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팔에 뜨거운 것이 와 닿는 감각이 느껴짐과 함께 나는 바닥을 굴렀다.
“아, 아…!”
나는 바닥에 엎드리고 쓰린 팔을 부여잡고 꺽꺽 눈물을 흘리다가 타오르는 불꽃에 뒤덮여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야 말았다.
내 동기, 마그네였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내 뒤에서 리니아가 충격으로 벌벌 떠는 목소리로 현실을 부정하다가 결국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래 봤자 눈을 다쳐서 앞을 못 보는 처지야! 입을 노려!”
“총 들어! 셋, 둘, 하나! 샷!”
“야! 총 똑바로 안 쏴?!”
“후우….”
1분대와 3분대의 사격수들이 동시에 총을 쏴대는 사이, 다른 무기를 사용하는 병사들도 몸을 추슬렀다.
에이프릴을 중심으로 한 선임들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으며, 윈터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드래곤을 상대했다.
쾅-!
윈터가 크게 검을 휘둘렀고, 마침내 드래곤의 몸이 서서히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하아….”
“마무리까지 확인해.”
그리고 모두가 조금 숨을 돌린 바로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드래곤의 두 눈이 번뜩 뜨였다.
크아아아-!
그것의 입에서 다시 거대한 불이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거대한 규모의 불이 화악 하고 퍼지더니 바닥에 쌓인 낙엽에 옮겨붙었다.
지금까지 깜깜하게만 느껴지던 시야가 확 밝아졌다.
윈터는 급하게 차가운 오러 블레이드를 쏘아 보내 불을 껐다.
엘리엇도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곧 드래곤의 입에 거대한 총을 발사해, 그것의 숨을 완전히 끊어 놓았다.
그렇게 모든 일이 잘 수습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아, 아아아악!”
그러나 나는 보았다.
리니아가 있던 자리에 더 이상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야, 사루비아! 너 다리!”
‘뭐지? 진짜 뭐지?’
이상한 것 같다. 왜 이런 일들이 나한테 일어나는 거지? 왜?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맞나?’
연이은 죽음 앞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무력감. 현실 부정과, 무너지기 시작하는 자아.
“아, 흐으, 아…!”
순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 다리에서 느껴져서, 나는 엎드린 채 다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손을 확 떼며 비명을 질렀다.
내 다리에 불꽃이 옮겨붙어 있었다.
“흐으읍, 아, 아아!”
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본능적으로 나는 손끝에 힘을 주어 바닥 위를 긁듯이 기어갔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이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야! 얘 어디 갔어? 오러 비춰 봐!”
물소리가 들렸다.
쏴아아-!
전투하던 내내, 나는 왼편에서 거세게 흐르던 물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계곡, 분명히 계곡이었다.
내 다리를 덮은 불을 꺼 주기 위해 부대원들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나는 반쯤 나간 정신으로 바닥을 기어 계곡에 몸을 집어넣었다.
“흐읍, 헉!”
다리에서 치지직 소리가 나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동시에, 차디찬 계곡물의 감각이 뼛속까지 밀려들어 나는 숨을 헐떡였다.
“후우, 하….”
그저 멍했다. 무언가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 내 귀를 막고 있는 듯 소리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웅웅거리는 감각만 느껴질 뿐이었다.
내 동기들이 다 죽었다고? 정말로?
“야! 빨리 나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물소리가 너무 강했고, 무엇보다도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으며.
…너무 어두웠다. 물속에 들어오기 전 검을 놓친 탓에, 오러도 없는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폐 속으로 계속해서 들어오는 물.
“야, 쟤 아직도 왜 안 나와?!”
“어두운데 물에 들어가게 두면 안 된다고! 빨리 찾아서 데리고 나와!”
“그… 어디 있는지 안 보입니다…! 너무 어두워서!”
“횃불! 전부 횃불 들고 빨리 와 봐!”
거센 물에 둥둥 뜬 채로, 나는 멍하니 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내 뒤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부대원들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지만 정신은 여전히 멍했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점점 몸이 물에 잠겨 가는 채로 나는 팔을 휘젓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강한 힘이 나를 계속해서 뒤로 떠민다.
물살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이 세계는 원래 이런 결말인 걸까?’
그래, 어쩌면 이렇게 모두가 죽음을 맞는 결말인지도 몰라. 여긴 원래 그런 세계일지도 몰라.
거센 물살에 의해 깊이 가라앉은 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그런 세계라면, 이제는 정말로 포기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만할래, 그냥….’
내게는 이 세계에서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살 의지마저 놓아 버리려 했던 바로 그 순간.
뜨거운 무언가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뜨거워.’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차가운 물속에서, 유일하게 뜨거운 것이었다.
그 사람이 손톱을 바짝 세운 탓에 내 손바닥으로 그의 손톱이 깊숙이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뒤에서 내 몸을 강하게 껴안았다. 몸이 뒤에서 강하게 붙들린 탓에, 나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수상 훈련에서 배운 바로 그 자세였다.
콰콰콰콰-!
등 바로 뒤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이제는 그 굉음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내 몸이 부웅 뜨더니 추락하는 감각이 느껴졌다가.
“하아, 하아!”
잠깐 의식을 잃은 것 같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얕은 물가에 누워 있었다.
“안 돼, 죽지 마….”
누군가가 내 심장 부근을 압박하며 그렇게 말했다.
“코, 콜록!”
내 입에서 물과 함께 기침이 튀어나오며 몸이 잠깐 들렸다.
내게 심폐 소생을 시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려 했으나, 물이 들어간 눈이 따가워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가까스로 손을 들어 그 사람의 팔뚝을 붙잡았다. 얼어 죽을 것 같은 기분인데 내가 잡은 그것은 뜨거워서, 저절로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며 손톱이 세워졌다.
“아.”
그리고 나는 내 위에서 날 내려다보던 아퀼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은 물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고, 붉은빛을 띠는 주황색 눈에서는 물일지 눈물일지 모를 것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혈관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찌릿한 감각을 느꼈다. 꼭 그와 내 영혼이 하나로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죽지 마. 너는, 죽지 마. 너만은 살아, 제발.”
내가 처음으로 듣는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아퀼라가 애원하듯이 반복해 말했다.
“콜록! 남아 있, 흡! 있, 있었구나….”
그래, 네가 남아 있었다.
전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있었어.
“나, 나는 그 누구도….”
아퀼라는 말을 더듬어 가며 무언가를 나에게 전하려 했다.
“흡, 콜록! 알아.”
나는 힘겹게 기침하며 그의 말을 끊어 냈다.
듣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지금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완전히 공유할 수 있었다.
“네 생각, 흡! 다 안다고.”
“…더 이상 말하지 마.”
선명한 주홍빛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아퀼라가 손을 뻗었다.
바닥에 누워 있던 내 몸이 그에 의해 똑바로 앉혀졌고, 아퀼라는 내가 고개를 숙이도록 한 후 등가를 두드려 주었다.
“물을 많이 먹었을 거야, 뱉어내.”
“콜록, 콜록!”
기침할 때마다 계속해서 물이 나왔다.
“응, 잘하고 있어. 응.”
고작 물을 뱉어내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퀼라는 계속해서 내 귓가에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마침내 더 이상 속에서 나오는 것이 없었을 때, 그제야 나는 젖은 몸으로 인한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빌어먹게 추웠다. 몸이 덜덜 떨렸다. 뇌까지 함께 얼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나는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나 추워.”
그건 그저 본능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내 손에 닿은 그의 몸은 뜨거웠으니까.
“안아 줘.”
“응, 그래, 내가 뭐든 다 해 줄게, 내가 다 해 줄 수 있어.”
나는 그를 향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제발 살아, 넌 살기만 하면 돼….”
아퀼라가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힘으로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손에 한껏 힘을 주어 그의 등을 붙들었다.
아까 계곡물 속에서 그가 얼마나 내 손을 강하게 붙들었는지, 손바닥의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어 따끔거렸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살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든 너는 살릴 거야. 앞으로 너는 절대 안 죽어. 너만은 내가 살릴 거야….”
아퀼라가 나를 끌어안은 채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젖은 옷, 젖은 몸.
한껏 끌어안은 탓에 서로의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로맨틱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건 로판이 아니었다.
우리는 살고 싶었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이곳에서 끝까지 정신을 붙잡고 살아 있기 위해, 역설적으로 상대방을 살려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서로를 껴안았다.
그 무엇보다도 뜨거우면서 건조한 포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