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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화 (3/233)

아니, 그런데 생각해 보니깐 또 빡치네. 도대체 로판에 빙의했는데 내가 ‘군대 동기들’ 같은 말은 왜 쓰고 있는 거지?

“자, 앞으로 너희의 국경방위군 생활에 대해 짧은 안내 사항 전달한다.”

우리와 함께 수레를 타고 왔던 남자가 매서운 눈빛으로 우리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는 우리 선임이 아니라 소대장이었다.

‘대체 이 세계가 로판인데 내가 선임이라던가 소대장이라는 말을 왜 쓰고 있는 거냐고.’

“이 중에는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계약 마법이 발현되고 신고당해 끌려온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려 해 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말에 훌쩍거리던 어떤 동기는 눈물을 멈췄고.

“어차피 마법으로 인해 탈영이 불가능한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알 테고.”

내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나마 너희에게 위안이 되는 소식을 전하자면, 국경방위군은 수당이 꽤 높다! 너희의 근무에 대해 나오는 대가와 연금은, 너희가 다른 일을 했다면 평생 만져 보기도 힘든 돈일 거다!”

‘단체로 반란이라도 일으킬까 봐 수당은 많이 주는 모양이군.’

하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누가 마물과 싸우고 싶어 하겠는가…. 아니, 그리고 군대 8년이 말이 되냐? 복무 기간이라도 줄여 달라고, 좀.

“8년간의 근무를 마친다면, 너희는 3,000마크네를 받아 갈 수 있다!”

그 말에 모두가 놀란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들을 따라 내 눈도 저절로 동그래졌다.

3,000마크네, 그건 감히 내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

‘1,000마크네면, 수도에 집을 한 채는 살 수 있다고 들었어.’

그런데 3,000마크네면 수도에 집이 세 채? 돈을 이렇게 많이 줘도 되는 건가 싶은 금액이었다.

그래, 8년간 군 생활을 대가로 수도에 집을 3채나 가질 수 있다면, 이 악물고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금으로 나오는 돈도, 매달 생활비로 쓰고도 남을 만한 돈이고!”

‘연금, 저것도 좀 혹하는데.’

이전 세계에서도 다들 안정적인 보수와 연금 때문에 공무원이 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쨌든 여긴 로판 속 배경이 되는 군대잖아. 내가 생각하는 군대랑은 조금 다를 거라고.’

긍정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분명 원작 여주는 이 군대에서 사랑이 싹트는 시간을 보냈다. 아까 그 선임은 그저 우릴 겁주기 위해 말을 좀 거칠게 했을 뿐이겠지. 아마도….

소대장은 이제 앞으로 우리가 겪을 계급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앞으로 너희의 8년의 복무 기간에 대해 설명하겠다! 첫 2년간, 너희는 훈련병이다! 이때 실전에 투입되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훈련을 주요 일과로 할 뿐이다.”

2년간 훈련병이라니, 이게 말이 되냐, XX.

“그다음 2년간, 너희는 일등병으로 근무하게 된다. 이때 부대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하게 된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어쩐지 익숙한 체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2년에는, 상등병으로 진급할 것이고.”

물론 전생의 나는 미필 여성이었으므로 군대에 대해서는 쥐뿔도 몰랐다.

하지만 텔레비전에서 인기를 끌던 군대 체험 예능 프로그램 덕분에 아주 기초적인 지식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냥 이병, 일병, 상병 같은 거 아니야…?’

의무 복무 기간 동안에, 군인들이 이병, 일병, 상병, 병장의 네 계급을 겪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로판 군대는 한 계급이 2년으로 늘어나는 말도 안 되는 체계일 뿐, 어쨌든 결과적으로 계급의 구조는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XX, 이거 진짜 군대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X된 것 같다는 불길한 직감이 떠나질 않는다.

‘아니, 그래도 이거 로판 군대잖아. 여주는 여기서 로맨스도 찍었잖아….’

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래고 있을 때, 소대장은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계급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2년 동안에, 너희는 이 부대를 떠나 각자 맡은 부대로 흩어져 지휘사관의 역할을 한다.”

이건 내가 아는 군대 체계와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지휘사관? 그건 일반 병사보다는 간부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걸 뭐라고 불렀지? 조교? 아니, 부사관이었던가?’

아빠가 술만 마시면 맨날 똑같은 군대 썰들을 풀어놓고는 하셨는데, 내가 그 썰을 직접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지.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잘 들어 놓을걸.

“자, 너희 중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왜 굳이 다른 부대로 흩어지는가. 그리고 그렇게 많은 병사들이 지휘사관이 된다면 좀 이상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며 소대장이 씨익 웃어 보였다. 어쩐지 불길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때까지 여기 있는 모두가 살아남지는 않을 테니, 과잉 인력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상으로 설명 끝.”

순간적으로 싸한 분위기가 공간 전체에 퍼졌다.

‘XX, 그래, 돈이 남아돌아서 3,000마크네를 퍼 줄 리가 없지.’

그때까지 살아남은 병사들은 많지 않으니 제국의 금고도 바닥나지 않겠지, 응….

원작의 사루비아, 내가 환생한 이 몸도 그런 이유로 죽었겠지…. 마물과 싸우다가….

XX, 내 로판 돌려줘요.

* * *

오늘은 내 제대까지 2920일이 남은 날이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나는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를 꽤 몰입해서 읽었다.

소설은 약 130화 정도로 딱히 길이가 긴 편이 아니었고, 작가는 아주 간결한 필체와 쉬운 단어들을 사용하여 머리를 별로 굴리지 않고도 글을 이해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앞에서 나온 떡밥은 3화 이내에 회수되었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전 내용을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화마다 끊는 솜씨도 아주 일품이었다. 다음 화를 결제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실력이었다.

거기다가, 이 소설의 남주들은 아주 외우기 쉬웠다.

솔직히 닥치는 대로 읽어 대는 로판 헤비 독자라면, 수많은 남주와 서브 남주들의 캐릭터를 헷갈리는 일은 아주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았다.

음, 얘가 불 속성 남주. 얘는 누구였지? 아, 쿨 속성 서브남1. 얘는 다정흑막 서브남2, 그리고 얘는 귀여운 서브남3.

역시 고전이 최고다. 모두의 머릿속에 캐릭터성을 단번에 각인시켜 주니까.

하여튼, 그런 이유로 나는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를 하루 만에 결제해서 완결까지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소설을 그냥 가볍게 읽고 말았지만, 군부 배경과 판타지적인 능력이라는 특이한 설정 덕분인지 마니아층도 꽤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소설에서의 군대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네가 이번에 새로 들어온 병사인가?”

“네, 반가워요! 달린이에요!”

“…요? 교육 안 받았나?”

“아, 맞다! 반갑다! 달린이다!”

“뭐?”

“반갑다! 이렇게 하는 거 맞지 않나?”

“…푸하핫! 하하, 오랜만에 웃긴 신병이 들어왔군!”

원작 여주 ‘달린’은 선임에게 반말을 찍찍 하면서도 귀엽다고 모두의 웃음을 자아냈고.

“흑흑….”

“달린, 무슨 일이지?”

“저, 검, 검을 잃어버렸습니다….”

“…공용 물품을 잃어버려서 울고 있었던 거군.”

“흑흑, 네…. 이제 어떡합니까…?”

“…일단은 내 것을 주지.”

“네, 네?”

“내가 잃어버린 것으로 해 두겠다.”

“하, 하지만 그러면….”

“…됐어, 아무 얘기도 하지 마라.”

달린이 공용 물품을 잃어버리면 남주들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번에 자신의 것을 내밀었고.

“저, 이, 이건 어떻게 합니까?”

“…검에 기운을 어떻게 담는지, 안 배웠나?”

“아, 아직 잘….”

“괜찮다. 내가 도와주지. 검에 손을 올려 봐라.”

“감사합니다, 헤헤!”

“자, 꽉 잡고… 그대로 휘둘러!”

“꺄앗!”

“…어때, 이제 어떻게 하는지 감이 좀 오나?”

“네! 그, 그나저나 아까 제가 기운을 쓰지 못해서 놓친 마물은 어떻게 합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 그건 우리들이 알아서 처리해.”

달린이 과연 마물을 처리하긴 하는가? 유감스럽게도 나는 달린이 일을 제대로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깐 원작 여주 이거 미친 고문관 아니냐? 거의 전설급인데?’

어쨌든 원작 여주 달린의 능력치와는 별개로, 내가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에서 보아 왔던 군대는 그런 모습이었다.

선임들과 후임들이 서로 장난치며 하하 호호 웃고, 능력 있는 남주들이 여주의 잘못을 커버해 주고, 마물 잡으러 보냈더니 남주들의 마음만 잡아서 오는… 그런 곳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갑자기 이게 군대 부조리 고발물이 됐냐고.’

로판에 빙의해서 “꺅! 원작 남주가 갑자기 나한테 집착을?”을 외치는 여주들은 내가 환생한 이 세계로 한번 빙의를 해 봐야 한다. 그래야 집착 남주 로판은 양반이었음을 깨닫게 되겠지.

난 지금 남주들 중 한 명이 나한테 집착ㆍ감금을 시전한다면 얌전히 감금될 의향도 있다.

군대에 감금되는 것보다는 남주의 안락하고 호화로운 집에 감금되는 게 낫겠다, XX.

‘혹시 이거 평행세계 같은 건가? 여기 로판 세계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 소설에 나왔던 군대랑 좀 다른 것 같은데?’

라고 내가 플랭크 자세 비스무리한 것을 몇십 분째 유지하며 생각했다.

저절로 몸이 덜덜 떨려 오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지만, 방금 자세가 무너진 동기 하나가 구르기 시작한 것을 보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봐 봐, 너희 안에 이토록 놀라운 잠재력이 있었는데, 너희는 모르고 있었던 거란다.”

우리가 바들바들 떨면서도 어떻게든 악과 깡으로 버티는 모습을 본 선임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직 폭력과 공포만이 우리 모두를 구원한다.”

‘XX, 이게 지금 로판에서 나올 대사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계는 뭔가 잘못됐다. 오늘 이 말을 머릿속으로 오십 번쯤 한 것 같긴 한데, 나는 그만큼 진심이다.

“좋아, 그만.”

드디어 우리를 구원해 주는 목소리가 들림과 함께, 우리는 동시에 온몸에 힘을 풀며 땅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누가 누우랬어? 야, 당장 일어나.”

‘XX….’

욕을 안 하고는 도무지 살 수가 없다, XX.

인상을 가득 찌푸린 채 자리에서 비척거리며 일어날 때, 나는 바로 옆에서 몸을 일으키던 동기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아.’

눈 바로 위까지 내려와 이마를 덮고 있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싸늘하고 날카롭게 눈꼬리가 올라가 있는 주황색 눈.

내가 열일곱이었는데, 아직 완연한 성인의 느낌이 나지는 않는 걸로 보아 나이는 내 또래 같았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는 사나운 느낌이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새침한 고양이 같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고요한 주황색 눈동자는 오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얘가 아마도….’

내가 이 세계가 ‘네미집’임을 깨닫게 해 준, 원작 남주 아퀼라.

원작에서 말수가 적고 인내심이 깊다고 묘사된 그는, 지금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도 탈영하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너도 인간이구나.

나한테 집착하기는커녕, 이대로 가다가는 원작 남주가 나보다 먼저 탈영해 버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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