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7화 (8/233)

원작에 등장한 마물들은 외울 필요도 없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로 암기해야 할 마물 지식들이 많았다.

‘3급 마물이면… 제일 흔한 보통 수준의 마물이었지.’

마물의 등급은 1급부터 4급으로 나뉘어 있다.

2급은 위험 등급, 3급이 보통 등급. 그리고 4급은 이종족이 아닌 일반 제국민들도 잡을 수 있는 벌레 종류 등이다.

‘그래서 우리가 상대하는 마물들은 보통 2급 아니면 3급이지.’

1급은 잘 훈련된 이종족 여러 명이 함께 덤벼들어도 이기지 못할 종류로, 웬만해서는 평생 볼 일도 없는 종류의 마물이었으니까.

“스켈레톤 퇴치법.”

플라토가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시작했다.

“뼈의 결합 부위를 공략하고, 마지막에는 머리와 몸통을 확실히 분리합니다.”

“가스트의 서식지.”

“해가 들지 않는 지하나 동굴에 삽니다.”

“퇴치법은?”

“빛을 받으면 죽으니 밝은 곳으로 유인하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불을 피웁니다. 물론 검으로 다 베어 버리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기억난다….

가스트를 처리하러 갔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위험에 처한 원작 여주 달린을 아퀼라가 구해 주는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아퀼라는 불 속성 오러를 사용하기 때문에 한 번에 그 모든 가스트들을 죽일 수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달린은 자신은 너무 무능하다고 눈물을 흘렸지.

‘무능한 걸 알면 좀 훈련을 하란 말이야.’

그러나 원작에서 달린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훈련을 하러 가는 대신, 빛도 안 들어오는 지하 공간에서 아퀼라와 포옹했다.

“흑흑, 아퀼라 님…. 왜 저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노력할 필요 없어. 그렇게 고생할 필요 없다. 네 몸이 손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내가 지켜 주겠다고, 내 이름을 걸고 약조하지.”

그 뒷부분은 한참 동안이나 뜨거운 포옹을 했다는 로맨틱한 묘사가 나오지. 다시 생각해 봐도 빡친다.

‘분명히 원작은 로판이었는데, 왜 나는 군대물을 찍고 있는 거냐고.’

게다가 원작의 아퀼라 이놈도 문제다. 달린이 일하지 않는 만큼 다른 부대원들이 고생한다는 걸 알면서도, 뭘 지켜 주니 마니 타령인가….

“좋아, 너는 통과다.”

내가 원작을 떠올리며 다시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는 동안, 플라토는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동기 칼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는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야! 오우거! 오우거! 아직도 마물 이름도 다 못 외웠냐! 일주일 뒤면 너희도 실전 투입인데, 뒤지고 싶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냐! 마물 대신 우리가 직접 죽여 줄 텐데!”

나는 칼에게로 곧장 발길질이 날아드는 모습을 보며 애도를 표했다.

‘7년 11개월 8일만 참자….’

“플라토 님! 큰일 났습니다!”

그때, 우리의 맞선임 이시나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순간 이시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플라토에게 들키기 전에 빠르게 원위치 했다.

“뭔데?”

“산 바로 아래 마을에 3급 마물 구울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지금 긴급 토벌 나가야 하니까, 빨리 숙소에서 짐 챙겨서 토벌 준비하라고 에이프릴 님이 지시하셨습니다…!”

“구울이라고?”

플라토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알았다. 이시나 넌 먼저 돌아가 봐. 난 얘들한테 현 상황 설명하고 바로 챙겨서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긴급 토벌?’

3급 마물인 구울은 이종족들에게 있어 결코 위험한 마물이 아니다. 아직 신병인 우리는 꽤 애를 먹겠지만, 우리보다 세 달 선임인 이시나만 해도 혼자서 구울은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깐 구울이 나타났다고 해서 이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는데….’

구울이 마을까지 내려왔다면 그건 문제겠지만, 구울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충분히 대피할 수 있었다. 그럼 우리는 빠르게 이동해서 구울을 처리하기만 하면 된다.

“신병들, 이제부터 마음 단단히 먹고 잘 들어라.”

플라토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우리들을 쳐다봤다.

“사루비아, 3급 마물 구울의 특성 기억하나?”

“예,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지만 완전한 인간의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두 발로 서 있지만 몸이 앞으로 굽어서 위태로운 느낌이고 아주 흉측하게 생겼으며 웅얼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지하나 묘지에서 살고 밝은 곳으로는 잘 나가지 않….”

플라토의 질문에 대답하던 내가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고 설명을 멈췄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플라토가 맞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구울은 마을로 내려가지 않아. 거기다가 이 마을 내에는 공동묘지가 없고 대신 산에 묘지를 만들기 때문에, 더더욱 구울이 나타날 일이 없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무로 인해 어두운 산속, 그곳에 있는 묘지에 살던 구울이 마을로 내려왔다는 건….”

망할. 왠지 비슷한 상황이 원작 소설에서도 일어난 적 있는 것 같다.

“산속에 구울보다 훨씬 강한 마물이 나타났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2급 마물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마물들은 나름 경계를 유지하며 잘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산에 1급 마물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 마물을 토벌하러 간다.”

‘…이거 혹시 데드 플래그인가?’

* * *

“사루비아, 왔니? 유리! 네가 쟤 짐 챙기는 것 좀 도와줘!”

“알겠습니다.”

좁은 숙소 안에는 물건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고, 수첩에 무언가를 기록하며 짐을 챙기는 듯한 에이프릴은 아주 바빠 보였다.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키 큰 여자 선임, 유리가 에이프릴을 대신해서 내게로 다가왔다.

평소에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내게 말 한마디도 먼저 붙이지 않던 유리는, 지금도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를 도와준다는 듯 싸늘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신병, 군장 챙기는 방법 배웠겠지. 지금 빨리 내 앞에서 짐 챙겨 봐.”

“네, 알겠습니다.”

“잠깐, 그건 부피가 크니까 아래에 먼저 넣어야 할 거 아니야.”

“아, 죄송합니다…!”

“야, 그걸 왜 거기 넣어?”

‘이름이 뭔지 알고 있기는 한 거야?’

결코 이름은 입에 담지도 않는 냉랭한 유리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불평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여기 있는 선임들은 나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어쨌든 유리의 지시대로 짐을 모두 챙긴 뒤, 나는 연병장으로 달려 나가 다른 동기들 틈에 줄지어 섰다.

“모두 준비됐나?”

우리 부대의 소대장이 딱딱한 표정으로 단상에 서 있었다.

“마을에서 구울들이 발견됐다. 그 구울들은 감마 소대에게 처리를 맡겼고, 우리 알파 소대는 산속에 있을 1급 마물을 처리하러 간다. 1급 마물이 마을로 내려가기 전에 우리가 빨리 처리해야 한다. 베타 소대에도 연락을 했으니 곧 만날 수 있을 거다. 타 중대에도 지원을 넣어 뒀고.”

플라토나 레온, 루이즈까지. 그동안 내 눈에 늘 능숙해 보였던 선임들까지 모두 긴장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국경방위군이다. 우리는 국가의 명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우리의 목표는 1급 마물 토벌이다.”

바로 다음에 이어진 소대장의 말에 나는 몸을 더욱 뻣뻣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생존이다.”

나는 선임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눈알만 굴려 내 맞선임 이시나를 쳐다봤다.

근 한 달 동안 나는 내 일곱 명의 동기들에게 꽤 정이 들어 있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 보지 않은 아퀼라를 포함해서 모두.

그런데 내 동기들이 전멸한다면… 도대체 이시나는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나라면 완전히 정신이 나갔을 텐데, 역시 이시나는 원작 남주3이니까 멘탈도 남다른 거겠지. 저게 바로 요즘 트렌드인 ‘겉으로는 다정하지만 속으로는 흑막 어쩌구’의 위엄인 건가.

‘그보다 중요한 건 일단 내가 살아남는 거겠지만,’

“1급 마물의 앞에서 우리는 물러날 수 없다. 우리가 물러나면 마을 사람들은 그대로 끝이니까, 우리의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해.”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게 너희들의 목숨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악착같이 살아남아라. 나는 한 명의 소대원도 잃고 싶지 않다. 단지 그뿐이다.”

소대장 말을 마치자, 연병장에 줄지어 있는 부대원들 사이에는 이제 엄숙하고 비장한 분위기까지 감돌고 있었다.

어쩐지 내 심장도 같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입대 전에는 고아원에서 원장에게 구박받으며 하루하루를 저주했고.

입대 후에는 고통스러운 훈련을 겪고 조금만 실수해도 선임들의 불호령을 들으며 이 세계의 정체성에 대해 욕했지만.

그 끔찍한 나날들 속에서도, 이 정도의 긴장감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자, 출발한다!”

나는 고장 난 걸음걸이로 삐걱삐걱 행렬을 따라 걸었다. 그나마 내 등에 얹힌 무거운 군장이 내게 현실감을 가져다주었다.

슬쩍 주위를 보니 고장 난 걸음걸이로 걷는 것은 내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겁이 많은 칼은 팔과 다리가 함께 나가고 있었다.

망할, 다른 동기들이 긴장한 모습을 보니깐 나도 더 긴장이 된다. 악순환이다….

“쯧쯧, 아주 엉망이네….”

그때, 차가운 정적을 뚫고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따라 금발 머리가 눈부시게 빛나는 에이프릴이, 우리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둘러보고는 말했다.

“얘들 왜 이렇게 긴장해 있는 거니?”

그러자 다른 선임들이 빠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야, 마물이 무서울지 우리가 더 무서울지 잘 생각해라.”

“이야~. 이러다 이따가 마물 보고 튀는 거 아니냐? 너희 눈앞에 마물이 있으면, 바로 뒤에는 우리가 있다는 거 잘 생각해라.”

“걱정 마라. 실수만 안 하면 죽을 일 없을 테니까. 물론 너희가 실수하면 마물들보다 우리 손에 먼저 죽는다.”

‘와, 갑자기 긴장이 풀린다!’

매섭게 달려들어 쪼아대는 선임들의 갈굼을 듣고 있자니 마물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세상에 저 인간들보다 더 무서운 게 어디 있겠냐.’

저 인간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마물을 상대하는 게 더 쉽겠다. 마물이 빡치게 하면 마물을 죽이면 되지, 저 인간들에게는 하극상을 일으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 마물 토벌에서 실패하면 에이프릴을 시발점으로 하여 지옥의 내리갈굼이 시작될 것을 고려하자, 갑자기 어떻게든 성공해야만 한다는 의지가 내 안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해낸다. 반드시 해낸다.’

인간이 피라미드도 만들었는데, 아무렴 1급 마물 사냥이라고 못 하겠는가.

* * *

“엘리엇 님, 그런데 진짜 어떡합니까?”

행렬의 선두 무리에 선 에이프릴이 후임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지휘사관 엘리엇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휘사관인 엘리엇은 늘 모든 일에 권태로운 태도였지만, 부대에서 손꼽히는 짬을 쌓아 온 그는 에이프릴이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어쩌긴 뭘 어쩌겠냐, 1급 마물 죽여 버리고 오는 거지.”

“신병들 아직 한 달도 안 됐습니다. 실전 투입될 시기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1급 마물은 절대 상대 못 할 겁니다.”

“그럼 뭘 어떡하겠어. 개새끼처럼 집만 잘 지키고 있으라고 하고 내버려 두고 올까? 알잖아, 우린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한다.”

“당장 쟤네 윗 기수인 89기만 해도 2급 마물 때문에 다섯 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네가 애들 잘 굴렸잖아. 너 그 강도로 하루만 더 굴렸으면 진짜 신병들 단체 탈영했겠다. 역시 에이프릴 네가 빡세긴 빡세.”

에이프릴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그래 봤자 어차피 누군가는 죽는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