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상황이 정리된 뒤. 나는 아퀼라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쫑알거리고 있었다.
“마음이 바뀐 거야?”
“뭐가.”
내가 그의 주황색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으응, 너 원래 카론 챙길 생각은 전혀 없었잖아. 웬일이야?”
평소였다면 일등병들도 너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냐며 아퀼라에게 한 소리 했겠지만, 다들 실수를 잘 하지 않는 아퀼라가 총대를 멨음을 짐작했는지 별소리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인가?’
연대책임으로 다른 놈들까지 터는 대신, 아퀼라 한 명만 털리고 말았으니 일이 작게 끝난 것 같기는 하다.
지금 숙소에 있을 카론은 자신의 실수로 아퀼라가 털렸다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하고 있겠지만.
“…네가 애라면서.”
“응?”
아퀼라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애라고 생각한다면, 나도 그렇게 생각할게.”
“응?”
“그냥 육아 연습한다고 생각하지, 뭐.”
“아퀼라…!”
내가 감동받은 목소리를 내며 양팔을 벌려 그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안 챙기면 죽을 게 보이는데, 뭐 어쩌겠냐.”
“응응, 나 정말 감동받았어.”
그 이후로, 아퀼라는 정말로 카론을 자신이 챙겨야 할 맞후임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원작에서 카론이 아퀼라를 졸졸 따랐던 이유를 알겠군.’
카론에게 있어 그의 맞선임, 아퀼라와 사루비아는 가족 같은 존재였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퀼라를 낯설어하던 카론도, 금방 잘 적응해서 나랑 아퀼라, 이시나의 앞에서는 환하게 웃고는 했다.
카론은 원래부터가 사람을 좋아하고 웃음 많은 성격인데, 국경방위군이라는 공간의 특성 때문에 평소에는 성격을 억눌러야 했으니까.
‘아무리 봐도 후임이라기보다는 개를 키우는 느낌인데….’
* * *
“자, 정기 마물 토벌 나갈 준비한다.”
2주일마다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중대 정기 토벌 시간이 되고, 나는 이제는 익숙해진 손길로 짐을 챙겼다. 정기 마물 토벌은 1박 2일로 이루어지므로 그 모든 상황을 대비하여 짐을 충분히 챙겨야 한다.
하지만 오늘의 내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X같은 대자연, XX….’
아니, 기왕 아르콘이라는 특별한 민족으로 빙의했으면 작가는 좀 아르콘에게 대자연의 날 같은 게 없다는 설정을 넣어 줬으면 안 되는 건가?
내가 빙의한 사루비아의 몸은 그날에 통증이 없는 축복받은 몸이기는 했지만, 추운 산속에서 뒹굴다 보면 없던 통증도 생기기 마련이다.
“분명 여기서 2급 마물 육지 히드라의 흔적이 발견됐는데, 왜 보이지 않는 거지?”
“아무래도 산란기이다 보니 주변 환경에 예민해져서 모습을 감춘 것 같습니다.”
중대장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감마 소대의 지휘사관 하나가 답을 내놓았다.
“흠…. 자네의 말이 맞군. 그렇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나?”
“지금 인간에게 먼저 공격을 가하지는 않으니, 이번 토벌은 취소하고 각 소대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들 성의가 없군…. 중대장은 너희에게 실망했다.”
“…역시 히드라를 끝까지 박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우린 히드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여기서 더 번식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답은 정해져 있었잖아, XX.’
내가 중대장의 말을 들으며 질린 표정을 지었을 때, 마침내 중대장이 각 소대에 명령을 내렸다.
중대장은 육지 히드라의 서식지 근처에서 야영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물론 몬스터의 서식지 근처에서 야영하는 건 스스로 죽여 달라고 하는 바보 같은 행동이었지만, 산란기의 육지 히드라는 모든 위험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해서 결코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들의 서식지 주위에서 야영한다면, 인간들을 공격하는 대신 오히려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지시를 받은 각 소대도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텐트 깔라고 지시하면 되겠습니까?”
“하…. 그럼 자다가 깨서 나올 때까지 너무 오래 걸린다. 히드라는 재빨라서, 그사이에 도망갈 거야.”
“아, 바닥에 천 깔고 재우면 되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해.”
‘XX. 왜 하필 오늘 같은 날에.’
가끔 상황이 급박할 때는 텐트에서 자는 대신 맨땅에 천만 깔고 자야 할 때가 있다. 침낭이 더 따뜻하긴 하지만, 그 안에서 기어 나오려면 불편하니까.
산이기 때문에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오고 등은 딱딱하게 배기기 때문에 인생 최악의 질 낮은 수면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다.
보통 우리는 산에서 구르다 보면 흙으로 엉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때 옆 사람의 성별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자, 본인 불침번 다가왔을 때 바로 일어나는 거 잊지 말고, 이제 다들 들어가서 자라!”
엘리엇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는 이불 역할을 하는 천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갔다.
내 바로 왼쪽에는 아퀼라가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이시나가 있었다. 눕자마자 금세 잠에 든 듯 이시나에게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XX, 탈영하고 싶다. 늘 탈영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더욱 격렬하게 탈영하고 싶다.’
찌르르 아파 오는 아랫배를 부여잡은 채 내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정말 최악의 감각이다.
몸이라도 옆으로 돌려서 웅크리고 싶었지만, 당연하게도 국경방위군에서 잠자는 자세는 정해져 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하늘을 정면으로 보지 않고는 잠이 안 오는 지경에 이르렀지….
“끙….”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꽉 문 채, 어떻게든 고통을 분산시키기 위해 이불 아래에서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때, 내 손에 뜨거운 무언가가 잡혔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꽉 움켜잡았다.
나는 이게 아퀼라의 손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퀼라는 내가 차가운 손으로 그의 손에 매달리자마자 곧장 나보다 큰 손으로 내 두 손을 감싸 잡아 주었다.
“왜.”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그가, 선임들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따뜻해서.”
“그거 말고, 어디 아파?”
어둠 속에서도 아퀼라의 붉은 눈만은 똑바로 보였다.
그가 아무런 표정도 엿보이지 않는 붉은 눈으로 나를 직시하며 내 상태를 정확히 잡아낼 때마다, 가끔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는 했다.
“응.”
“손 잡아 줘?”
아퀼라는 어디가 아프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를 붙잡고 있는 손은 뜨거웠다. 등허리에서 올라오는 바닥의 냉기와, 이불 밖으로 나온 내 목과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공기와는 대비되는 감각이었다.
결국 나는 그의 한 손을 내 아랫배 위로 끌어내렸다.
“아니, 손 말고.”
“얹고 있어?”
“응.”
배 위에 뜨거운 열기가 돌기 시작하자, 곧장 통증도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잘 자.”
“너도.”
우리의 대화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남들이 보면 이상하다고 느낄 사이일지 몰라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동기였고, 서로의 생존만을 바랐으며, 서로의 모든 것이었다.
“…얘들아, 나 안 잔다.”
내 오른쪽에서 뻘쭘한 듯한 이시나의 목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좀 이상해 보였겠군.’
이시나 님, 늘 죄송….
* * *
“육지 히드라 출현! 기상!”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총알 같은 속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상’ 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키는 능력은 다른 부대원들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었다. 군 생활 한 달이면 누구나 갖출 수 있지.
해가 막 떠오르고 있는 새벽이었다. 한쪽에서는 해가 떠오르고 한쪽은 여전히 밤이었기 때문에, 나무로 빽빽한 숲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오묘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아예 밤이 아니라서 시야가 어느 정도 확보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XX, 아무것도 안 보이는 숲속을 회상하자니 PTSD가 올 것 같군….’
“1분대, 2분대! 준비!”
내 손에는 이미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총이 들려 있었다. 이것도 군 생활에 적응한 결과였다.
“으.”
비릿한 뱀의 냄새와도 같은 게 느껴지자, 나는 인상을 쓰면서도 정확한 자세로 총을 쥐었다.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징그럽게 생긴 붉은색 뱀.
원래의 히드라는 물에서 서식하고 지나가는 자리에 독이 남는 탓에 접근이 어려운 1급 마물이지만, 히드라의 변종에 해당하는 ‘육지 히드라’는 다행히도 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단, 잘린 자리에서 두 개의 목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에 주의해야 했다.
“윈터! 아퀼라! 자리 교대해서 중앙으로 서도록!”
아퀼라는 불 속성 오러로 목이 잘린 자리를 지져서 더 이상 목이 자라나지 못하게 할 수 있었고, 윈터는 얼음 속성 오러로 목이 잘린 자리를 얼려서 재생을 막을 수 있다.
“너희가 목을 벤다! 2분대의 인원들은 히드라의 다른 머리들이 윈터와 아퀼라를 공격할 수 없도록 보호하고! 에이프릴! 서포트!”
소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고, 윈터와 아퀼라가 각각 왼쪽과 오른쪽을 맡아 달려 나갔다.
“에잇!”
에이프릴이 식물 속성 오러를 이용해 아퀼라를 공격하려던 머리 중 하나의 방향을 돌려놓음과 동시에, 다른 부대원들도 합세해 아퀼라와 윈터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윈터와 아퀼라 외의 인원들은 머리를 베면 안 되니 방해만 해야 했는데, 이게 더 어려웠다….
“야! 정신 안 차리냐! 머리 베지 말라고!”
한편에서 머리가 하나 베임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바로 두 개의 머리가 솟아났다.
오러를 잘못 다뤄서 머리 두 개가 솟아나게 만든 장본인, 토피오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절절맸다.
“사격수! 눈으로 정확히! 공격!”
이번에는 중대장의 명령이 들렸다.
사격수가 총을 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주변 부대원들은 자연스럽게 몸을 피한 채였다. 흩어지는 탄환에 빗맞을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나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히드라를 향해 총구를 들어 올렸다.
“이런 XX, 너 같은 마물들 때문에 내가 뭔 개고생이냐고.”
아니, 갑자기 생각해 보니까 또 빡치네? 마물만 없었어도 내가 국경방위군에서 이렇게 구르고 있을 일은 없었을 텐데!
총을 쏠 때는 분명히 침착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국경방위군의 생활은 나를 하루하루 빡치게 만들었다.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격발음과 함께, 윈터를 공격하려던 히드라의 머리에 달린 눈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시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머리에 엉망으로 상처를 입은 히드라가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고, 그 틈에 윈터가 빠르게 얼음을 둘러 히드라의 목을 베어 냈다.
“사루비아, 잘했어.”
내 바로 오른쪽에 있던 선임 루이즈가 담담한 목소리로 칭찬해 주었고, 나는 그 말에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 XX, 이렇게 된 김에 다 뒤져라.”
총을 잡으면 잡을수록 마물들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분노를 가득 담아 히드라를 향해 총을 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원들도 히드라에 능숙하게 대처했다.
윈터와 아퀼라가 히드라의 머리들을 베어 냈고, 선임들은 오러를 이용하여 히드라의 머리들이 윈터와 아퀼라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아 냈으며, 나는 총을 쏘면서 히드라의 시력을 잃게 만들거나 때로는 머리를 완전히 관통해서 죽이기도 했다.
쿵-.
마침내 아홉 개의 머리를 모두 잃은 히드라의 몸통이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자, 수고했다! 일등병들! 시체 처리해!”
“사루비아, 그렇게 걱정하더니, 충분히 강해졌는데?”
내 검술 고민을 들어 주었던 알타이르가 씨익 웃어 보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아, 넷슴다.”
조금 전까지 총을 잡고 있었던 탓에 내 손에서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그 열기가 온몸에 퍼진 기분이어서, 어쩐지 이성적인 사고가 안 되는 것 같다.
‘…이거 약간 총을 잡을수록 빡치는 기분인데.’
내 기묘한 눈빛을 본 알타이르가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곧 평소의 웃는 얼굴로 돌아온 후 자신의 동기 윈터에게 손짓했다.
“야, 네가 얘한테 총 잡으라고 충고했다면서?”
“그래.”
“어쩐지, 그럴 줄 알았어~. 저번에 그렇게 훈련할 때 사루비아만 지켜보고 있더니, 웬일로 네가 챙겨 주는 고참 노릇을 하냐?”
‘윈터가 나를 계속 보고 있었다고?’
내 머릿속에서 몇 개월 만에 긍정 회로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거 혹시, 로판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