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 전개가 맞겠지? 윈터가 이유 없이 자꾸 나한테 눈길이 가서, 나를 점점 도와주다 끝내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 사랑에 빠지는 전개가 틀림없어!’
나는 잔뜩 기대를 담아 윈터를 바라보았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상등병이 됐을 때 무능한 애들을 관리하게 되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딱 봤을 때… 재능이 뭘지 짐작하는 건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럼 그렇지, 로판은 무슨.
혹시 내 인생에 로판 전개가 시작되면서 이 지긋지긋한 현실 군대가 원작 여주 달린 스타일의 로판 군대로 바뀔 걸 기대했는데, 어림도 없었나 보다, XX.
그때, 아퀼라가 스스로의 오러에서 발생한 열기 때문에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아 내며 내게로 걸어왔다.
“사루비아.”
“수고했어, 아퀼라!”
“잠깐 와 봐.”
“왜?”
내가 아퀼라를 따라 총총 걸어가자, 윈터와 알타이르와 좀 멀어진 뒤에야 아퀼라가 입을 열었다.
“카론 좀 챙겨 줘. 돌에 긁힌 모양이더라.”
“뭐? 우리 막내가 다쳤다고?”
세상에! 나는 저 멀리 있는 카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카론에게로 달려갔다.
‘그나저나 아퀼라 얘도 이제는 카론을 잘 챙긴단 말이야.’
음, 참 잘된 일이었다!
* * *
사루비아가 저 멀리서 카론을 붙들고 있는 사이, 그 뒷모습을 보며 알타이르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윈터에게 말했다.
“야, 진짜 웬일이냐니까~! 네가 후임한테 관심을 다 가지고?”
“관심은….”
“아, 알지. 원래 너는 모든 부대원들을 꼼꼼히 본다는 거~.”
알타이르가 윈터의 대답을 끊어 놓고는 다시 물었다.
“내 말은, 넌 원래 모든 부대원들을 살피는 완벽주의자이긴 하지만 그거 절대로 티 안 내잖아. 웬일로 쟤한테는 총 쏘라고 먼저 충고해 준 건데? 너 털릴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검 계속 쓰게 내버려 뒀으면 그대로 죽었을 거니까.”
알타이르의 유도 심문에 윈터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알타이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사루비아 쟤를 유난히 관찰한 거 아는데 왜 발뺌이야? 야, 우리끼리니깐 솔직히 얘기해 봐. 우리가 몇 년 지기인데 이 정도는 얘기해 줄 수 있는 거 아니냐?”
그 말에 윈터는 한참 동안 주저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눈빛.”
“응? 눈빛?”
“눈빛이 다른 후임들과 달랐어.”
윈터는 자신을 쳐다보던 사루비아의 눈빛을 떠올렸다.
보통 윈터의 후임들은 그를 두려워하거나 어색해했다. 윈터가 먼저 말이라도 걸면,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사루비아는 달랐다.
가끔 윈터가 땀을 흘리며 훈련을 하거나 선임들에게 기합을 받을 때 사루비아는 어쩐지 그를 어이없게 여기는 것도 같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쳐다봤던 것이다.
모든 일에 기민한 윈터가 그 표정을 놓칠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다소 당돌한 타입 같더군.”
윈터는 사루비아가 선임들을 전혀 어렵게 여기지 않는, 혹은 모든 일에 겁이 없는 타입이라고 추측했다.
그 눈빛이 신경 쓰여서라도 저절로 사루비아에게 눈길이 가는 건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윈터는 사루비아의 재능을 발굴해 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됐으려나.”
“음, 그래…. 일단은 뭐, 알겠어!”
쾌활하게 대답하는 알타이르를 흘끗 본 윈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너 본론은 이거 아니잖아. 본론이 뭔데?”
“아, 본론~ 그렇지.”
진지한 표정으로 돌변한 알타이르가 중얼거렸다.
“…사루비아 쟤 아까 총 쏠 때 눈깔 좀 돌아 있지 않았냐? 나 저 눈빛 에이프릴 님한테서 매일 보는 건데.”
윈터는 침묵했다.
그의 머릿속에 총을 들고 있던 사루비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알타이르가 꽤 적절한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다.
사루비아의 노란 눈은 평소에는 부드럽고 달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총을 들었을 때는 당장 마물을 모조리 죽여 버릴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나날이 미쳐 가는 거 같긴 하더군….”
“봐봐, 그렇다니까? 내 후임이긴 하지만, 저런 애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늘 조심해야 돼….”
그렇게 말하는 알타이르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총을 들라고 조언하는 데에서 사루비아에 대한 관찰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윈터는 왠지 앞으로도 사루비아를 주시해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다.
* * *
제대 D-2739일.
그 후로 군 생활은 꽤 순탄하게 풀려 갔다.
물론 ‘군 생활’과 ‘순탄’이라는 단어가 공존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 근래의 일상 정도면 썩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2급에서 3급 사이의 마물들과 싸우고, 누가 실수하면 연대책임으로 함께 구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훈련하고, 거기다가 온갖 잡일까지 도맡는 평범한 일상.
물론 얼마 전에는 내 선임인 84기 캐논이 2급 마물에 의해 사망했지만, 여기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5개월 동안 한 명 죽은 거면 양호하기도 했고.
“카론, 오늘 너 후임 들어오는 날인 거 알지?”
“앗, 이제 기억났습니다!”
“아유, 울 막내는 평생 막내일 줄 알았는데. 세상에, 3개월이 벌써 지나다니….”
카론이 입대한 지 벌써 3개월. 그동안 죽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은 카론이 첫 후임을 받게 되는 날이었다.
‘과연 얘가 선임답게 행동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늘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카론이 후임들 앞이라고 위엄 있는 척할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뭐 내가 카론을 잘 챙겨 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다.
“자, 오늘은 한 시간 휴식한다! 부대 일 다 끝났으면 그동안 알아서 쉬어라!”
연병장 오십 바퀴를 돌고 나서 떨어진 루이즈의 휴식 명령에, 나는 피 맛이 나는 목구멍으로 물을 가득 흘려보낸 후 물에 젖어 흥건한 입가를 슥 닦았다.
“신병 오는 날이라서 쉬나 보네.”
한 시간의 휴식이라니,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 지옥 같은 국경방위군에서는 이마저도 간절했다. 나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숙소로 향했다.
“우리 남은 빨래는 없었고, 훈련장 청소는 다 되어 있냐?”
“아, 블레어 님. 다 되어 있습니다!”
“그래? 그럼 정말 쉴 수 있겠네.”
평소에 늘 후임들을 갈구던 인성 파탄 훈련병 블레어도 남은 할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인성은 해야 할 일의 강도와 반비례하는 게 틀림없다.
‘낮잠! 낮잠 자야지.’
이 빡센 훈련으로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낮잠으로 치유해야겠다.
들뜬 표정을 감추려 노력하며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안에는 처음 보는 여자애 한 명이 있었다.
“…어?”
“사루비아, 걔 신병이거든? 네가 짐 정리 좀 도와주고, 사이즈 맞는 옷 좀 갖다 줘.”
“…아! 네, 알겠습니다!”
여자 신병이었다!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내려 묶은 신병은, 부대의 분위기에 겁을 먹었는지 눈은 촉촉했고 몸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신병, 이름이 뭐니?”
“레, 레이나입니다!”
“그래? 반가워, 레이나. 나는 사루비아라고 하고, 너보다 두 기수 위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레이나에게 한 손을 내밀어 보였다. 레이나는 긴장감이 명백하게 보이는 몸짓으로 어색하게 악수했다.
“네 자리는 내 왼쪽을 쓰면 돼. 옷 사이즈는 나랑 비슷한 정도면 될까?”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생필품도 챙겨 줄게. 조금만 기다려.”
여자 신병이 들어왔다는 생각에, 나는 꽤 들떠 있었다. 이 부대엔 여자가 너무 적었다!
여자 숙소에서는 아직도 막내라는 사실은 상당히 불편하다. 늘 숙소 안의 잡심부름은 내 몫이니까.
‘그래도 후임인데 내가 잘 챙겨 줘야지.’
내가 조금의 귀찮은 기색도 없이 후임에게 이것저것 챙겨 주고 있을 때, 유리가 나에게 손짓했다. 불만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유리 님?”
“사루비아, 조심해.”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온 유리는, 이 모든 상황이 피곤하고 귀찮다는 말투였다.
“내가 말했잖아. 괜히 정 붙이지 말라고.”
“아, 그래도…. 제가 잘 챙겨 주면….”
“네 맞후임 걔 한 명 챙기기도 버거울 텐데 또 누굴 챙기려고.”
유리가 냉소적인 표정으로 내 대답을 칼같이 끊어 냈다.
유리는 아직도 카론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카론이 나와 아퀼라 덕분에 살아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 붙이지 말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지켜봐. 확신이 들 때까지는 곧 죽을 애라고 생각하라고.”
나는 자신의 자리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에이프릴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일단 명심하겠습니다.”
유리한테는 그렇게 말했지만, 난 레이나라는 저 후임에게 정말로 서먹서먹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우리는 애초에 모두 강한 종족이니까, 노력만 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정확히 일주일 후, 나는 후임이 더 늘어날수록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군대에 적응한 선임들과 달리, 아직 적응하지 않은 후임들이 더 들어온다. 그것은 내게 있어 연대 책임을 질 부대원들이 늘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일주일간의 신병 훈련이 끝나고, 신병들도 이제 우리와 함께 훈련을 하게 되었다.
이번 신병은 총 네 명.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닌, 평범한 숫자라고 했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
그리고 신병들이 훈련에서 낙오할 때마다, 우리는 함께 개고생을 하고 있었다.
‘XX, 도저히 쟤네들을 챙길 여력이 없군.’
나도 훈련을 따라가기 벅찬데, 특별히 신병들을 챙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편 레이나는 실력이 특별히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비상한 머리와 빠른 몸놀림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여전히 그녀에게 회의적이었다. 몇 번 토벌을 나가고도 살아남기 전까지는 인정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아냐, 그래도 레이나는 열심히 하는 편이니깐 살 수 있을 거야…. 맞아, 살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결국 처음의 다짐과는 달리 나는 레이나를 적극적으로 도울 수 없었고, 레이나가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할 수 없었다.
“요즘 분위기… 정말 별로인 것 같습니다.”
내가 한숨을 쉬는 모습에서 무언가 느낀 바가 있었는지, 함께 연병장의 잡초를 뽑다 말고 카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이시나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원래 신병들이 처음 적응할 때는 그래. 당사자는 못 느끼지만, 너희가 훈련을 시작했을 초반에는 저런 분위기였을 거야.”
‘어떻게 저렇게 평온할 수가 있지…?’
역시 ‘겉으로는 다정’ 캐릭터를 맡고 있는 사람다웠다. 연대책임을 져도 누군가를 탓하지 않는다니, 나도 이시나의 저런 태도를 배워야겠다.
‘아냐, 혹시 속으로는 신병들을 몰래 처리해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해 보니까 ‘속으로는 흑막’ 캐릭터인 그의 속내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조금 의심스러운 눈으로 이시나를 쳐다봤다.
한편 원래 신병들은 어수룩한 게 정상이라는 이시나의 말에 카론은 입을 딱 다물었지만, 예상외로 아퀼라가 조용히 말했다.
“전 신병들 별로입니다.”
“뭐? 아퀼라 네가 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퀼라를 바라봤다. 아퀼라는 원래 호불호에 대한 의사 표현이 없는 애였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카론과 이시나도 놀란 눈으로 아퀼라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