순간, 나는 그 공기를 느끼자마자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공기부터 다르다…!’
숨이 턱 막혀오는 이 싸늘한 공기! 윈터가 얼음 속성 오러를 두른다 해도 이 정도로 기온이 낮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나 제발 구원하소서….’
내가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선임들 틈에 섞여 일렬로 섰을 때, 그들의 표정에는 모두 왜 자신들이 이러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과연 신병들 중 어떤 놈이 사고를 친 걸까.’
신병들 네 명의 얼굴에는 모두 긴장이 가득해서 주범을 찾아내는 건 어려워 보였지만, 부대원들을 집합시킨 에이프릴의 시선이 향한 곳을 확인하면 금방 원인을 알아낼 수 있었다.
예쁜 미소를 유지하면서, 에이프릴은 아퀼라가 ‘눈빛이 건방지다’고 말했던 그레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XX, 역시 관상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이 숨이 턱턱 막혀오는 공기 속에서 몸을 굳히고 있을 때, 마침내 에이프릴의 입이 열렸다. 그녀가 봄을 닮은 연녹색 눈을 곱게 휘며, 이른바 ‘악마의 미소’로 웃었다.
“아까 했던 말 다시 해 봐, 신병.”
“…아닙니다.”
그레이가 어쩐지 시건방진 말투로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선임들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으며 에이프릴의 기분을 살피기 시작했다.
“야, 아니긴 뭘 아니야? 말하라고 하셨는데 뒤질래?”
“내가 너한테 입 열라고 했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네 이름을 ‘신병’으로 개명한 거야?”
레온은 그레이를 향해 거칠게 말을 던졌지만 에이프릴의 핀잔으로 인해 곧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고.
그레이는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도 일이 커졌다는 걸 느꼈는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응, 그래. 신병, 아까 네가 뭐라고 말했더라?”
‘…지금 겨울이었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게 체감된다니,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다.
“저,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자존심을 지키는 듯했던 그레이가 마침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도 더 이상은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네가 뭐라고 말했는지 다시 네 입으로 말해 보라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대충 감이 온다.
에이프릴의 얼굴만 보고 만만하게 본 그레이가, 에이프릴에게 싸가지 없는 말을 한 게 분명하다, XX.
‘여기서 사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다가는 뒤통수 제대로 맞는다고,’
“휴, 어쩔 수 없네. 네가 뭐라고 했는지 네 입으로 다시 말하기 전까지, 네 선임들이 대신 연병장을 돌아 줘야겠다.”
에이프릴이 그렇게 말하며 맞후임 루이즈의 어깨 위에 손을 탁 올려 보였다.
늘 차분한 루이즈마저 그레이를 향해 썩은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레이는 결국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 저, 제가… 에이프릴 님 동기 분들은 에이프릴 님보다 약해서 전부 죽은 거냐고 물었습니다….”
동시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미, 미쳤나?’
첫째로, 막 입대한 신병에 불과한 그레이가 상등병 중 최고참 기수인 에이프릴에게 감히 질문을 막 했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나 때는 에이프릴이랑 감히 먼저 눈도 못 마주쳤는데, 저런 개념 없는 놈이 존재하다니.’
둘째로, 저건 에이프릴의 능력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만만하게 생긴 여자인 에이프릴보다 약할 정도면, 에이프릴의 동기들은 얼마나 약했냐는 조롱이었겠지.
셋째로….
‘약해서 죽은 게 아니었다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부대원들은, 대부분 죽은 동기가 한 명 이상 있으며 그게 아니라도 죽어 버린 맞선임이나 맞후임이 존재했다.
부대원들 모두가 죽은 동료를 마음 한구석에 품고 그들의 몫까지 살아남아 제대하겠다고 다짐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레이의 말은 모든 부대원들로 하여금 분노 그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미친….”
플라토가 드물게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짓씹듯 말했다.
‘플라토는 동기들 여섯 명이 전부 죽었다고 했지.’
“…대가리에 하자가 있냐?”
“이따 보자.”
원래부터 거친 레온과 브레이브도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고.
“…교육을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군.”
늘 과묵한 루이즈도 이번만큼은 단단히 결심한 기색이었다.
“휴, 하긴. 신병이 무슨 잘못이 있겠니. 아직 부대 적응도 다 못 했을 텐데.”
다른 부대원들이 분노하든 말든, 에이프릴이 연기하는 듯 뻔뻔한 말투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에이프릴이 말을 할수록, 방 안의 공기도 1도씩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건 다 신병이 부대에 잘 적응하도록 돕지 못한 너희들 탓이지….”
‘XX.’
벌써 불길해진다. 벌써 불길해진다고!
“어쩔 수가 없다, 얘들아. 너희들은 할 수 있어!”
다시 한번 말한다. 에이프릴은 미친X이다.
나는 에이프릴이 후임들의 실수를 봤을 때 차라리 그 후임을 몇 대 쥐어 패고 말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녀는 절대 후임들을 때리지 않는다.
대신 저 미친X은 온갖 해괴한 방법으로 사람을 괴롭게 만들었다.
“얘들아, 좀 더 힘을 내! 너희들은 할 수 있어!”
그리하여 우리는 이 한밤중에 달빛에 반짝이는 조약돌 위에서 땅을 샅샅이 긁고 있었다.
그렇다. 이건 그녀가 애용하는 사람 고문 방법 중 하나인, ‘조약돌 위에 쇠구슬 던지고 찾게 시키기’이다.
‘도대체 신은 왜 저 미친X에게 창의성까지 준 걸까.’
그녀의 미친 성격에 창의성까지 합쳐지니, 그녀는 온갖 창의적인 방향으로 미친 짓들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박하게 선임을 엿 먹이는 후임, 창의적으로 후임을 갈구는 선임.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걸까….
역시 어느 쪽이든 그냥 탈영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