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과연 내가 이 X같은 군대에 들어온 뒤 제일 많이 한 말은 무엇일까?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무엇을 예상하든, 전부 틀렸다. 정답은 다음과 같다.
“이게 되네.”
군대 생활 일주일, 나는 깨달았다.
피라미드는 인간이 만들었다.
세상에 인간이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일주일간, 신병들의 일상은 다음과 같았다.
“팔 벌려 뛰기 1,000회 실시!”
“미친 거 아니야…?”
약 한 시간 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게 되네.”
나는 체력은 정신력으로 증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야! 통나무 좀 더 잘 들라고! 협동, 협동을 하란 말이야!”
“협동이고 나발이고 어떻게 이걸 들고 버텨….”
“…이게 되네.”
근력 또한 정신력으로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이불에 각 안 잡니?”
“…이게 되네.”
놀랍게도 이불도 각이 잡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바닥에 광이 없잖아, 광이!”
“…왜 이게 되지?”
마룻바닥을 잘 닦으면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로 광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XX, 특공대도 이 정도로 훈련하지는 않겠다…. 아, 맞다. 여기 특공대였지….’
기본적인 청소와 침구 정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하루는 아침부터 밤까지 훈련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러게, 좀 이상할 정도인데.’
팔굽혀펴기에서 처참한 결과를 낸 대가로 흙바닥 위를 구르며 나는 생각했다.
‘너무 훈련만 시키는 거 아니야?’
우리는 정말 단 1분의 쉴 시간도 없이 일주일간 훈련만 했기 때문에, 나는 동기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었다. 선임들도 마찬가지였고.
무엇보다도 군대에 온 첫날, 선임으로부터 들었던 소리가 신경 쓰인다.
‘이전 기수가 죽어 나갔다고 했지.’
마물을 상대하는 일은 아주 위험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이종족들이 죽어 나간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든다.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에서 내가 빙의한 이 몸, 사루비아는 이미 죽은 상태로 시작된다. 틀림없이 마물들 때문이었겠지.
어떻게든 예정된 죽음을 피하고는 싶은데, 그건 내 노력에 달린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내가 아무리 죽어라 노력한다 해도, 모든 마물을 이길 정도의 신체 능력을 키울 수는 없다.
나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이종족 남자들도 마물에 의해 죽는데, 과연 내가 무사히 살아남아서 8년의 복무를 마치고 제대할 수 있을까?
‘원작이랑 다르게, 내 인생에 로맨스 같은 건 없어. 이건 로맨스판타지가 아니라고.’
나는 이를 악문 채 탈영하고 싶다는 표정으로 팔굽혀펴기를 하던 아퀼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의 나는 원작 남주들의 첫사랑 같은 게 될 가능성도 없어 보이고.’
아퀼라는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연대 책임’이라는 명목 아래 함께 처맞게 만드는 약해 빠진 동기일 뿐이다. 그의 도움을 기대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지금은 원작이 시작되기 4년 전이지.’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원작 남주들은 아직 누군가를 챙겨 줄 만큼 짬이 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남주들의 집착’ 어쩌구가 시작되어 봤자,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 * *
“애들 기초 훈련은 어느 정도 진행시켰냐?”
지옥의 훈련을 겪고 난 뒤 우리가 죽은 눈빛을 하고 흙바닥에 앉아 있을 때, 첫날 ‘이전 기수의 전멸’을 언급했던 선임 레온이 우리의 훈련을 진행하던 플라토에게 말을 걸었다. 레온은 늘 껌을 씹는 듯 건들거리는 말투를 구사하는 선임이었다.
“이번 주 내내 빡세게 시켰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평범하게 훈련병 루틴으로 진행시키면 됩니다.”
‘그렇지? 평소에도 이 수준으로 훈련하는 건 아니었지?’
일주일간의 신병 훈련만 빡세고, 그다음부터는 다른 선임들과 함께 훈련병 훈련을 받는 모양이었다.
안도감이 들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 8년 내내 이 수준으로 훈련시킨다면 그냥 목숨 걸고 탈영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검술 기초 훈련만 시키면 됩니다.”
“그러냐? 야, 지금 다른 애들도 뒤에 있는 연병장에서 훈련하고 있으니까, 지금 가서 검 잡아 보게 시켜라.”
“알겠습니다. 야, 너희들! 다시 일어나!”
레온의 지시를 받은 플라토가 우리에게 눈을 부라리며 손짓했다.
‘XX, 5분도 안 쉬었는데 지금 장난하냐.’
물론 그 말은 입 밖으로 낼 수조차 없었다. 당연하다. 난 신병 나부랭이다, XX….
그렇게 플라토의 뒤를 따라 연병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우리의 선임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미 검을 잡고 휘두르고 있었다.
“자, 신병 기초 훈련 마지막.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오늘 너희들은 검에 오러를 담는 걸 연습한다.”
“플라토, 검술은 내가 설명하지.”
“루이즈 님? 아, 알겠습니다.”
플라토보다 더 선임인 루이즈가 그를 대신해 우리의 앞에 검을 잡고 섰다.
루이즈는 에이프릴보다 한 기수 아래의 인물로, 상등병들 중 기수가 두 번째로 높았다. 흡사 엘프처럼 보이는 긴 머리카락이 특징이었고.
늘 차분하기 때문에 플라토나 레온보다는 덜 무섭지만, 그래도 그의 기수가 높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짬을 먹고 후임들을 갈굴 필요가 없어서 차분해진 걸 수도 있다….
그나저나 지금까지 육체를 단련하는 훈련만 하다가 처음으로 무기를 든다니, 좀 긴장되는 것도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나온 부분이구나.’
군대라고는 하지만, 원작에서 이종족들이 싸우는 방식은 총이 아니라 주로 검이었다.
몇몇 이종족들은 거대한 총이나 채찍 같은 특이한 무기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건 그 무기가 자신에게 최선이라고 판단한 특별한 경우이고, 일단 이종족이 가장 먼저 잡게 되는 기본 무기는 바로 검이다.
그렇지만 평범한 검은 아니다. ‘네미집’의 작가는 이종족들의 전투에 판타지를 차용했다.
이종족들은 검에 오러를 담을 수 있었다.
이종족이 아닌 인간이라도 훈련하면 오러를 담을 수 있었지만, 그들이 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몇 년을 연습해야 하는 것에 비해 이종족은 본능적으로 오러를 금방 습득할 수 있다. 그게 아돌브 제국이 이종족을 징용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 오러의 기운도 각자 다르다는 게 이 소설의 재미 요소 중 하나였다.
이종족의 피가 옅게 흐른다면 그저 아무 속성 없는 평범한 오러를 사용했고. 이종족의 피가 짙을수록, 그들은 자연의 다양한 속성이 담긴 오러를 사용할 수 있었다.
‘원작 여주 달린은 빛이었지.’
이종족의 피를 그 정도로 짙게 이은 이들은 아주 드물다. 그렇지만 달린은 어쨌든 특별한 존재인 ‘여주인공’이고, 그녀는 그 드물다는 빛 속성 오러를 사용하는 능력자였다.
그래 봤자 원작에서 일은 제대로 하지도 않고 로맨스만 했지만.
‘…잠깐만, 지금 생각해 보니 또 열받네?’
소설로 읽을 때는 몰랐지만, 내가 이렇게 빙의하고 직접 입대하고 난 뒤 나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원작 여주 이 전설의 고문관아…. 네가 일하지 않은 만큼 누군가가 너의 일을 대신하고 있었단다….’
달린이 일하지 않으면 그 일은 다른 불쌍한 막내들이 해야 했을 것이다.
아니, 달린 얘는 8년의 복무가 끝나면 3,000마크네를 받아 가는 게 아니라 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속으로 원작 여주 달린에 대한 불평을 이어 가고 있을 때, 검을 든 루이즈가 설명을 시작했다.
“자. 너희들이 검을 잡아 보는 건 처음이겠지. 위험하니까 옆 사람 찌르지 않도록 조심해라.”
‘…엥?’
나는 그 말에 황당한 눈빛으로 루이즈를 쳐다봤지만, 그는 굉장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결국 나는 입에서 새어 나올 뻔한 웃음을 꾹 참았다.
보통 기사단을 배경으로 한 로판에서는 ‘검을 잡을 때에는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지키기 위해 검을 사용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며….’와 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는데.
기껏해야 한다는 소리가 옆 사람 찌르지 말라는 경고라니. 초등학생들도 아니고.
‘하긴, 실수로 옆 사람 찌르면 안 되겠지…. 응….’
우리에게 제국민들을 지킨다는 특별한 사명 같은 건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검을 잡을 때의 특별한 마음가짐 같은 것도 필요 없었다. 우리는 그냥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나는 루이즈가 알려 주는 방법을 따라 검을 잡았다. 그는 우리가 검을 옳은 방법으로 잡았는지 하나하나 교정해 주기까지 했다.
“자, 그리고 이제 오러를 담아라.”
‘엥?’
그 말이 어이없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이즈를 쳐다봤다가 자신들의 행동을 자각하고는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다시 빠르게 눈을 깔았다.
“너희들의 본능에 각인되어 있어. 어렵지 않다. 할 수 있어.”
‘아니… 모르는데 어떻게 해요….’
우리가 황당무계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반응하든 말든, 루이즈는 우리의 반응 따윈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냥 오러를 담는다고 생각하고, 담아라.”
‘지금 장난하냐고….’
하지만 하라면 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이곳에서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게, 지난 일주일간 내가 배운 교훈이었으니까.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올 때까지 눈에 힘을 주어 검을 노려봤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하면 내면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 이거 사이비 종교에서나 하는 소리잖아.’
현재의 고난을 모두 이겨내면 미래에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사이비 종교랑 비슷한 것 같고…. 계급이 올라간다는 점도 사이비 종교랑 비슷하고….
“…저, 루이즈 님! 계속 시도해 봤는데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동기들 중 하나가 용감하게 손을 들고 외쳤다. 우리는 구세주를 보는 시선으로 자랑스러운 동기를 쳐다봤지만.
“…안 돼?”
루이즈가 싸늘한 눈빛을 했다.
“여기가 군대인데, 안 돼?”
‘XX.’
유감스럽게도 나의 동기의 발언은 그의 분노를 불러온 것 같았다.
“너희들이 정말 안 되면, 내가 할 수 있게 도와주고.”
루이즈가 검을 잡고 있는 동기의 뒤로 걸어가더니, 그의 종아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야, 아직도 안 되냐? 이래도 안 돼?”
‘이놈의 군대는 어떻게 된 게 기승전갈굼이야, XX.’
나를 비롯한 동기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되, 됩니다! 해냈습니다!”
루이즈에 의해 집중적으로 갈굼당하던 동기가, 검에서 푸른빛을 내며 발산하는 스스로의 오러를 보고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저게 되네.’
“자, 너희들도 도움이 필요하냐?”
“아닙니다!”
우리가 일제히 외쳤다. 역시 이럴 때만 한마음이지. 정말 눈물겨운 단합이었다….
“해내, 해내라!”
“해, 해내겠습니다!”
당연히 내가 아무리 열심히 검을 노려본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다른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폭력과 공포만이 어쩌구” 교육을 받은 뒤에야 검에 오러를 두를 수 있었다….
‘와, 이게 되네….’
정말 알면 알수록 놀라운 공간이다, 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