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저건 뭔데?”
내가 빨래를 한 아름 들고 빨래장에 들어갔을 때, 아퀼라가 내 뒤를 보며 불편한 눈빛을 보냈다.
“응? 왜?”
“아니, 저거 눈빛 좀 보라고.”
카론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빨래장 안에 이미 있던 이시나나 아퀼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카론의 눈은 나한테만 고정되어 있었고.
“저거라니, 너무해! 아직 애잖아.”
“너랑 고작 한 살 차이 나잖아. 그리고 마물이 너보다 어리면 안 죽인대?”
“야! 어쩜 말을 그렇게 해! 애 듣는다!”
내가 아퀼라의 팔을 가볍게 찰싹 치자, 아퀼라는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카론이 듣지 못하도록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쟤 겉으로는 밝은 척해도 엄청 힘들어 한단 말이야. 어젯밤에 몰래 빨래장에서 울고 있길래 내가 달래 줬어.”
“…그렇게 약한 애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왜애~? 저번에는 도와주겠다고 했으면서!”
“하아… 네가 누굴 챙길 여력이나 있….”
아퀼라가 나에게 뭐라 말하려던 그 순간, 빨래장 안으로 85기 훈련병인 블레어와 토피오가 들어왔다.
아퀼라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합 다물었다.
저 두 선임들은 동기라서 서로 닮아 가는 건지, 어쩜 쌍으로 인성이 파탄 났다. 그동안 후임이라고는 고작 이시나와 나, 아퀼라 셋밖에 없었으면서, 후임들을 조금씩 갈궈 대서 늘 주의를 요하는 인물이었다.
“야, XX, 신병은 멀뚱멀뚱 뭐 하는 건데?”
“아, 제가 일 시키겠습니다.”
블레어가 내 뒤에 있는 카론을 보며 눈을 매섭게 뜨자, 카론은 겁을 먹었는지 나한테 몸을 좀 더 가까이 붙였다. 나는 블레어의 눈치를 보며 그에게 빨랫감을 쥐여 주었다.
‘이 새끼들, 진짜 신병한테도 인정머리라는 게 없어요.’
침묵의 빨래는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왜 빨래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거냐고.’
차라리 좀 더럽게 살 것이지, 군대란 곳은 늘 먼지 한 톨 없는 바닥과 얼룩 한 점 없는 빨래를 요구해 댔다. 매일 빨래를 하는데도 이상하게 건조된 빨래는 늘 모자라다.
마침내 모든 빨래가 끝나고, 블레어와 토피오가 먼저 빨래장을 나가자마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빨랫감을 바구니 안에 대충 던져 넣었다.
“이시나 님, 제가 카론 데리고 빨래 널고 오겠습니다.”
“아, 그래? 같이 해도 괜찮은데. 손이 모자라지는 않겠어?”
“제가 가겠습니다.”
아퀼라의 목소리가 곧장 끼어들었다.
“왜? 너까지 올 필요 없는데?”
그러자 아퀼라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힘든 건 싫다고 조를 땐 언제고?”
“그래도 내가 막내 앞에서도 철없게 굴 수는 없잖아.”
“이제 나는 필요가 없다?”
“으응, 언제 내가 말을 그렇게 했어~? 삐졌어?”
내가 빨래 바구니를 내려놓고 아퀼라의 팔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애교 섞인 말투를 하자, 아퀼라는 아까보다는 좀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건 내가 좀 무심하긴 했다.
아퀼라는 내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데에서 내가 살아 있고, 동기가 살아 있고, 자신의 편이 살아 있다는 믿음을 얻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론을 챙겨 주는 거랑은 별개로, 아퀼라 얘도 계속 신경 써야겠군.’
어차피 나는 언제나 아퀼라를 필요로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아퀼라도 알 수 없으니까.
“그럼 같이 가자, 응? 자, 이거 들어 줘.”
내가 빨래 바구니를 앞으로 내밀자 아퀼라는 그제야 흡족한 표정으로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아퀼라의 기분이 좀 괜찮아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우리는 함께 걷다가, 문득 나는 빨래장에 걸레 하나를 두고 왔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아, 걸레 놓고 왔다.”
“가지고 올까?”
“아니야, 내가 가지고 올게! 먼저 가 있어!”
어차피 쟤네들한테는 강제로 둘만 있는 시간을 줘서라도 좀 친해지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아퀼라와 카론이 단둘이 일을 하도록 둔 채, 나는 얼른 빨래장으로 달려갔다.
* * *
“…야.”
멀어지는 사루비아의 모습을 보고 있던 아퀼라가 입을 열었다.
“네, 네?!”
아퀼라의 사나운 눈매에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는 카론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의 동기인 사루비아와 달리 아퀼라는 아까부터 카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으므로 카론이 겁먹을 만했다.
“너 어제 왜 울었냐?”
아퀼라가 꺼낸 질문은 카론이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카론은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다가, 티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족 생각이 났습니다….”
“…돌아가셨다고 했지. 가족에 대한 기억은 있는 모양이네?”
“네,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제 친부모님은 두 분 다 국경방위군에서 장교로 부임하시다가 마물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대신 저를 키워 주신 양부모님이 계십니다. 그분들 생각을 했습니다.”
“슬프겠네.”
아퀼라가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지만, 카론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양부모님은 저를 계속 때리면서 집안일만 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집에 불이 난 겁니다….”
“…사고로 불이 난 거야?”
“예, 맞습니다. 그래서….”
카론이 너무나도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양부모님 아래에서 오래 고생했는데, 왜 제가 직접 불을 지를 생각을 진작에 하지 못했나 후회가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경방위군의 생활이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그래서 울었습니다.”
카론을 보는 아퀼라의 얼굴에 순식간에 경계의 빛이 서렸다. 늘 담담했던 그의 눈빛은 이제 매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진심으로?”
“네, 왜 그러십니까?”
방금 자신이 한 발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대답하는 카론을 보며, 아퀼라는 사루비아가 말했던 ‘카론은 불완전하다’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불완전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 줄 알지 못할 정도로.
‘기억을 잃으면서 윤리도 함께 잃어버린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고작 기억을 잃었다고 저 정도로 윤리까지 잊지는 않겠지…. 아마 그는 원래도 반사회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원래 윤리가 존재했고 사고로 인해 윤리까지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즉, 카론은 원래부터 비윤리적이었던 자신의 사고방식을 ‘기본 상식을 잊어버렸다.’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아직 괜찮아.’
곰곰이 생각하던 아퀼라가 입을 열었다.
“사루비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 질문에 카론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사루비아 님은 너무 좋습니다! 너무 친절하시고 다정하셔서, 꼭 친누나가 있었다면 그런 분이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아퀼라가 카론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방금 네가 한 말, 잘 기억해라.”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카론이 고개를 갸웃할 때, 사루비아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카론의 얼굴이 확 밝아졌고, 아퀼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표정을 풀었다.
사루비아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아퀼라가 속삭였다.
“네 말대로, 쟤를 네 친누나처럼 여겨. 그럼 나도 언제나 너를 도울 테니.”
“네, 알겠습니다…?”
* * *
내가 아퀼라와 카론에게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분위기는 아까보다 풀어져 있었다.
‘아퀼라 얘, 잘 지낼 거면서 이렇게 튕긴다니까.’
나는 고조된 기분으로 빨랫줄에 빨래를 널며 카론에게 집게를 꽂아야 하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자, 이제 다음부터는 혼자서도 할 수 있지?”
“네, 할 수 있습니다!”
카론은 내 시선 아래에서 빨래를 널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탄성을 내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사루비아 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래? 뭔데?”
“저희 부대가 어디에 소속된 겁니까? 소대장님이 말씀해 주셨는데, 아직 외우지 못해서….”
하긴, 우리 부대 소속을 충분히 헷갈릴 만했다. 암기력이 뛰어난 측에 속하는 나도 우리 부대의 소속을 외우는 데 시간이 좀 걸렸으므로.
“자, 우리는 국경방위사령부 제72특공사단 제108산악여단 클레도어산악대대 18중대 알파 소대 소속이야.”
“…잘 못 들었습니다?”
“…그냥 제72특공사단 18중대 알파 소대만 외워 놔.”
“예, 알겠습니다….”
카론이 묘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도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시나로부터 소속 부대의 풀 명칭을 들었을 때 나도 저런 기분이었지.
“그리고 또 궁금한 거 있니?”
“아, 선임 분들을 잘 모르겠어서…. 헷갈립니다.”
“아직 얼굴을 다 못 외웠구나?”
나는 이 부대에 처음 오자마자 다른 일등병들이나 훈련병들 얼굴은 외우지 못했으면서도 ‘폭력과 공포만이 우리 모두를 구원한다’ 교육을 실행하는 상등병들의 얼굴은 기가 막힌 속도로 외웠다. 하지만 카론은 아직 그게 힘든 모양이었다.
“잘 들어 봐.”
“네, 네!”
내가 부대에 적응하기 위해 꼭 필요한 설명을 시작하자, 카론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먼저 69기 에이프릴 님. 상등병들 중 유일한 여자이고 제일 고참이고 식물 속성 오러를 사용하고… 제발 조심해라. 겉모습을 믿지 마. 앞에서 숨소리도 조심하고, 그냥 늘 조심하고 눈에 띄지도 말고. 아니, 그냥 제발 피해!! 그 미친X이 보이는 곳에 서 있지 말란 말이야아악!!”
담담하게 시작했던 내 목소리는 점점 간절해지더니 마지막엔 처절한 비명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아직 에이프릴에 대해 잘 모르는 카론은 의아한 표정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70기, 루이즈 님, 머리가 긴 분이시다. 검술 실력이 아주 뛰어나고 과묵한 편이시지.”
“아하….”
“72기의 레온 님과 브레이브 님. 레온 님은 장난기가 많은 편이고. 브레이브 님은 폭력과 공포 어쩌구의 전문가시지. 두 분 다 건들거리는 태도가 특징인데, 네가 잘못해서는 아니고 원래 그런 태도이시다.”
“아….”
“마지막으로 74기 플라토 님. 상등병 중 기수가 제일 낮아서 제일 바쁘시고 늘 피곤한 상태이시기 때문에 주의해야 돼. 하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음. 다른 상등병 분들에 비하면 가장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지….”
“넷슴다….”
“사실 괜한 걸로 트집 잡으시는 분은 없으니깐…. 아니, 정정할게. 거의 없으니깐. 네 일만 잘하고 실수만 안 하면 될 거야. 물론 실수를 안 할 수 없지만.”
“제 일을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 폭력과 공포만이 우리 모두를 구원한다겠지, 뭐.”
내가 가벼운 태도로 대꾸하자, 카론이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또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 * *
그리고 얼마 후, 우리 모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릎이 저려 왔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야, 검날 다 망가뜨린 새끼 누구냐? 관리 교육 안 받았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은, 내 군 생활에서 최악으로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당연히 들 그 이벤트, ‘집합’이었다….
‘대체 어떤 새끼가 검날 관리를 저따위로 한 거야….’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다가, 어쩐지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카론의 동공이 떨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X됐군….’
그래, 실수하고 털리는 과정은 이 부대의 모든 신병들이 겪게 될 과정이라지만….
‘하지만 얘는 내 맞후임인걸….’
“야, 빨리 자수 안 하냐?”
레온이 건들거리는 목소리로 외치고, 브레이브가 그 옆에서 성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마침내 나는 결심했다.
‘XX, 그냥 내가 털리고 만다….’
그래, 그냥 머리 좀 박든가, 아니면 끝없는 훈련장 청소를 하든가, 깔끔하게 처맞고 말지, 뭐….
내 오른손이 조금씩 들리려는 순간, 나는 내 바로 옆의 인물이 몸을 훅 움직이는 느낌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퀼라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올리고 있었다.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헐.’
놀랍게도, 아퀼라는 그렇게 관심 없어 보였던 카론을 대신하여 자신이 총대를 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