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5화 (17/233)

아, 나는 그녀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사실 이 부대는 여군과 남군이 제대로 나뉘어 있지 않으며 우리는 잠만 따로 자며 늘 함께 훈련이나 일상생활을 했다.

‘그러고 보니 왜 아무도 이 얼굴에 관심이 없었지?’

이 몸에 빙의하고 고아원 생활을 할 때, 나는 매일 거울을 보면서 혼자 감탄하고는 했다. 사루비아는 정말 더럽게 예뻤다.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요정님 같았다.

하지만, 이 국경방위군에 들어온 뒤로 내 얼굴에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 동기들만 내 얼굴에 적응하기 어려워했을 뿐, 선임들은 정말 나를 길가의 돌멩이쯤으로 여겼다.

“이유가 있는 겁니까?”

내 질문에 유리가 어쩐지 비장한 얼굴을 하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는 에이프릴 님이 혼자서 이백 퍼센트 정도 기여하셨지.”

“에, 에이프릴 님 말씀이십니까?”

에이프릴이라 하자면, 우리 부대의 최고의 미친X이 아닌가.

천사 같은 겉모습과 달리, 에이프릴은 후임들을 괴롭게 만드는 데 도가 터 있는 인간이었다.

놀라운 내리갈굼 실력과, 트집 잡기와, 자신의 기분에 따라 후임들 갈구기와….

어쨌든, 그녀가 뭔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을 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다른 여자애들이 고생하든 말든 정말 아무런 걱정도 해 주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 다들 에이프릴 님 덕분에 여성 공포증이 생겼거든….”

“아….”

나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해가 간다….

다른 여자애들을 위해 에이프릴이 노력했던 게 아니라, 그냥 그녀의 미친 짓거리 때문에 다들 여자를 볼 때마다 PTSD를 느끼는 거구나….

“특히 에이프릴 님처럼, 체구가 작고 순한 인상의 여성들을 더욱 무서워하게 됐지….”

“아하, 그래서….”

나는 어두운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나를 보고 숨이 넘어갈 듯이 기겁했다가,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얼굴을 확인한 후에야 한숨을 돌리고는 했던 선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에이프릴 그 인간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되긴 하는군….’

그때, 숙소의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유리와 내가 흠칫 놀라며 그쪽을 쳐다봤다.

“얘들아, 이리 와서 이걸 볼래?”

“넷슴다?”

유리와 나는 그녀가 방긋방긋 웃으며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숙소의 문손잡이를 가리켰다.

“너희는 이게 뭘로 보이니?”

“무… 문손잡이 말씀이십니까?”

“지문이 있잖아, 지문이!”

“아….”

“휴우, 얘들아. 내가 숙소 청결을 깨끗하게 유지하라고 한 걸 귓등으로도 안 들었구나.”

‘아니 XX, 자기가 문손잡이를 잡고 들어왔으니깐 지문이 생기지. 그럼 우리 보고 어쩌라는 거야?’

에이프릴 저건 진짜 미친X이다.

물론 우리의 속마음과 달리 입은 착실히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죄송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응? 머리 박아.”

‘XX.’

유리와 나는 공허한 눈으로 바닥에 머리를 나란히 박으며 생각했다.

‘도대체 저 미친X은 빌런인지 히어로인지 모르겠다….’

* * *

제대 D-2830일.

마침내 내 입대로부터 3개월이 흐르고, 후임이 새로 들어오는 날이 되었다!

“착한 후임이었으면 좋겠다.”

이시나가 내 옆에서 간절히 바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넌 어떠냐는 눈빛으로 아퀼라를 쳐다봤다. 그러자 침묵을 고수하던 아퀼라가 입을 열었다.

“…자기 할 일 알아서 잘 하는 후임이었으면 좋겠어.”

부대 입구로 이동하니, 저 멀리 우리가 타고 왔던 수레가 있었다.

‘으윽, PTSD….’

아직도 그날의 충격과 공포는 잊을 수가 없다, 제길….

한편 신병을 데리고 부대로 온 소대장은 어쩐지 오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시나와 나, 그리고 아퀼라는 연병장의 잔디를 다듬는 척하며 우리의 후임들이 내릴 수레를 몰래 쳐다보았다.

“소대장님, 이제부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플라토가 소대장에게로 걸어가며 말했고, 그러자 소대장이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아, 그 전에 전달 사항이 있다. 일단 이번 기수는 한 명밖에 없는데….”

“예, 중대 본부에서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신병에게 적응 기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너희가 많이 도와줘야 할 거고.”

“무슨 일이십니까? 일단 제가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엘리엇이 수레에 타 있을 신병에게 내리라며 손짓했다.

‘한 명밖에 없는 이번 신병이 바로 카론이겠지.’

나는 두근대는 심정으로 카론이 수레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모든 원작 남주들을 볼 수 있다니.

그러다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잠깐, 카론이 원작에서 그렇게 지나치게 순했던 이유가 뭐였지?’

원작에서 카론은 늘 헤실헤실 웃는 모습으로만 묘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입대하기 전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고 했어.’

그래서 카론은 또래에 비해 기본적인 부분에서 미숙한 경우가 많았고, 그것을 사루비아가 도와주었기 때문에 원작의 카론이 사루비아를 친누나처럼 여겼던 것이었다.

곧, 수레에서 갈색 곱슬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소년이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내렸다.

‘뭐, 뭐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방글방글 웃는 얼굴’이었다.

무엇이 문제냐고?

생각해 보라. 군대에 강제 입대했는데 이 상황이 즐거운 것처럼 방글방글 웃으며 입대하는 신병이 어디 있겠는가?

내 얼굴이 저절로 하얗게 질리고 몸이 오스스 떨려 왔다.

카론의 모습을 본 플라토도 나와 마찬가지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소대장에게 물었다.

“얘, 혹시 미쳤습니까…?”

“얼마 전 사고가 있었다고 인적 사항에 적혀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사리 분별을 좀 못 하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카론은 기억을 날려 먹고 과도하게 순수해진 상태로 군대에 오게 된 것이었다.

내 옆에 있는 이시나와 아퀼라의 얼굴도 나란히 하얗게 질렸으며, 나는 이 세계에 다시 항의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상태로 군대에 와도 되는 거냐? 인권 침해, XX아….

* * *

현재 부대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이번 기수가 한 명인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퀼라와 내 기수는 유독 많은 편이었고, 비록 둘만 살아남았다 해도 그건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국경방위군의 생존율은 워낙 극악했으니까. 따라서 우리 부대는 특별히 인력난을 앓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들어온 한 명의 신병이,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애라면 문제가 좀 생긴다….

“그래, 입대 전 화재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고?”

지휘사관 크리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소대원들은 모두 소대장으로부터 입대 전 일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날 살던 집이 불에 타 있었고, 그 일로 인해 가족들도 모두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기억이 온전치 못한 상태고, 기본적인 상식들도 일부 까먹은 것 같다고 말했다.

“예, 자원입대해서 그냥 들여보내 줬답니다.”

지휘사관 엘리엇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크리스와 엘리엇은 이 소대의 두 명뿐인 지휘사관이었고, 그들은 훈련 등에는 참여하지 않다가 실전 토벌을 나가거나 이렇게 소대에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만 개입하고는 했다.

그리고 크리스는 엘리엇의 ‘자원입대’라는 말에 놀란 것 같았다.

“자원입대?”

“예, 가족도 없고 갈 곳도 없다고 본인이 지원했답니다. 아직 계약 마법이 발현되지 않았는데도 상황이 상황이니 국경방위군 측에서 받아들여 준 모양입니다.”

“에휴….”

카론이 기억이 온전치 못한 상태인데도 이곳까지 오게 된 배경을 이해한 크리스가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래, 답답하겠지. 하지만 난 그것보다도….

‘XX…. 화장실 가고 싶다….’

지휘사관들이 이 상황에 대해 불평하고, 상등병들도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힘없는 후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얌전히 앉아서 그들의 눈치를 보는 일밖에 없었다.

몇 시간째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느라 이미 다리에는 감각이 없었고,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가고 싶다고 말도 못하겠다, XX.

‘아, 탈영하기 좋은 날씨네….’

상등병들이 지휘사관들의 앞에서 열중 쉬엇 자세를 유지하며 한참을 서 있었을 때, 마침내 그들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원래 계획대로 훈련시켜.”

“넷슴다.”

에이프릴은 결연한 눈빛을 해 보였지만, 그녀의 뒤에 선 다른 고참들은 머뭇거리는 얼굴이었다.

“너희 불만 있냐?”

“아닙니다….”

그들은 폭탄 돌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서로 눈치를 봤고, 결국 루이즈가 입을 열었다.

“저, 크리스 님. 원래 예정대로 훈련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기억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좀 여유를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평생 기억 안 돌아오면 어쩔 건데? 너희가 신병 마물한테 죽게 내버려 두고 싶은 거면 그렇게 하면 되지, 뭐~.”

크리스가 별일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대꾸했다.

“나야 뭐 집 갈 사람이니깐 상관없는 일이지만~. 어차피 저 신병, 저 상태로는 내가 보기에 1년 이상 못 버티고 마물한테 죽을 놈이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어쩐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유리는 나한테 그렇게 말했었다. 어차피 이곳에 들어온 여자애들은 대부분 1년을 못 버티고 죽으니 괜히 정 붙이지 않는 게 좋다고.

‘나도 카론이랑 같은 취급 받았잖아.’

앞에서는 빡세게 굴렸지만, 뒤에서는 다들 유리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얼마 못 가 죽을 게 분명하다고.

아까 보았던 카론의 모습에 세 달 전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이면서, 나는 카론에게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기억을 잃은 것도 나랑 비슷하고.’

나도 원래 세계에서의 내 기억을 거의 잃어버렸으니까. 카론도 나처럼 이름만큼은 안 잊어버려서 다행이다.

…생각해 보면 원작에서 카론은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기본적인 상식마저 잊어버리고 공포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카론이 마물에게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가 무력만으로 온전히 헤쳐 나가지도 못할 것 같은 게, 카론은 비교적 어린 편이었다.

보통 열일곱에서 열아홉 사이에 계약 마법이 발동하며 입대하게 되는 것과 달리, 카론은 열여섯에 자원입대를 한 경우였다. 고작 한 살 차이였지만, 카론은 아퀼라에 비해 체격도 작았다.

한마디로, 카론은 강해 보이지도 않았고, 똑똑해 보이지도 않았다는 의미이다.

원작에서 보았던 카론의 대사 하나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루비아 님은, 내 모든 것이었지. 내 인생에서 그분만이 유일한 가족이야.”

다른 세 명의 원작 남주들과 달리, 카론이 사루비아에게 가지고 있었던 감정은 사실 ‘첫사랑’보다는 친누나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다.

…원작의 사루비아가 왜 그렇게 카론을 돌봤는지 알 것 같다.

‘저걸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게 인간이냐, XX.’

기억도 온전치 못한 맞후임이 군대에서 이렇게 개고생하는 걸 어떻게 두고 볼 수 있냐고.

그래서 나는 내 맞후임, 카론의 생존을 돕기로 결심했다.

“저는 신병을 충분히 적응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에이프릴. 이유는?”

“전 비교적 어린 나이에 입대했지만, 충분히 적응해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에 비해 기억이 온전치 못한 경우 정도야, 저희가 충분히 도와서 적응시킬 수 있습니다. 거기다 소대장님께서 적응을 도와주라고 하셨는데, 저희가 명령을 위반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흠…. 에이프릴, 네가 몇 살에 입대했더라?”

“막 열여섯이 되자마자 입대했습니다.”

“네가 보기에는 신병이 잘 적응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지?”

“본인 하기에 달렸겠지만, 일단 최대한 살려 보겠습니다.”

그러니깐 크리스와 에이프릴의 대화를 듣기 전까지는 그렇게 결심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어쩐지 에이프릴, 아까부터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더라. 신병의 어리숙해 보이는 모습에 과거의 자신을 비춰 보며 공감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나저나 막 열여섯이 됐을 때 입대해 적응했다니, 에이프릴도 정말 대단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미안하다, 카론….’

에이프릴이 너를 빡세게 굴리기로 결심했다면… 어떤 강도일지 상상도 할 수가 없구나….

그래, 내가 건방지게 무슨 소리를 한 거냐….

카론 네 생존은 고참들이 잘 도와줄 테니까, 나는 너를 잘 달래 주기나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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