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엘리엇도 지그시 눈을 감고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어차피 모두가 살 수는 없지. 강한 놈만 살아남는다.”
아까는 한 명의 부하도 잃고 싶지 않다고 말은 했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약하면 죽는다.
매달 부대원이 한 명씩은 죽어 나가는데, 1급 마물을 상대하면서 신병들이 전부 멀쩡할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전멸할 수도 있겠지.
에이프릴은 슬쩍 고개를 돌려 신병들이 뒤에서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다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체력적으로 훈련을 잘 시켰는지 꽤 오래 걷고 있는데도 힘든 기색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단연 아퀼라였다.
‘불 속성 오러 사용자. 쟤는 아마도 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에이프릴이 태연한 척을 하며 다른 신병들을 둘러보았다. 영 가망이 없었다.
‘그리고 쟤는 좀 애매한데….’
에이프릴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사루비아가 있었다. 사루비아는 힘든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신병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여자 신병. 이 부대에 여자가 많지 않긴 하지만, 사루비아는 특출하게 아름다웠다.
산호빛 머리카락에 금빛 눈, 사랑스러운 이목구비. 그 이름답게 한 떨기 꽃을 연상시키는 생김새.
‘쟤는 깡이 있단 말이지.’
약하게 생겨서 걱정했지만, 그래도 뒤쳐지지 않고 훈련에 잘 따라오고 있었고….
본래 이 국경방위군에서 살아남는 ‘강한 자’란, ‘미친놈’을 의미하는 법이다. 조금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독한 놈들은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아낸다.
‘죽지 마라, 제발.’
평소와 같은 표정을 하고, 에이프릴이 후방을 노려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야, 사루비아! 너 표정이 힘들어 보인다?”
“죄, 죄송합니다!”
사루비아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표정을 갈무리하는 모습을 보며, 에이프릴은 흡족한 표정을 짓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래, 독하게 굴어야 산다….’
* * *
그 순간에 사루비아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저 미친X은 또 XX이야.’
* * *
우리는 산속 깊은 곳까지 들어왔지만, 그동안 마물의 흔적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한참을 걸었기 때문에 옷은 땀으로 축축했고, 처음에는 얼얼한 수준이었던 발은 이제 퉁퉁 부었는지 신발이 꽉 끼는 감각이 느껴졌다.
중간에 베타 소대의 몇 인원과 만나 함께 이동하기는 했는데, 다른 소대원들과 우리는 별다른 교류가 없는 것 같았다. 짬을 먹은 상등병들이야 다른 소대의 동기들과 인사하고 있었지만, 우린 그럴 일이 없었기에 그들이 합류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굳이 차이점을 꼽자면, 가장 높은 지휘권자가 알파 소대의 소대장에서 18중대의 중대장으로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한편 하늘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 빽빽한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해가 진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릴 것이므로 서둘러야 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야영한다. 취침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중대장이 지시했고, 알파와 베타 소대의 소대장들은 각자 병사들에게 지시를 시작했다.
중대장은 우리와 나이 차이가 꽤 되는 남자로 보였는데,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종족인 것 같았고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불침번은 그동안 루이즈 네가 짜 놓는다.”
앞에서 선임들이 대화를 시작했고, 곧 이쪽으로 걸어온 레온이 우리에게 텐트를 칠 것을 지시했다.
“이시나, 네가 신병들 좀 알려 줘라.”
“아, 알겠습니다…!”
이시나가 쭈뼛쭈뼛 서 있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자, 봐 봐, 얘들아. 여기를 이렇게 고정시키는 거야.”
나는 이시나의 지시에 따라 반대편에서 리니아와 함께 땅에 텐트를 고정시켰다.
늦은 저녁에 퉁퉁 부은 발로 산속에서 이러고 있다니, 갑자기 내 인생에 대한 서러움이 몰려왔다.
“도대체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동감이야.”
묵묵하게 매듭을 조이고 있던 리니아가 내 말에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생에는 제발 이종족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며 리니아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눈에 길게 난 흉터를 매만졌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리니아를 쳐다보았다가, 내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질까 봐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했다.
“궁금해?”
“어?”
“이 흉터,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냐고.”
“아, 아니, 네가 불편하다면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보나 마나 깊은 사연이 있을 것이므로, 나는 괜히 남의 상처를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리니아는 잠시 침묵하는 듯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살아 돌아가면 알려 줄게.”
“안 돼! 잠깐만!”
강하게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
‘어쨌든 이 세계는 소설 속이란 말이야!’
그리고 지금 리니아는 데드 플래그를 밟았다!
“야, 야…! 방금 한 말 빨리 취소해!”
“뭐를?”
“너 그거 데드 플래그야! 살아 돌아가면 어쩌구 하지 마! 그냥 평생 안 알려 주겠다고 해!”
“데드 플래그가 뭔데?”
“그냥 그렇게 말해! 돌아가도 안 알려 준다고!”
“어, 어…. 내 눈이 왜 다쳤는지는 평생 안 알려 줄 거야.”
“이제 됐어.”
내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한 명의 동기를 살려냈다!
‘휴, 리니아 저 자식, 스스로 데드 플래그를 밟을 뻔했네….’
* * *
그날 밤, 나는 에이프릴과 유리와 함께 좁은 텐트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한밤중의 산은 정말로 추웠지만, 좁은 텐트 안에 몸을 다닥다닥 붙이고 있자니 서로의 온기가 느껴지긴 했다. 텐트가 좁은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사루비아. 불침번 교육받았지? 중간에 누가 너 깨우면 바로 일어나야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긴급 상황 발생하는 경우도 모두 암기했을 거고.”
“네, 다 외웠습니다.”
나에게 몇 가지 사항들을 더 확인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에이프릴은 눈을 감고 누웠다.
‘이 상태로 어떻게 잠을 자냐.’
텐트는 좁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추웠으며, 무엇보다 긴급 상황으로 바로 나갈 것을 대비해서 신발을 신고 자야 하는 게 최악이었다. 머리맡에도 긴급 상황을 대비한 검이 놓여 있었다.
잠이 전혀 올 것 같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어떻게든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몸을 뒤척였다.
“…야, 미쳤냐.”
“죄송합니다….”
물론 그마저도 바로 옆에 누워 있던 유리의 싸늘한 목소리 탓에 얌전히 정자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나는 어떻게든 잠에 들어 보기 위해 두 눈을 감았지만,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이 불편한 곳에서 어떻게 잠이 오냐고….’
내가 속으로 잔뜩 불평하며 애써 눈만 감고 있던 그 순간.
“야, 신병! 일어나! 빨리!”
“유, 유리 님?”
검은 눈을 야차같이 뜬 유리가 내 몸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뭐지? 대체 내가 언제 잠들었던 거지?’
차라리 학창 시절 책상에 엎드려 잘 때가 더 편했던 것 같은데, 이 춥고 좁은 텐트에서 금방 잠든 걸 보면 내가 더럽게 피곤하긴 했나 보다.
‘이게 됐네….’
내가 여전히 비몽사몽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나 눈만 깜빡일 때, 유리가 답답하다는 듯이 내 몸을 흔들며 외쳤다.
“긴급 상황이다! 드래곤, 드래곤이 나타났어!”
“자, 잘 못 들었습니다?”
아니. 대체 드래곤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잠이 갑자기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장르 스케일이 너무 커진 거 아닌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와중에도, 나는 유리를 따라 내 검을 챙기고 총알같이 텐트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
텐트 밖으로 나가자마자 드래곤을 마주한 나는 놀라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비늘이 덮여 있는 황토색의 흉측한 드래곤.
그것이 괴성을 지르며 마구 날뛰고 있었고, 부대원들은 오러를 두른 검을 휘두르며 고작 한 마리의 드래곤을 막기 위해 다 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드래곤에 비해 역부족으로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물러나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드래곤을 마을로 보낼 수는 없다!”
중대장이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당황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나를 플라토가 잡아당겼다.
“정신 차려, 사루비아! 드래곤은 불을 뿜는다! 잠깐이라도 정신 놓으면 안 돼! 네 위치! 네 위치 똑바로 안 찾아가?!”
그 말에 비로소 정신이 드는 나는 허둥지둥 내 위치를 찾았다.
‘2분대였고, 그리고 번호는 5번….’
그렇지만 강박적으로 외운 번호만 내 머릿속에 떠올랐고, 도저히 내 옆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정신 차리라고! 네 위치는 여기잖아!”
플라토가 사나운 목소리로 외치며 나를 자신의 오른쪽으로 갖다 두었다. 그제야 나는 내 왼쪽이 플라토였고, 오른쪽이 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 오른편에 서 있는 칼은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우린 1분대 뒤에서 대기하는 거야! 상황 똑바로 주시해!”
나와 마찬가지로 2분대에 속해 있는 지휘사관 엘리엇이 외쳤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한 후 눈에 힘을 주어 눈앞에 있는 것들을 똑바로 보려고 애썼다.
드래곤의 후방과 우측에서는 베타 소대가 전투하고 있었고, 전방과 좌측에서는 우리 알파 소대가 전투하고 있었다.
우리 알파 소대 중에서도 1분대가 드래곤의 전방으로 달려들고 있었으며, 우리 2분대는 그 뒤에 일렬로 서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 할 수 있을까?’
드래곤의 실물을 보자니 저절로 몸이 떨려 왔다. 실물로 보는 드래곤은 동화 속에서 묘사되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흉측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은 저절로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드래곤과 전투하고 있는 부대원들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 같았다.
드래곤이 한 발자국 전진할 때마다 드래곤에 매달려 있던 부대원들은 아무 저항도 못 하고 떨어졌지만, 그들은 이를 악물고 다시 드래곤에게 검을 휘둘렀다.
여전히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내가 잔뜩 얼어붙어 서 있을 때.
“야, 너! 옆!!”
플라토가 갑자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영문을 모르는 눈으로 오른쪽을 쳐다봤다가.
“아.”
드래곤에 의해 학살당한 흔적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칼이 그곳에 죽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