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검에 둘러져 있는 오러의 색깔은 사루비아의 머리 색과 닮은 코랄색이었다.
물론, 내 오러는 그 어떤 속성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주인공이랑은 확실히 거리가 멀군….’
보통 ‘로판 소설 속 엑스트라에 빙의한 여자’는 새로운 로판의 여주인공이 되고는 했는데, 내가 빙의한 이 사루비아는 얼굴 좀 예쁜 것 말고는 별다른 능력이 없었다.
애초에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은 원작 주인공들과 같은 특별한 인간들일 뿐이다. 실제로 내 동기들도 아무런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원작 남주 아퀼라를 제외하고.
“뭐야? 이번 신병 중에 속성 있는 놈이 있어?”
“쟤 이름이 뭐였지?”
“아퀼라입니다. 그나저나, 불 속성은 오랜만인데….”
웅성거리는 선임들의 시선이 모두 아퀼라에게로 쏠려 있었다.
아퀼라의 검 주위에서 새빨간 불꽃이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은 금방이라도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듯 열기를 내뿜었다.
‘저러고도 검이 안 녹는 게 신기하다…. 하긴, 이건 오러니까 진짜 불이랑은 좀 다르지.’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불꽃을 검에 두르고도, 아퀼라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평소와 같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고.
순간 아퀼라와 내 눈이 마주쳤지만, 당연하게도 아퀼라는 그 어떤 관심도 없이 눈을 돌려 버렸다.
‘그래, 능력 있어서 부럽다, XX….’
로판 남주들은 다 저런 표정인 걸까? 아퀼라는 언제나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니 좀 다른 게, 일반적인 로판 남주들이 ‘싸늘한 표정’이라면, 아퀼라는 싸늘한 표정도 아니고 정말 그야말로 무표정 그 자체였는데….
‘원작에서 싸늘한 역할을 맡는 인물은 따로 있으니까.’
‘네미집’의 남주2이자, 아퀼라와 가장 대립하는 관계였으며 독자들에게 인기 또한 가장 많았던 인물.
네 명의 남주들 중 아퀼라를 제외하고 속성이 담긴 오러를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
모두에게 냉랭하고 무심했으나, 오직 여주인공 앞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뜨겁고 열정적으로 굴었던 인물.
기수와 능력 모두 아퀼라보다 위였지만, 사랑 면에서는 아퀼라에게 패배하고 여주인공과 이어지지 못했던 인물.
“너. 불 속성이냐?”
새까만 머리카락에 청회색 눈을 가진 남자가 선임들 뒤에서 걸어 나왔다.
원작 남주2, 윈터가 푸른 눈으로 아퀼라의 붉은 검을 그대로 응시했다. 윈터의 손에 들린 검 주위로 얼음 속성의 오러가 넘실대고 있었다.
아퀼라는 고개를 들어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윈터의 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음 속성 오러 사용자와 불 속성 오러 사용자의 대치. 순간 연병장 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가.
‘설마 이때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건가?’
원작에서 남주1과 남주2가 대립했던 데에는 사실 유구한 역사가 존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대결을 볼 수 있다니 어쩐지 흥미진진해져서, 나는 눈을 반짝이며 윈터와 아퀼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야, 누가 신병한테 함부로 말 걸랬냐?”
“이게 잘한다 잘한다 해 주니깐 아주 선을 넘네.”
선임들의 갈굼이 윈터에게 쏟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빠르게 눈을 깔았다.
선임들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윈터를 보며 말을 툭툭 던지고 있었고, 윈터는 아차 했는지 빠르게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곧 험악하게 눈을 뜬 레온이 윈터에게 엎드리라며 손짓했고, 그는 그 명령을 따랐다.
그래…. 원작에서는 뛰어난 능력과 차가운 성격의 완벽주의자 지휘사관 캐릭터였던 윈터라 할지라도, 지금 그는 우리보다 한 계급 위인 일등병일 뿐이었다.
‘원작 남주 후보의 간지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군….’
나는 윈터가 선임의 앞에서 팔 굽혀 펴기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정말로 로판의 클리셰에 따라 집착이 시작된다고 해도….
원작 남주들은 나를 챙기기보다는 본인들 가오부터 먼저 챙겨야 할 것 같다.
* * *
제대 D-2913일.
지옥 같았던 일주일의 신병 훈련을 마치고, 그제야 훈련은 내가 좀 따라갈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춰졌다.
기상하면 아침 구보부터 하고 그 후에 아침 식사. 아침 식사 후에는 온갖 체력과 근력 운동을 진행하다가 점심 식사. 점심 식사 후에는 빨래를 비롯한 온갖 잡일을 한 후 무기를 사용하는 훈련을 하고 저녁 식사. 저녁 식사 후에는 마물 정보 암기 및 전략 연습을 하다가 청소하고 취침.
1분의 쉴 시간도 없이 우리들을 굴리던 분위기도 좀 풀어져서, 이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사루비아, 지금 연병장 정리해야 하는데.”
“아, 알았어!”
내 일곱 명의 동기들 중에서도, 나는 칼과 리니아라는 동기와 친해졌다.
칼은 갈색 머리를 가진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남자애였고, 리니아는 한쪽 눈에 긴 흉터가 나 있고 말씨가 조금 거친 남자애였다.
처음에는 내가 여자기 때문에 다른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할 것을 걱정했지만, 동기들은 그런 건 별로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었다.
내가 근력 훈련에서 자주 낙오하는 바람에 연대 책임으로 같이 구르기는 했지만, 체력 훈련이나 검술 훈련에서 다른 동기들도 공평하게 낙오하기 때문에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고.
거기다가 일주일 동안 함께 땅바닥을 구르다 보면 옆 사람의 성별 같은 건 중요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아무리 눈에 띄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나에게 동료애 이상의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 빨래 많이 남았나?”
“아까 보니까 빨래통에 수건 많더라.”
“아, 탈영하고 싶다….”
리니아가 말버릇처럼 중얼거리자,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아 훈련용 보호구를 열심히 닦던 나와 칼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위험 등급 2급 마물 이름이랑 특성 다 외웠어? 오늘 저녁까지 안 외우면 진짜 머리 박아야 할 분위기던데.”
“외우긴 외웠는데, 미치겠네. 머릿속에서 내용이 다 섞여서 물어보면 대답 못 할 것 같다고.”
“사루비아, 넌 다 외웠냐?”
“일단 대충.”
원작을 읽어서 유일하게 도움이 되는 점은 마물의 정보를 비교적 수월하게 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선임들은 마물 정보를 대충 읊어 준 뒤에 우리들에게 알아서 외우라고 한다. 현장 전투에서 눈앞에 있는 마물의 약점을 모른다면 죽음뿐이니까.
물론 그 많은 정보들을 다 외우지 못한다면 우리 국경방위군 알파 소대식 “폭력과 공포만이 우리 모두를 구원한다” 교육이 적용된다.
참, 우리 소대의 이름은 알파였다. 옆 소대 이름은 베타 소대와 감마 소대였는데, 처음 들었을 때는 ‘역시 원작 주인공들은 셋 중에서 가장 간지나는 알파 소대 출신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좀 묘해지긴 했다.
“뭐야, 사루비아 다 외웠어?”
연병장을 정리하던 다른 동기, 요한이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 얘 다 외웠대.”
“대단한데? 역시 아직도 안 외운 난 그냥 X된 거겠지.”
“걱정하지 마. X돼도 아마 단체로 X될 거니까.”
요한을 시작으로, 다른 동기들도 한마디씩 말을 얹기 시작했다.
“뭐? 다 외웠어? 부럽다!”
“혹시 지금 나만 망한 거냐? 나 정말 전혀 못 외웠는데?”
“뒤질 생각 하니깐 너무 신나네….”
동기들이 부러워하거나 혹은 음울해 하는 목소리로 한마디씩 덧붙일 때, 유일하게 아퀼라만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호구를 묵묵하게 닦을 뿐이었다.
그는 내가 마물 등급을 다 외웠다는 말에 잠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가, 곧 다시 자신의 손에 들린 보호구로 시선을 옮겼다.
‘쟤는 진짜 속을 모르겠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 속성의 오러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그의 온도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훈련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서 칭찬을 받을 때도, 연대 책임으로 함께 땅바닥 위를 구를 때도.
그는 언제나 기뻐하지도, 원망하지도, 두려워하지도, 고통스러워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또한 그는 모든 동기들과 친하지 않은 사이였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동기들과.
먼저 말을 걸지도 않고, 말을 걸어도 단답으로만 대답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소설 남주들은 약간 사회성이 떨어지는 감이 있는 것 같아.’
‘북부 대공’, ‘폭군 황제’, ‘또라이 마탑주’, ‘오만한 공작’ 등….
생각해 보면 이러한 남주들은 여주 말고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는 꼴을 못 봤다. 혹시 남주가 되기 위한 조건은 뛰어난 얼굴과 능력, 그리고 그에 비해 떨어지는 사회성이 아닐까?
타닥타닥-!
그때, 누군가가 연병장으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연병장에서 가만히 청소만 할 것이지 소란스럽게 사적인 대화를 했다는 것까지 들킨다면 “폭력과 공포만이 어쩌구”가 돌아올 것이다.
“아, 너희들 여기 있었구나!”
“이시나 님!”
다행히 연병장으로 들어온 사람은 우리의 바로 전 기수이자 우리의 맞선임, 이시나였다.
‘그리고 원작 남주3이지.’
원작에서 아퀼라가 과묵하면서도 불같은 남주인공, 윈터가 쿨하고 싸늘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면, 이시나의 캐릭터는 ‘겉으로는 다정하지만 속으로는 흑막’이었다.
‘음, 역시 그냥 다정하기만 한 남주보다는 다정해 보이는 흑막이 최신 트렌드이지.’
이시나는 부드러운 카키색 머리카락에 짙은 녹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후임들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조금 건방지게 굴어도 늘 다정하게 웃을 수 있는 인내심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선임들에게도 늘 유순한 모습을 보이며 시키는 일을 다 해냈고,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씨를 구사했지만.
‘아퀼라나 윈터보다도, 제일 매정한 건 이시나다.’
내가 이 X같은 군대에 처음 온 날, 선임은 ‘이전 기수의 전멸’에 관해 얘기했었다.
2급 마물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인해 이전 기수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죽었다. 그리고, 그 기수 중 살아남은 유일한 훈련병이 바로 이시나였다.
이시나는 특별히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동기 다섯 명의 죽음을 목도하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강철 같은 멘탈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