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훈련 빡세네….”
일주일간 지속되는 카론의 신병 훈련을 보며, 옆에서 검을 닦던 이시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그렇습니다.”
내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시나의 말에 동의했다.
“아, 걸레를 놓고 왔네. 나 걸레 좀 챙겨서 올게.”
“네, 알겠습니다.”
이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검을 마저 닦으며 연병장에서 훈련하는 카론 쪽을 흘끗거렸다.
우리 때와 같은 훈련이었지만, 다른 동기들이 없는 탓에 카론은 혼자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잘된 일인지 아니면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다.
혼자 훈련을 받는 건 분명 엄청나게 외롭겠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연대책임을 질 동기들이 없는 건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문득 내 죽어 버린 동기들이 생각나서,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칼, 리니아, 그리고….’
아냐, 괜히 생각하지 말자.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
“왜? 어디 불편해?”
“아, 아니.”
아퀼라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묻길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퀼라는 눈치가 무지하게 좋았으니까.
“아퀼라, 너는 신병 어떻게 생각해?”
“…별로 생각 없는데.”
“에이~. 그래도 네 맞후임이잖아~!”
내가 그의 팔에 내 팔을 두르며 뭐라도 말해 보라고 조르자, 그가 할 말을 고민하는 듯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했다.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빡세게 굴려도?”
“우리 때도 빡세게 구른 건 마찬가지였잖아.”
“으응, 사실 우리 때 드래곤이나 이시나 님 때의 1급 마물이 특별한 케이스였잖아. 원래 첫 토벌부터 1급 마물을 만날 일은 없다고.”
사실 원작에서 아퀼라와 카론은 꽤 친밀한 사이였다.
대부분의 역하렘 소설들이 그렇듯, 달린을 두고 경쟁하는 아퀼라와 윈터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시나야 속으로는 흑막이지만 겉으로는 다정 캐릭터이니깐 겉보기에만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리고 카론만이 유일하게 헤헤 웃는 얼굴로 아퀼라에게 붙어 다녔다.
물론 그건 그가 사랑의 경쟁자라기보다는 달린의 남동생과 비슷한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퀼라의 성격상, 그가 원작의 과거 시점에서 자신의 맞후임인 카론이 죽든 말든 방치했을 리는 없다는 소리다.
“그럼 아퀼라 너는, 네 맞후임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는 거야?”
“우리가 뭘 어떻게 돕겠어.”
“으응~ 글쎄~?”
“…넌 쟤가 살았으면 좋겠어?”
“응, 죽으면 좀 마음 아플 것 같거든.”
“…알았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아퀼라가 두 손을 들어 잔뜩 울상인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양 볼을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닿자 내 얼굴 근육이 저절로 흐물거리며 풀어졌다.
“얘들아, 그런데….”
뒤에서 어느새 돌아온 이시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아퀼라는 빠르게 손을 내렸으며 나는 고개를 원위치 했다.
“너희 그렇게 행동하면 오해를 살 수 있어….”
“아,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내가 어물쩍 넘어가기 위해 헤헤 웃으며 이시나에게 대꾸했고, 이시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루비아. 당연히 너는 그런 뜻 아니었겠지.”
이내 그가 아퀼라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 아퀼라?”
“…넷슴다.”
‘사이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평소에는 아퀼라가 이시나랑 잘 지내서 둘이 꽤 괜찮은 맞선임과 맞후임 관계인 줄 알았는데, 가끔 아퀼라는 이시나를 껄끄러워하는 것도 같다.
‘아, 혹시 이시나 내면의 흑막 성격을 감지한 건가?’
겉으로 보이는 다정한 모습과 다르게 속은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걸지도 모르겠다! 원작 비밀이기는 하지만!
나중에 아퀼라에게 이시나에 대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손에 들려 있던 검을 열심히 닦았다.
* * *
“사루비아, 윈터 어디 갔냐?”
“엘리엇 님 심부름 갔습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이리로 와 봐.”
플라토가 나에게 손짓했고, 나는 최대한 빠르게 그에게로 달려갔다.
플라토의 옆에는 카론이 정자세를 취한 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있었다.
“야, 얘 이제 신병 훈련 일주일 끝나서 슬슬 부대 일 배워야 하거든? 네가 얘 데리고 가서 자기 옷 빠는 방법 알려 줘라.”
“네, 알겠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선임 노릇을 해 보다니, 심장이 떨리기는 한다. 드디어 이 X같은 막내 생활을 탈출하는군. 내가 손짓하자 카론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빨래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녕, 카론. 나는 390기 사루비아야. 네 맞선임이고, 아퀼라랑 동기.”
“아, 안녕하십니까!”
“아퀼라가 누구인지는 알지? 까만 머리에 주황색 눈이고, 저번에 검술 기초 훈련 때 봤겠지만 불 속성 오러 쓰는 애.”
“네, 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걱정했던 카론은 예상외로 대화가 잘 통했다. 내 말에 잘 반응하고 눈을 반짝반짝 뜨는 데다, 갈색 곱슬머리에 갈색 눈까지 고려한다면 좀 귀여운 강아지 같기도 했다.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고는 하지만, 그의 성격이 지나치게 해맑은 것을 제외한다면 딱히 우려되는 점은 없었다.
일단 지금까지 내가 보기에는, 카론은 기본적인 상식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귀여운 애를 대체 선임들은 어떻게 굴릴 수가 있지?’
나는 빨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쳐준 후 카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 생각보다 키가 크네.’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면 손을 위로 뻗어야 한다는 게 당혹스러웠지만, 나는 티 내지 않았다.
내가 머리 위에 손을 얹자 카론은 환한 표정으로 웃었다. 꼭 사람을 전혀 가리지 않는 강아지 같았다.
“요즘 많이 힘들지?”
“으음, 그래도 밖보다 좋습니다.”
돌아온 것은 예상외의 대답이었다.
“…그래?”
“네, 여기는 밥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잘 때도 편하고 따뜻해서 좋습니다!”
‘…얘 노숙이라도 하다 왔나?’
생각보다 카론이 국경방위군 생활을 그렇게 힘들어하는 기색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적어도 탈영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겠군….’
어쨌든 원작에서는 원작 남주4 역할이었으니까, 그도 남주답게 정신적으로는 꽤 강한 애였던 것이다.
나는 카론이 이 생활에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날 밤 빨래장에서 누가 혼자 훌쩍이는 소리를 듣지만 않았다면.
한밤중에 화장실에 갔다 오는 길.
빨래장에서 누군가가 훌쩍이는 소리를 듣게 된 나는 비몽사몽한 눈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카론 같지.’
망할, 역시 기억도 온전치 않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갑자기 낯선 환경에 떨어져 적응해야 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역시 그냥 내가 달래는 게 낫겠다.’
이대로 혼자 울게 내버려 두는 게 어쩌면 카론에게는 더 나은 일일 수도 있다. 카론에게 있어서 나는 부담스러운 선임들 중 한 명일 테니깐.
하지만, 만약 한밤중에 신병이 자리를 비우고 빨래장에서 혼자 질질 짜고 있던 걸 들킨다면….
‘X된다. 다 함께 X된다.’
섬뜩한 느낌이 내 등줄기를 타고 흐름과 동시에,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빨래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 사루비아 님?!”
나를 보고 놀란 카론이 귀신이라도 본 듯이 펄쩍 뛰며 이미 울고 있던 얼굴은 더욱 울상으로 변했다.
“쉿, 조용히 해.”
딸꾹!
카론은 이제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시작했고, 제 입을 스스로 틀어막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이 그의 몸은 계속해서 들썩거렸다.
처음 카론이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그저 카론이 조금 불쌍하고 가여운 정도였고 선임들에게 들키면 망한다는 마음이 더 컸지만, 막상 울고 있는 카론의 모습을 진짜로 보니 내 마음도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카론의 얼굴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눈가와 뺨은 붉게 변해 있었다.
“카론, 이리 와 봐.”
“네, 넷슴다!”
그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내 앞으로 뛰어왔다.
나는 두 팔을 벌려 카론을 꼬옥 껴안아 주었다.
카론은 내가 자신에게 뭐라 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긴장한 기색이었으나, 내가 가만히 그를 안고 있자 곧 몸에 들어간 힘을 푸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체격도 크네.’
내가 카론에게 파묻히는 모양이 됐지만, 어쨌든 나는 그를 계속 안고 있었다.
…그나저나 카론 얘는 스스로의 덩치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건가? 이대로 오래 있다가는 내가 질식사할 것 같은데.
“잠깐만 울고 빨리 그쳐라.”
“아, 킁….”
울고 있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달래려 하면 눈물이 더 나오듯이, 내가 그를 위로함과 동시에 카론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같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킁, 훌쩍….”
“그래, 뭐…. 내가 버티다 보면 힘든 것도 좀 적응된다고 말해 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냐….”
나는 그에게 왜 울고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귓가에서 계속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킁….”
“나한테는 좀 의지해도 돼. 물론 다른 고참들 앞에서 띨띨하게 굴었다간 너는 죽겠지만, 내 앞에서는 좀 실수해도 된다고.”
나는 어린애를 달래듯 그의 등허리를 천천히 토닥였다. 그제야 긴장이 좀 풀렸는지 카론의 울음소리도 점점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아유, 우리 막내, 이제 다 울었어?”
장난스럽게 나온 말이었는데, 카론은 그 말에 정말 놀란 사람처럼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장난을 친 내가 괜히 더 민망해지는 기분에, 나는 카론의 등을 토닥이며 카론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팔을 빼냈다.
‘…아, 맞다.’
원작에서 카론이 사루비아를 자신의 인생에 있어 유일한 가족으로 여겼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애초에 가족이라는 걸 가져 본 적이 없었으니까.
‘많은 아르콘들이 그렇듯이 말이지.’
나는 농담 삼아 카론을 애 취급한 거지만, 실제로 카론이 애 취급 받은 적이 있었을까?
원작의 사루비아가 최소한의 정이라는 걸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면, 그녀는 결코 자신의 맞후임 카론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제 원작 사루비아의 길을 밟아가게 될 것 같고.
“아이고, 울 귀여운 막내.”
나는 그 와중에도 성실하게 카론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거 아무래도 육아물인데.’
카론은 나보다 고작 한 살 어리고 덩치도 나보다 컸지만, 온전치 못한 기억이라든가 늘 해맑은 성격 탓에 나보다 훨씬 어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육아물 중에는 여주인공이 아기가 되는 게 아니라, 여주인공이 어린 아기를 돌보고 사실 그 아기의 아버지였던 냉혈한 공작과 결혼하게 되는 스토리도 있었다.
‘이야, 내가 이런 식으로 육아물 여주인공이 되다니. 하지만 그 육아물을 군대에서 찍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심지어 내가 이렇게 카론을 잘 돌봐 봤자 이 애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남주인공이 되어서 찾아올 일 따위는 없겠지….
군부물에 아포칼립스에 육아물까지 더해지다니, 이 정도면 장르 과부하다….
그 와중에 로맨스는 없는 거 실화냐고.
“우리 막내, 이제 들어가자, 응?”
물론 나는 카론을 계속 돌봐 줄 것이다.
‘아돌브 제국 이 미친놈들은 우리 아르콘들의 인권을 개밥으로 줘 버렸다니까.’
내가 입대하고 느끼게 된 사실은, 이 나라가 멀쩡하게 굴러가는 게 신기하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체계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국방 시스템은 사실 굉장히 엉성한 주먹구구식 운영이다.
이 국가가 제대로 굴러간다는 것에 나는 늘 감탄을 보낸다. 휴, 우리가 단체 파업이라도 하면 이 나라는 그날 부로 끝장이다.
난 속으로 이 엿 같은 국경방위군 시스템에 대해 몇 번이고 불평하며, 울음을 그친 카론을 잘 달랬다.
“막내, 가서 잠 잘 올 것 같아? 응?”
“이… 이제 잘 수 있습니다!”
“으응, 왜냐하면 마물 중에는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는 인간을 잡아가는 놈도 있거든. 우리는 산이라서 마물이랑 가까우니까 얼른 자야 돼.”
“아, 안 믿습니다…!”
하지만 카론의 동공은 정말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어서,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가 근육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풉…! 그래, 들어가서 얼른 자고. 알겠지?”
“알,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자 숙소 안으로 들어갔을 때, 깜깜한 방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루비아, 이제 왔니?”
“화, 화장실 좀 갔다 왔습니다….”
“그래? 그런데 네가 방금 문을 너무 시끄럽게 여는 바람에 내가 잠에서 깼잖아.”
보지 않아도 에이프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저 미친X 또 시작이야….
“머리 박는다, 실시.”
한밤중에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나는 고작 후임 하나 들어왔다고 내 막내 생활이 끝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XX,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