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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3화 (14/233)

* * *

제대 D-2877일.

그날부터 나는 늘 탈영하고만 싶었던 소대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대신 요즘의 고민거리는….

“야! 바로 검술 훈련하러 간다! 다들 일어나!”

레온의 외침에, 우리는 각자의 검을 챙기고 빠르게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요즘 내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바로 생존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살 수 있을까?’

국경방위군에서 생존을 위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시기가 바로 첫 2년이다. 2년이 지나면 웬만해서는 실력이 모자라서 마물에게 죽임당할 일은 없다.

유리는 내가 드래곤으로부터도 살아남았으니 앞으로 마음만 강하게 먹고 열심히 훈련한다면 웬만한 마물에게서는 모두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건 순전한 운이었잖아.’

원작 사루비아도 죽었으니까, 죽음을 피하기 위해 나는 더욱 노력해야만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기적 그 자체였다.

아르콘이기는 하지만, 다른 아르콘 남자 부대원들에 비해 신체적으로 더 약할 수밖에 없다.

나를 제외하고 현재 부대에 살아 있는 여자 부대원들이 둘.

에이프릴. 그녀의 경우에는 식물 속성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천재였고.

유리, 그녀는 나보다 키도 크고 신체적으로 강했으며, 검술 실력도 아주 뛰어났다.

하지만 나는 특별한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신체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뛰어난 것도 아니다.

‘원작을 이용해서 남들보다 마물에 대한 정보를 빨리 외우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소용없어. 결국에는 남들도 다 외우는 거니까.’

XX,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죽는 미래가 더욱 가까워지는 기분인데….

“여어, 사루비아. 뭐 하냐?”

그때, 내 뒤에서 껄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본 내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대답했다.

“알타이르 님?”

현재 일등병 계급인, 78기 알타이르.

파란 머리에 파란 눈을 한, 검술 천재. 나보다 3년 위의 선임인 그는 윈터와 유리와 동기이기도 했다.

정식 기수는 378기이긴 한데, 보통 이 부대에서는 뒤의 두 자리 수만 불러서 그냥 78기로 불렸다. 내 정식 기수도 390기이지만 부대원들은 90기로 불렀고.

그리고 이 부대에서 78기는 특히 눈에 띄는 기수였다.

78기의 윈터, 알타이르, 유리. 얼음 속성 오러에 무엇이든 완벽한 윈터와, 검술 천재 알타이르와, 남자들에게도 결코 뒤처지지 않을 신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리를 묶어 78기는 ‘천재 기수’쯤으로 여겨졌다.

생각해 보면 다들 외모도 쿨하다. 검은 머리에 청회색 눈의 윈터, 파란 머리에 파란 눈의 알타이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유리. 쿨민트 3인방이군.

‘마침 잘됐다.’

천재 78기의 일원인 알타이르를 만난 김에, 조언이나 구해 봐야겠다.

“저, 알타이르 님, 질문이 있습니다.”

“뭔데, 뭔데? 말해 봐.”

쿨한 성격의 윈터와 유리랑 달리, 알타이르는 늘 껄렁한 말투를 쓰지만 붙임성이 좋고 잘 웃는 선임이었다.

“저, 그러니깐… 알타이르 님이 그렇게 강해지신 건, 그냥 부대에서 하는 검술 훈련 덕분이었습니까?”

그만의 특별한 수련 방법이라도 있는지 알기 위해, 내가 그렇게 물었다.

“어. 난 그냥 완전 기본 동작만 했어.”

“정말입니까?”

“그럼 정말이지 구라겠냐? 찌르기, 8방향 베기, 막기… 그런 기본 동작들만 했는데.”

‘이건 뭔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어요 같은 소리야.’

역시 알타이르도 그냥 태어날 때부터 천재였던 걸까? 나는 아연한 눈으로 알타이르의 푸른 눈을 쳐다봤다.

“아, 그런데 그 기본 동작들을 조금 많이 하긴 했어.”

“…훈련을 얼마나 하셨습니까?”

“하루에 8방향 베기를 각각 천 번씩 하고, 찌르기 천 번이랑….”

‘XX. 교과서를 외운 수준이었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에게서 물러났다. 내가 저렇게 훈련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내가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고 했을 때, 알타이르가 말했다.

“너, 강해질 방법을 찾고 있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내 생각에는 윈터가… 아니다.”

“잘못 들었습니다?”

“아냐, 나중에 말해 주겠지. 됐다.”

나에게 가라고 손을 휘휘 젓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결국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한 채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래, 이 빡센 훈련 쫓아가다 보면 언젠가 인간 구실은 하겠지, XX….’

부대의 훈련은 늘 너무 빡세서 문제였으니까.

그래도 혹시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알기 위해, 난 그 이후로도 다양한 부대원들과 상담해 보았다.

“유리 님, 어떻게 해야 강해질 수 있습니까?”

“그냥 검술을 열심히 훈련하면 되잖아?”

“아무리 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일단 한번 보자.”

나는 유리의 앞에서 지금까지 배운 검술을 보여 주었으나, 돌아오는 건 영 시원찮다는 표정뿐이었다.

“사루비아, 너 설마 힘으로 그 통나무 격파 못 하니?”

“히, 힘으로 통나무 격파도 할 수 있는 겁니까?”

“애가 왜 이렇게 약해 빠졌어?”

유리의 그 말에 나는 답답해서 가슴이라도 두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나는 이미 일반적인 성인 남성보다 몇 배는 힘이 강하다.

‘대체 이 인간들은 왜 이리 기준이 높은 거야.’

결국 유리로부터 도움을 얻겠다는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시나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했지만.

“사루비아, 마물의 움직임을 읽어 내는 거야.”

“그걸 어떻게 읽습니까…?”

“으음, 그냥 보이지 않니?”

망할. 역시 흑막캐는 세상을 보는 시선까지도 나와 달랐던 것이었다.

‘대체 마물의 움직임을 어떻게 보는 건데?’

저번부터 느끼는 거지만, 고도로 발달된 판타지 세계관은 사이비 종교와 구별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강해지는 방법에 대한 도움을 받지 못했고, 이 답 없는 훈련만 계속해야 했다.

“넌 지금 그걸 검이라고 휘두르냐? 귀찮아? 팔에 힘이 없어? 진짜 힘없게 만들어 줘?”

‘XX, 탈영하고 싶다….’

나는 반복된 동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팔을 억지로 위로 치켜올리며 기본 동작을 반복했다.

X같은 막내 생활….

“자, 물 마실 시간 5분 준다. 5분 후 다시 훈련 재개한다.”

마침내 휴식 시간을 알리는 말이 떨어지고 상등병들이 모습을 감추자마자, 나는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도 해도 늘지가 않네….”

어느덧 국경방위군 생활 두 달째.

그동안 나는 세 번의 마물 토벌을 나갔지만, 첫 드래곤 사태를 제외하자면 모두 3급 마물이었기 때문에 선임들의 지시만 잘 따르면 내 목은 무사히 붙어 있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계속 이대로 평화로운 날들이 유지될 리는 없고…. 언젠간 2급 마물을 상대할 날이 올 테니 그때까지 실력을 쌓아 둬야 한다.

그때,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던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너.”

“윈터 님?”

윈터가 차가운 청회색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늘어진 자세를 하고 있는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검을 잡을 타입이 아닌데.”

“잘 못 들었습니다?”

내가 어벙한 표정을 지었지만, 윈터는 표정에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고 다시 짤막한 말을 내뱉었다.

“넌 검 말고 다른 무기를 써야 한다고.”

“아, 그 말씀은….”

부대원들 중 검 말고 다른 무기를 쓰는 사람도 꽤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총인데, 지휘사관 엘리엇도 거대한 총을 썼다. 일등병 중에는 캐롯과 엘도 총을 썼고.

혹은 상등병 브레이브처럼 거대한 도끼를 쓰거나, 지휘사관 크리스처럼 기다란 창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건 좀 짬이 쌓였을 때의 얘기이다. 훈련병 시기에 기본으로 배정되는 주특기는 도검이기 때문에, 주야장천 검술만 연습한다.

그리고 이후에 다른 주특기를 선택하는 것도 그 무기를 쓰고 싶다고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 선임들이 판단할 경우에 검에 비해서 훨씬 재능이 있을 경우에만 가능했다.

“하지만 저는 지금 검을 써야 하지 않습니까?”

“시간 낭비야.”

냉철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한 윈터가, 나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뒤를 따랐고, 그는 바로 옆에 있던 사격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마찬가지로 휴식 시간인지 사격장 안에 앉아 있던 일등병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엘, 잠깐 이리 와 보도록.”

“윈터 님?”

현재 일등병이며 윈터보다 기수가 아래인 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품에 있던 총을 소중히 들고 이리로 다가왔다. 그야 무기를 자신의 품에서 떼어놓으면 고참들의 폭력과 공포가 다시 쏟아질 테니까.

“사루비아한테 산탄총 좀 건네줘 봐.”

“아…. 그래도 됩니까?”

“재능이 있어.”

엘은 더 이상 뭐라고 토 달지 않고, 자신의 품에 있던 총을 내게 건네주었다. 워낙 선임들에게 촉망받는 윈터였기에 윗선의 지시를 받았겠거니 하는 표정이었다.

엘이 건네준 총은 나에게는 약간 커 보였다. 나는 긴장으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커다란 총을 받아들었다.

갈색의 몸체를 가진 총은, 막상 들어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가벼웠다.

‘이 시대에는 아직 군용 소총이 보급되지 않았지….’

이 로판 세계관에서 총은 아직 군용으로는 덜 발달되었기도 하고, 오러를 담는 데는 검이 편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르콘들은 검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총이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총을 사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엘처럼.

윈터는 나를 데리고 아까 전 엘이 주저앉아 있던 구석으로 이동했다. 앞에는 사격 연습용으로 보이는 과녁이 놓여 있었다.

“개머리판은 어깨로 가도록 하고, 몸은 앞으로 숙인다. 아니, 그보다 더.”

그는 내가 올바른 자세를 잡도록 도와준 뒤 총알을 장전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 주기까지 했다.

‘도검이 주특기일 텐데, 총 쏘는 법은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역시 매사에 철저한 완벽주의자다웠다. 난 윈터가 도끼와 창과 대포까지 쓸 수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기억력이 좋다고 들었는데, 외울 수 있지?”

“아….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원작을 알고 있던 덕에 마물의 정보를 빨리 외운 게 그렇게 소문이 났나 보다.

그나저나 내가 여기서 진짜 총을 들어도 되는 건가?

원작에서 윈터가 여주인공 달린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혹시 제가 총 쏘면 안 되는 겁니까?”

“그래, 안 돼.”

“히잉, 역시 제가 많이 모자랍니까…?”

“…아니, 총은 위험하다. 널 위해서 해 주는 말이야.”

윈터는 달린이 들고 있던 총을 빼앗아 들고 그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아니, 달린은 그렇게 걱정해 주면서 나한테는 위험하다는 총을 쏘게 시킨다니, 이거 역시 여주와 엑스트라 차별 아니냐.

…물론 원작에서 윈터가 달린을 말린 이유를 알 것 같기는 하다. 그녀는 엄청난 고문관이므로, 그녀에게 총을 들도록 시켰다가는 총기 난사 사고를 일으키고도 남을 것이다….

내가 원작을 회상하고 있을 때, 윈터는 이제 총에 오러를 싣는 일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총알에 오러를 싣는다면 강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그 짧은 틈에 오러를 담는 건 불가능해. 대신 우리는 총기 전체에 오러를 둘러 소리를 차단한다.”

“소리를 차단한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내 귀에는 소음 차단용 귀마개 같은 것도 없긴 했다.

‘총을 쏠 때는 소리가 아주 크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아르콘에게는 귀마개 없이도 소리를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듯했다.

“오러로 총구를 제외한 총기 전체를 둥글게 감싼다고 생각해 보도록.”

“검이 아니어도 오러를 두를 수 있는 겁니까?”

“처음 오러를 다루는 훈련을 할 때 검을 쓰는 건 그게 가장 이미지화가 쉽기 때문이지. 우리는 그 무엇이든 오러를 담아낼 수 있다.”

설명만 들었을 때는 아무런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나는 일단 윈터의 말에 따라 총에 오러를 담는다고 생각해 보았다. 안 되면 폭력과 공포가 나를 구원하겠지, 뭐….

그러나 의외로 산호빛 오러는 내 총에서 바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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