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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2화 (13/233)

“네, 도, 돌아왔습니다!”

“다친 데는 없고?”

“어, 없습니다!”

솔직히 화상을 입은 다리는 쓰라렸고 물을 잔뜩 먹은 탓에 속은 더부룩했지만, 이 상황에서 입을 다물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화상은 부대에서 치료받으면 되겠지, 뭐….

“그래, 됐다.”

지휘사관들도 우리가 나타난 후 한숨 돌리는 듯했다.

어느새 막사에서 나온 중대장과 소대장도 우리를 보며 조금 풀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퀼라, 그리고 사루비아. 우리 알파 소대원들….”

소대장이 왠지 감상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흠흠, 실망을 취소한다.”

중대장은 그렇게 말한 후 뒤를 돌았지만, 어쩐지 그의 뒷모습에서 감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상하다…?’

일단 탈탈 털리고 시작할 줄 알았는데, 그들의 얼굴에 분노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나는 그간 부대 생활을 하면서 어렴풋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머릿속에 구체화해 보았다.

마물을 상대하기 위한 지나치리만큼 고된 훈련과, 부대의 생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각종 잡일들과,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곧장 날아드는 폭력과, 우리가 조금만 불순한 태도를 보여도 도끼눈을 뜨던 공포스러운 선임들.

하지만, 전생의 내가 인터넷에서 보아 왔던 그런 군대 썰들은 없었다.

그러니까, 기묘한 방법으로 괴롭히는 고참들 말이다. 장기자랑을 시킨다든가, 정신적으로 괴롭힌다든가 그런 것들.

이곳에는 명백한 수직 관계가 존재하는 만큼, 그 관계를 악용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들은 없었지.’

이 X같은 부대에 들어오게 된 후, 나는 도대체 왜 로판에 빙의한 내가 군대물을 찍고 있는 건지 납득하지 못하며 이 세계를 계속해서 저주해 왔다.

하지만 이건 어쩌면 군대물보다는….

‘아포칼립스였구나.’

군대는 그저 마물들과 투쟁해야 하는 이종족들이 표면적으로 만들어 낸 장르이고.

실제 나의 삶은 아포칼립스에 가까울 것이다.

이 세계에 빙의한 뒤 몇 번이고 들어 왔던 그 문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폭력만 공포만이 우리 모두를 구원한다.’

그건 국경방위군의 부대원들이 긴 세월을 통해 직접 체득한 교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알파 소대도 이만 철수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크리스!”

중대장의 말에 소대장이 지휘사관 크리스의 이름을 불렀고, 크리스는 소대장의 말에 대답한 후 에이프릴에게 눈짓했다.

그의 신호를 받은 에이프릴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자, 신병들 돌아왔으니 이제 철수 준비한다! 모두 짐 챙겨! 그리고… 신병들, 잠깐 이리 와 봐.”

아퀼라와 나는 에이프릴의 손짓을 따라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부대까지 시체 끌고 가면, 마물들이 피 냄새를 추적해서 쫓아올 수 있다.”

‘아.’

“너희 동기들 시체는 산속에 그대로 묻어 두고 갈 거야.”

“…….”

“마지막 작별 인사 필요하니?”

“…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인사하고 싶습니다.”

“알았다. 윈터! 얘네한테 마지막으로 좀 보여 줘라.”

“네, 알겠습니다.”

윈터가 창백한 느낌이 나는 푸른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고,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곧, 우리 앞에 파인 흙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시신 몇 구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지막 인사해라. 5분 준다.”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들 참혹하게 죽은 탓에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나는 그 틈에서 간신히 칼을 찾아냈고.

그다음으로, 익숙한 회색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리니아….”

너한테 데드 플래그 어쩌구 하는 말을 하며 네 죽음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여긴 너무 현실이었나 봐.’

고작 데드 플래그 좀 피한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네.

“네 몫까지 다 해내고 살아남을게.”

그동안 고마웠어.

아퀼라는 지난 한 달 동안 말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지내던 자신의 동기들의 시신을 바라만 보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미안.”

나는 그의 손을 힘주어 꽉 쥐었다. 언제나 아퀼라의 손은 뜨거웠다.

“다 끝냈냐?”

“네, 그렇습니다.”

“가자.”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내 아포칼립스 세계로.

“…사루비아.”

“예?”

과묵하게 앞장서서 걸어만 가던 윈터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유리가 너랑 할 말이 있다던데, 돌아가면 유리부터 찾아라.”

“아,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리가 윈터랑 동기였던가?’

지난 한 달 동안 여자 숙소의 직속 선임인 유리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할 정도로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나한테 처음으로 말을 걸려 하다니 무슨 일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리고 수고했다. 잘 살아 돌아왔다.”

나는 윈터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외치고 나서 어쩐지 주변이 환해지는 기분이라,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어느덧 아침이 밝아 오는지, 어두운 숲속으로도 주황빛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빽빽한 나무 틈으로는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길었던 밤이 지나고, 다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

쏟아지는 햇빛 아래에서 나는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 우리는 살아 돌아왔다.

* * *

“저, 유리 님….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사루비아.”

내가 유리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자, 유리가 뒤를 돌아보더니 평소의 싸늘한 검은색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느꼈지만 참 매정한 표정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내 얼굴만 가만히 보다가, 유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폭포에서는 어떻게 살아 돌아왔니?”

고작 이런 걸 물으려고 나를 불렀던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대답했다.

“아퀼라가 도와줘서 살 수 있었습니다.”

“…글쎄, 그래도 나는….”

유리가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한테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해.”

“잘 못 들었습니다…?”

유리는 내 반응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종족 여자애는 부대에 들어오기도 전에 많이들 죽어서, 애초에 여자들은 조금 들어와. 그리고 일 년에 두세 명 들어오면, 운이 좋을 경우 그중 절반 정도가 살아남지.”

‘아.’

유리가 한 달 동안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던 이유, 이제 알 것 같다.

“네가 곧 죽을 것 같아서 그동안 정 붙이지 않으려고 했어.”

그녀는 겨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지만, 씁쓸한 표정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와 내 사이의 풀어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에게 무언가 말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에 모든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그녀에 관한 것을 묻는 게 현명하겠지만, 방금까지 엄청난 사건들을 겪었던 탓에 나는 도무지 침착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장 궁금한 것 하나를 그녀에게 묻기로 했다.

“유리 님, 질문이 있습니다.”

유리가 한번 해 보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제가 고아 출신이라 잘 모르는데… 저희끼리는 이종족을 뭐라고 부릅니까?”

비록 제국 사람들이 우리를 이종족이라고 부른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우리 사이에 우리를 칭하는 말이 존재할 것이다.

나는 입대한 후 처음으로 부대원들과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고, 처음으로 ‘우리’가 궁금해졌다.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콘.”

그녀는 그 단어만 말하고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과거 아돌브 제국에 지배당하기 전 우리 민족은 서로 간의 유대감이 없던 탓에 우리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 없었지만…. 우리를 처음 본 제국민들은 우리의 뛰어난 신체 능력을 보고 우리를 두려워했고, 그들의 고대어로 ‘지배자’를 뜻하는 아르콘이라는 단어로 우리를 칭했지.”

그녀가 짧게 덧붙여 말했다.

“지금은 제국 차원에서 금지한 단어라 다들 이종족이라 부르지만, 우리끼리는 그 단어를 쓰거든.”

“아르콘….”

나는 그 단어를 읊조려 보았다.

나는 아르콘이고, 내 앞에 있는 유리도 아르콘이다. 알파 소대, 아니, 18중대, 더 나아가 국경방위군의 부대원들은 모두 아르콘이다.

이 세계에 빙의하고 처음으로 머물렀던 장소가 고아원이라 그런지, 아니면 함께 생사를 넘나들어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아르콘이라는 민족에 대해 기이할 정도로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우린 모두 아르콘이지.”

그렇게 중얼거린 유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사루비아. 나는 유리야.”

처음으로 그녀가 그 이름을 불렀다.

그 손을 마주 잡고 악수하며, 나도 입꼬리만 올려서 웃어 보였다.

“사루비아입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가 이 아포칼립스 세계의 일원이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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