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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9화 (10/233)

“아, 아아….”

다시 한번 확인해 봐도 칼이 죽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

“사루비아! 정신 차려!”

내 몸이 강하게 뒤로 잡아당겨졌고, 정신을 차리고 정면을 보니 내 앞에 선 플라토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젠장!”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거대한 드래곤.

1분대 사이의 공간을 뚫고 다가온 그것이 입에 무언가를 문 채 맹렬하게 몸을 흔들고 있었고.

크아아아아-!

드래곤이 강렬하게 포효했다.

“2분대! 바로 전투 들어간다! 1분대는 2분대 후방에서 재정비해! 얼른!”

“도대체! 뭐가 이렇게 딱딱해!”

검에 오러를 두른 채 플라토가 드래곤의 왼 다리를, 유리가 드래곤의 오른 다리를 베려 하고 있었지만 드래곤의 몸은 얼마나 딱딱한지 검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드래곤이 머리를 숙여 플라토를 그대로 입속으로 집어넣으려 했지만, 플라토는 검으로 간신히 드래곤의 입을 막아 내며 몸을 피했다.

검으로 인해 입을 다친 듯한 드래곤이 다시 한번 맹렬하게 울부짖었다.

“아….”

그동안에도, 나는 방금 보았던 끔찍한 광경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정신 차려! 드래곤의 표면은 딱딱해서 검이 먹히지 않지만, 눈과 입속 피부는 약하다! 그곳을 노려!”

소대장의 목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왔다.

드래곤의 표면을 향해 휘두르는 그들의 검은 전혀 먹히지 않았지만, 그들은 딱딱한 바위 같은 피부에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18중대원들! 다들 침착함을 유지하도록!”

“야! 마을로 보내면 진짜 우린 다 뒤진다고! 저번에 옆 중대 얼마나 깨졌는지 기억 안 나냐?!”

그래야 마을로 향하고 있는 드래곤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으므로.

‘도대체 왜… 갑자기….’

그때 내 머릿속에 원작에서 봤던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원작에서도 여주는 블랙 드래곤을 만난 적이 있다. 보통 로판에서는 인간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긴 세월을 살아왔고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드래곤은, 이 로판에서는 처치해야 할 마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로판과 마찬가지로 드래곤이 엄청나게 강한 존재라는 건 다르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8년의 복무 기간 동안 볼 일이 없는 드래곤. 그러나 여주 달린은 무려 그 드래곤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블랙 드래곤을 상대했고.

그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아퀼라나 윈터, 이시나 같은 원작 남주들은 드래곤을 두 번이나 상대했다는 뜻이다.

“꺄악! 드, 드래곤!”

그래, 원작에서도 여주가 그렇게 비명을 지를 때… 그 드래곤을 어떻게 처치했지?

“아, 윈터.”

분명 원작에서는 윈터가 얼음의 오러를 담은 검으로 드래곤을 베었다.

다른 부대원들과 달리 얼음 속성을 가진 그의 오러 블레이드는 드래곤에게 유효한 공격을 먹일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아퀼라가 불의 오러가 담긴 검으로 드래곤을 공격했고….

마지막에는 이시나가 총을 쐈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루비아, 정신 차리라고!”

“아…!”

그제야 나는 회상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조금씩 현실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멍하니 있는 동안 리니아가 나를 보호하고 있었던 듯, 리니아는 내 팔을 강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가 칼의 오른쪽 위치니, 칼의 죽음으로 비워진 자리를 그가 메꾼 것 같았다.

‘칼의 죽음…?’

문득 그 단어를 떠올린 나는 토악질이 나는 기분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리니아는 한쪽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살아야 해! 저거 막고, 살아야 한다고!”

눈앞에서 동기의 사망을 확인한 상황.

내 정신은 계속해서 내가 본 것들을 외면하고 무의식 속으로 숨어 버리라고 속삭이고 있었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한 줄기 이성을 어떻게든 붙들기 위해 애썼다. 여기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로 무의미한 회피일 뿐이었다.

‘정신 놓으면, 죽는다….’

“신병들, 정신 차려. 정신! 진짜 죽고 싶어?!”

때마침 에이프릴의 높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소에 나를 매일 괴롭혀 대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벼락에 맞은 듯 화끈한 감각과 함께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까는 선임들보다 마물이 덜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든든하게 느껴졌다.

“야, 불! 불을 더 밝혀!”

에이프릴이 새된 목소리로 지시하자, 누군가가 급하게 횃불을 가지고 우리들의 틈으로 달려왔다. 그제야 시야가 좀 밝아지면서 사물이 분간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전투에서 내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시야 때문이었다.

달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산속의 밤중.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사실상 우리는 두 눈을 감고 소리와 감각만으로 전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나마 앞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각자의 검에서 발광하는 오러 정도. 그러나 그 오러들은 모두 다른 색을 띠고 있었기에, 오러를 통해 얼핏 보이는 세상은 알록달록해서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나도 내 검에서 빛나는 산호빛의 오러를 손전등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산호빛이 덧입혀진 드래곤은 더욱 공포심을 조성한다는 거였다.

마찬가지로 아까 산호 빛이 덧입혀진 동기의 시체도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똑바로 봐! 보이지 않는다면, 소리라도 똑바로 들으라고!”

에이프릴이 다시 외쳤고, 나는 이를 악물며 횃불을 통해 어떻게든 시야에서 드래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크아아아아-!

그때, 갑자기 드래곤이 요란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오른쪽 다리에 상처를 입은 듯한 드래곤이 고개를 높이 쳐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건 검에 불 속성 오러를 두른 아퀼라였다. 내가 시야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사이, 그의 오러 블레이드가 드래곤에게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했던 것이었다.

부대원들은 다들 어딘지 다쳐서 피를 흘리는 몸으로도 드래곤의 저지를 막기 위해 검을 내리쳤다. 나도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꽉 쥔 검을 들고 드래곤에게로 달려갔다.

드래곤에게 죽는 일도 끔찍했지만, 저 드래곤이 마을로 내려간다면 우리 부대는 더 높은 분들에 의해 다 뒤질 게 틀림없다….

“안 돼, 피해!”

“어?”

분명 모든 일이 다시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악! 아아아악!”

“아아악!”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검을 비명 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옮겼다. 산호빛 오러를 통해 그곳에 있는 게 무엇인지 똑똑히 보였다.

드래곤의 입에 의해 물어뜯기고 바닥으로 추락한 두 개의 몸통이었다.

“안 돼!”

그건 내 동기 요한과 빌리의 시체였다.

“망할! 시야 확보! 드래곤의 위치를 절대 놓치지 마!”

벌써 부대원들이 셋이나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부대원들은 전투에서의 죽음은 익숙하다는 듯이 곧장 검을 높이 들고 자신에게로 오는 공격을 막아 냈으며.

드래곤의 다리를 공격해 그것의 분노를 불러왔던 아퀼라는, 죽은 동기들의 시신을 보며 팔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퀼라의 표정이 무언가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충격을 받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각 소대! 분대끼리 교대해!”

“2분대 뒤로 빠지고 1분대와 교대해! 3분대와 4분대도 교대한다!”

중대장과 소대장이 연이어 그렇게 지시했을 때, 나는 리니아의 손에 이끌려 움직이지 않는 몸을 겨우 이동할 수 있었다.

충격으로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드래곤이 포효하고 있는 이 산에서, 안전한 곳이란 없었다.

드래곤이 질주할 때마다 부대원들은 나가떨어졌다가 조금이라도 발을 묶어 두기 위해 드래곤의 뒤꽁무니를 쫓아 달릴 뿐이었다.

드래곤의 끔찍한 괴성과 사방에서 번쩍이는 오러 때문에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시야도 분명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리고 상황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붕 떠 있는 기분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었다.

“히포!”

깜깜한 시야로 인해 드래곤의 위치를 놓치고 잠시 방심한 틈을 타, 내 동기 히포의 몸은 그대로 물어뜯겼고.

“아냐, 아냐….”

횃불로 얼핏 비쳐 보이는 드래곤은 부대원들의 공격에 의해 날개가 완전히 찢겨 나갔고, 두 다리에는 큰 부상을 입어서 이전과 같은 속도를 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둠 속에서 마지막까지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된다고….”

눈이라도 감아서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드래곤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면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생전 처음 느껴 본 엄청난 공포와 절망감 탓에 나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퀼라는, 아퀼라는 어디 있지?’

누구라도 저 드래곤을 죽여 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내가 반사적으로 찾게 된 건 원작 남주였다.

“아….”

그러나 내가 발견해 낸 아퀼라는, 동기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나와 같이 큰 충격을 받은 듯한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쟤, 저거….’

나는 아퀼라의 눈빛 속에서 무언가를 읽어 낼 수 있었다.

그건, 완전히 망가져 버린 사람의 눈이었다.

그러나 동기들의 죽음을 목격한 신병들이 어떤 충격을 받든지 간에, 부대원들은 드래곤에게 계속해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건 우리 소대원들뿐만이 아니었다. 언뜻 보이는 불빛 사이로, 베타 소대에서도 죽은 소대원의 앞에서 누군가가 울부짖고 있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너무 높아!”

드래곤의 약점은 눈과 입이지만, 그것의 머리는 우리들이 닿을 수 없는 높은 위치에 있으니 유효타를 먹이기도 어려웠다.

“망할, 밤중이라 제대로 대처하기가 힘들어…!”

지금 드래곤의 바로 정면에 선 건, 에이프릴과 윈터였다.

에이프릴이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드래곤에게 달려들었다.

식물 속성의 오러 사용자인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초록빛 기운이 흩날리면서 드래곤의 피가 튀었다. 그녀가 한 번 베어낸 자리는 재생되지 않았다.

그리고 에이프릴의 옆으로 눈에 띄는 새파란 오러를 두른 남자 한 명. 윈터.

원작 남주2이자 원작에서도 가장 출중한 실력을 가졌다고 묘사되는 남자.

그가 화려한 얼음 속성의 오러를 검에 두른 채, 드래곤의 몸을 밟고 허공에 높이 뜨더니 몸이 튕겨 나갈 정도로 전력을 다해 드래곤에게 검을 휘둘렀다.

쾅-!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드래곤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처절한 울음소리를 냈다.

드래곤이 새하얗게 얼어 버린 두 눈을 하고 앞발을 마구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것의 앞발이 땅으로 내리쳐질 때마다, 아래에서 다리를 공격하고 있던 부대원들의 몸이 저 멀리 튕겨 나갔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내면서도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려고 바닥을 긁었다.

크아아아아-!

순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피해!”

드래곤의 입에서 거대한 불꽃이 나와 우리들에게로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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