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포칼립스에 육아물까지 더해지면 장르 과부하다
막내 생활은 언제나 X같다.
내가 동기들이 죽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고, 얼마 전에는 주특기를 변경하여 훈련하고 있다고는 해도, 어쨌든 군 생활은 변하지 않고 여전히 탈영하고 싶은 것도 변하지 않는다.
‘마법 때문에 탈영도 못 하지만, XX….’
내가 이 몸에 빙의하고 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실 하나는, 내 이전 생에서의 기억이 온전치 않다는 것이다.
‘가족 생각이라도 나면 곤란하잖아.’
내 이전 삶에 관해 생각나는 것은, 오직 ‘지구’라는 곳이 어떤 환경이었는지에 관한 것과, 내가 빙의한 이 소설, ‘네미집’의 내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원래의 이름 정도.
‘그거라도 생각 나는 게 어디냐.’
만약 이전 세계에서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면, 정말로 이전 세계에서의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원래의 이름은 내게 있어 아주 소중한 기억이었다.
가끔 이 세계가 X같을 때, 자기 전에 원래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잠들 정도로. 물론 이 세계는 매일 X같았다, XX.
“빨래 그게 끝이야?”
“응.”
나는 손에 들려 있던 빨랫감을 아퀼라가 들고 있던 바구니 안에 집어넣었다. 이제 이것들을 널기만 하면 드디어 오늘 치 빨래는 끝이다.
“손.”
그렇게 말하며 나는 찬물에 빨개진 두 손을 아퀼라에게 내밀었다.
아퀼라는 아무 말 없이 내 두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잡았다. 곧장 내 손에 훈훈한 열기가 돌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퀼라는 내가 자신에게 이것저것 조르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얘들아, 빨래 다 했니?”
그때, 빨래장에 이시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빠르게 손을 떼면서 정자세를 취했다.
“…다 했나 보구나?”
늘 다정한 미소를 유지하는 이시나가, 방금 우리가 손을 잡고 있던 모습을 봤는지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미소를 했다.
‘저건 대충 너희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일단 참겠다는 표정이군.’
“네, 다 했습니다.”
“…제 손이 차가워서 그랬습니다.”
나는 그가 우리 사이에 동기애가 아닌 다른 불순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오해하기 전에 빠르게 덧붙였다.
“응, 그래…. 물론 그랬겠지.”
그렇게 말하며 이시나가 녹색 눈으로 아퀼라를 노려봤다. 아퀼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자, 빨래 널러 가자.”
드래곤 토벌 사태가 끝난 지 두 달째. 아퀼라와 나는 그동안 막내 생활을 하며 매일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이곳을 제대할 것을 다짐했고.
그동안 우리의 맞선임, 89기 이시나와는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위 기수인 86기부터 88기까지는 모두 죽어 생존자가 없었고, 85기에 있는 두 명의 선임은 모두 인성이 파탄 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인성이 파탄 난 것은 다 이 X같은 군대 때문일 것이다. 내 입도 나날이 험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아니, 근데 XX, 이 X같은 곳에서 욕을 안 하고 어떻게 버티냐?
어쨌든 원작에서 남주3, 다정 흑막 역할을 맡았던 이시나는 실제로는 정말 좋은 선임이었다.
그가 소설 속에서 여주인공 달린에게 어떠한 꿍꿍이를 품고 있던지 간에, 현실에서 이시나는 꾀부리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하며 후임들을 혼내지도 않고 우리를 늘 도우려 하는 천사 선임일 뿐이니까.
“그러고 보니 너희도 입대한 지 벌써 세 달째네.”
“아, 그렇습니다.”
“요즘 뭐 힘든 건 없니?”
“하하….”
내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다크서클이 가득한 얼굴로 이시나도 나를 보며 하하 웃어 보였다.
그래…. 이시나도 고작 우리보다 한 기수 위인 막내일 뿐인데 힘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군대야 늘 똑같지 말입니다….”
“그렇지….”
이시나와 내가 눈물 젖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아퀼라는 옆에서 묵묵히 빨래를 널었다.
“너희도 이제 곧 후임이 들어오는 거 알고 있니?”
‘아, 드디어.’
그 말에 감동을 먹은 나는 눈물을 흘릴 뻔했고, 웬만해서는 표정 변화가 없는 아퀼라도 드물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미친 ‘네미집’의 군대는 무려 복무 기간이 8년이었고 3개월마다 새로운 병사들을 받았다.
그러니까, 후임이 들어오기까지 우리는 3개월 동안이나 가장 막내 노릇을 해야 했던 것이었다.
“정말, 정말 감동입니다….”
“그래…. 나도 좋은 후임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이시나 님이 생각하시기에 좋은 후임은 어떤 후임입니까?”
“음…. 그거야 분명하지.”
이시나가 초록색 눈을 곱게 휘어 보이며 웃었다.
“능력보다는, 성격이지.”
“하지만 여기서는 능력 없으면 죽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있으면서, 성격이 좋으면 좋겠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 봤자 윈터 님 같은 성격의 후임이 들어온다고 생각해 봐.”
“아….”
나는 저절로 공감하며 입을 끄덕였다.
그래, 쿨민트의 대명사, 원작 남주2, 윈터가 후임으로 들어온다면 상상만 해도 피곤하다. 후임에게 쪼는 선임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그렇지만 사실 나는 내 후임으로 누가 들어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후임들 중 ‘반드시 포함되어 있고 반드시 살아남을 한 명’을 알고 있었다.
원작 남주4, 카론.
카론은 대충 고전적인 네 타입의 남주들 중 ‘귀여운 연하남’을 맡고 있었다.
그는 달린보다 선임인데도 불구하고 늘 애교 많고 귀여운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동시에 달린의 뒤에서는 거칠게 돌변하는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대충 ‘여주 앞에서는 내숭을 떨지만 여주를 건드리면 미친놈이 되는 어쩌구’의 성격인 거다.
‘원작에서 카론이 아퀼라보다 한 기수 아래였으니까.’
카론은 귀엽고 순한 성격이니까, 아마도 이시나가 원하는 ‘좋은 후임’에 가까울 것이다! 그를 다루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을 테니까!
며칠 뒤면 이 X같은 막내 생활에서 벗어날 거라는 생각에, 나는 콧노래까지 반쯤 흥얼거리며 빨래를 널었다. 아퀼라와 이시나는 쟤가 정말 기분이 좋구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 * *
“사루비아, 화장실에 비누 잘 채워져 있니?”
“아, 네! 제가 확인했습니다!”
숙소에 들어서자, 언제나 그렇듯 싸늘한 표정의 유리가 나에게 질문을 해 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유리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리의 싸늘한 태도는 그녀의 기본 태도 같은 거였고. 무엇보다, 이제 유리는 나를 ‘신병’이라고 부르는 대신 ‘사루비아’라고 부르니까!
“야, 사루비아.”
“예?”
웬일로 유리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기에, 나는 눈을 빛내며 유리를 쳐다봤다.
유리의 새까만 눈동자는 평소의 죽은 눈빛 대신에 생기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해 줄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몸을 기울였다.
“너, 그거 아니?”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여기서 왜 네 그 얼굴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