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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3화 (4/233)

“야, 애들은 좀 어떠냐?”

우리가 숨을 몰아쉬며 차렷 자세를 유지하고 서 있을 때, 남자 한 명이 건들거리는 발걸음으로 걸어오며 우리를 감독하던 선임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나 그렇듯 쓰레기지 말입니다.”

“아, 늘 하는 소리 말고 객관적으로 말이야.”

그러자 감독하던 선임이 우리를 흘끗 쳐다보고는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나쁘지는 않습니다. 딱 신체 능력은 보통 수준이고, 나중에 검을 좀 잡게 해 봐야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제발 애들 좀 많이 살려 보자. 난 저번 기수 때처럼 애들 다 죽어 나가는 꼴 못 본다.”

“최선을 다해 굴려 보겠습니다.”

방금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차렷 자세를 유지한 채로 나는 이름도 모르는 동기들과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번 기수가 죽어 나갔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뭔가 잘못됐다.

보통 로판에서 생존물이라 하면, ‘폭군 황제를 피하는 생존물!’, ‘또라이 마탑주를 피하는 생존물!’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가?

결국에 그 폭군 황제나 또라이 마탑주는 여주를 갖고 놀면서도 결코 죽이지는 않고, 여주에게 “재미있군.” 따위의 대사를 하는 법이다.

그런데 국경에서 마물을 피하는 생존물, 도대체 이딴 세계가 왜 로판 세계인 거지? 마물이 나를 갖고 놀면서 “재미있군.”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신체 능력은 이 정도면 충분히 확인한 것 같고, 일단 애들 숙소 안내부터 하고 밥 좀 먹여도 됩니까?”

“그래라.”

“야, 너희들 나 따라서 걸어와라.”

우리는 선임의 뒤를 따라 ‘숙소’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래, 적어도 숙소라고 부르는 걸 보면 내가 생각하는 그런 장소는 아닐 거야.’

비록 여기가 국경방위군이라고는 하지만, 대충 로판의 하녀 빙의물에 나오는 숙소 같은 곳이 아닐까? 하얀 침대가 있고, 약 네 명의 인원이 같은 방을 사용하고….

그러나 곧 나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숙소’라는 곳을 보고 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이, 이 미친놈들아…. 이럴 거면 그냥 내무반이라고 부르지 왜 숙소라고 부르냐고, 사람 헷갈리게!’

이건 어딜 보나 내가 대한민국 예능에서 보아 왔던 군대 내무반이었다.

XX, 개인 공간 보장 안 하냐? 대체 원작 여주는 이딴 공간에서 어떻게 로맨스를 진행시켰던 거지?

하, 그래, 역시 여기는 로맨스 따위는 없는 평행세계가 아닐까?

“아, 너는 이쪽이다. 따라와라.”

그때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선임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제야 나는 내가 서 있던 이 장소가 남성용 숙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내 옆에 서 있는 일곱 명의 남자 동기들을 위한 장소였던 것이다.

적어도 여성용 숙소가 따로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냥 처음부터 여군을 따로 창설하라고, XX.’

그러나 아돌브 제국은 여군을 위한 시설을 따로 창설하는 데 비용을 쓰느니 한 소대 안에 밀어 넣었다고 ‘네미집’에 나와 있었다.

그런 이유로 국경방위군은 여성과 남성 상관없이 한 부대에 소속되어 싸웠고, 원작 여주도 남주들과 로판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잠자는 숙소는 따로 쓰니까 문제없겠지, 뭐.’

나를 여자 숙소로 안내한 선임은, 문에 대고 똑똑 노크한 후 “신병 들여보내겠습니다.”라고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여보내.”

방 안에서 여성의 맑은 목소리가 들리자, 선임은 빠르게 문을 연 뒤 나를 안으로 밀어 넣고 잽싸게 문을 닫아 버렸다.

‘뭐지…?’

꼭 이 공간에 얼씬도 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얼떨결에 숙소 안으로 들어온 나는, 멍청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까 전 남자 숙소보다는 훨씬 작은 방의 크기.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건 고작 두 명의 여자였다.

그중에서 반짝거리는 긴 금발을 한 키가 작은 여자가 나를 보고 연녹색 눈을 곱게 휘며 방긋 웃어 보였다.

“신병이야?”

“네…? 네, 그렇습니다.”

금발의 여자는 나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위아래로 훑어보면서도 여전히 환한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고.

흑발의 긴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은 키가 큰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홱 하고 돌려 버렸다.

‘뭐지…?’

“유리, 신병이랑 인사할 생각 없지?”

“관심 없습니다.”

‘유리’라고 불린 흑발 여성이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금 벌써 찍힌 거야?’

명백히 나를 무시하는 유리의 싸늘한 태도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반갑다, 신병. 이름이 뭐니?”

“사, 사루비아입니다.”

“나는 에이프릴이라고 해.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

금발의 여자, 에이프릴이 내게로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했다.

“음, 짐 하나 못 챙기고 온 것 같은데. 사이즈 알려 주면 내가 옷은 챙겨다 줄게.”

‘이 사람은 딱히 무서운 타입이 아닌가…? 천사 고참, 뭐 그런 건가?’

에이프릴은 환한 웃음을 유지하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 물건을 챙겨 주었다.

물론 그녀의 환한 웃음이 부대에서 유명한 ‘악마의 웃음’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몇 시간 후의 일이었다.

* * *

“휴우, 이해가 안 되네…. 얘들이 왜 이렇게 약해 빠졌을까, 응?”

‘XX,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하냐고.’

내가 서른 바퀴째 연병장을 달리며 생각했다. 목구멍에서는 피 맛이 나고 자꾸 고개에 힘이 빠지며 아래로 기울어졌다.

‘토할 것 같아.’

이 미친놈들은 배려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지,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이 지옥 같은 신병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

이름도 모르는 동기들과 나는 점심 식사를 할 때만큼은 한마음이었다.

우리는 아주 전투적인 식사를 했다.

지옥의 훈련을 마치고 난 만큼, 무얼 먹든 맛있었겠지만 이곳의 식사는 특히 훌륭했다. 배고파 죽을 것 같던 우리에게 양도 아주 적절했고.

‘밥은 잘 만드네…. 하긴, 밥까지 맛없었으면 진짜 탈영했겠다.’

그렇게 풍성한 식사를 한 뒤, “이대로 마물과 싸우면 너희는 틀림없이 죽는다. 일단 체력부터 길러야 해.”라는 선임의 말과 함께 신병 훈련은 시작되었다.

참, 아까 우리를 감독하던 선임의 이름은 바로 플라토였는데, 플라토가 앞으로 우리의 훈련을 계속 전담할 모양이었다.

“야! 속도가 느리잖아! 발 멈추지 말고 달리라고!”

‘그게 가능하면 내가 자동차였겠지, 인간이겠냐고.’

나는 숨을 헉헉 몰아쉬며 잠시 고개를 흘끗 돌려 플라토 쪽을 쳐다봤다.

플라토의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 선임, 에이프릴.

그녀는 이 부대의 미친X이었다.

“휴우…. 애들이 너무 약해서 내 마음이 아파…. 역시 선임들이 애들을 제대로 도와줄 수 있도록, 한번 집합해서 다 함께 사이좋게 대화하는 게 좋겠다.”

“아닙니다! 신병들은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겁니다! 야, 달려! 달리라고!”

에이프릴이 속살거리는 목소리로 도대체 우리들의 상태가 왜 이러냐고 플라토에게 물을 때마다, 플라토는 땀을 뻘뻘 흘리며 훈련 강도를 높였다.

‘저 여자가 이 부대 생태계 최상위가 틀림없다….’

플라토가 놀라울 정도로 그녀에게 깍듯한 모습을 보면 그녀가 훨씬 고참인 데다가 성격도 만만치 않겠지.

XX, 제발 살려 줘….

“야! 낙오자 나오면 뒤진다! 연대 책임 모르냐?!”

그 말에 나는 진심으로 탈영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이종족이고 일반 인간들보다는 훨씬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종족 남자들보다 신체 능력이 좀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호호, 요즘은 마물이 성별도 가려서 공격하니?”

그러나 에이프릴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말한 탓에, 나는 아까부터 이를 악물고 연병장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XX, 낙오하면 선임들한테도 뒤지고 동기들한테도 뒤지게 생겼네.’

“열 바퀴 남았다!”

그 말에 허탈해진 내가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을 뻔한 순간, 단단한 손이 곧장 내 등을 받쳤다.

“계속 달려.”

내 귓가에서 뜨거운 숨이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 줄을 붙들고 다리에 힘을 주어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슬쩍 고개를 돌려 내 뒤를 받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 위까지 내려온 새까만 머리카락, 그 아래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다홍색 눈동자,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과 금방이라도 피가 흐를 것 같이 강하게 깨물어 붉어진 입술.

원작의 남주이자 내 동기, 아퀼라였다.

‘이거 혹시 로판 전개인가? 앞으로 날 계속 도와주고 챙겨주는?‘

내 머릿속에서 긍정 회로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어쨌든 나는 ‘남주들의 첫사랑’ 역할이니까 이걸 계기로 나에게도 로판 전개가 일어나고 이 개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나 다음 순간, 아퀼라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곧장 기대를 접었다.

“낙오자는 절대 안 돼.”

낙오자가 나온다면 그 새끼를 직접 죽여 버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응…. 그냥 연대 책임으로 함께 뒤질 걸 걱정했구나….’

역시 그렇지, 이게 군대지….

놀랍도록 건조한 아퀼라의 태도에 하루종일 모든 일을 부정하던 나는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야, 사루비아! 앞으로 네 인생에 로판 전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XX!

* * *

“와, 이게 되네.”

내 옆에 서 있던 이름 모를 동기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쩍쩍 갈라진 소리를 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되네….”

어떻게 이게 되는 거지?

놀랍게도 우리는 아무런 낙오자도 없이 연병장 오십 바퀴를 도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속도가 조금이라도 느려질 때마다 에이프릴이 환한 웃음을 유지한 채 플라토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뭐라 속삭였고, 플라토는 불타는 눈빛으로 우리를 노려보며 죽여 버리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을 본 우리는 끔찍한 미래를 피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줄 수밖에 없긴 했지만….

“역시, 폭력과 공포만이 우리 모두를 구원한다.”

우리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만난 사람들처럼 물을 벌컥벌컥 마실 때, 에이프릴은 우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거 이 부대 공식 구호였냐고….’

“그래도 이번 기수 애들은 꽤 괜찮은 것 같지 않습니까? 많이 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다음 마물 습격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제구실은 할 수 있게 만들어 놔.”

에이프릴이 연녹색 눈으로 우리를 쫙 훑어보았다.

“내가 보기에 저쪽은 꽤 쓸 만해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플라토?”

“제가 보기에도 저놈은 계속 훈련시키면 충분히 성과가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눈빛이 향한 곳은 바로 아퀼라였다.

나와 내 다른 동기들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을 때, 아퀼라는 홀로 힘든 티도 내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임들에 대한 적개심이 보이는 것도 아닌, 원작에서도 자주 묘사되었던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너 이름이 뭐냐?”

“아퀼라입니다.”

“솔직히 너는 앞으로 알아서 잘 살아남을 것 같아서 별로 걱정은 안 되는데.”

에이프릴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동기들도 네가 좀 잘 챙겨 줘. 여기에서 동기만큼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거거든.”

그 말에 아퀼라는 고개를 쓱 돌려 우리들을 쳐다봤고.

그가 우리를 훑어보던 순간에, 나는 아퀼라와 눈이 마주쳤다.

‘저거 왠지 탐탁지 않은 눈빛인데.’

로판에서 남주가 여주를 처음 만났을 때 “네 도움 따윈 필, 필요 없어!”라든가 “흥, 약해 빠지게 생겼군.” 따위의 대사를 하며 좋지 못한 첫인상을 보이는 것은 꽤 흔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남주가 진심으로 짐 덩어리를 보는 듯한 한심한 눈빛으로 여주를 쳐다보는 소설은 읽어 보지 못했다.

그래, 네 동기가 군대에서 도움이라고는 전혀 안 될 무능한 자식이라서 미안하다,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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