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루비아! 사루비아, 어디 있니?!”
“네, 지금 가요!”
그러니까, 처음 이 세계에 빙의했을 때 나는 웬 고아원에 있었다.
그때는 이 세계가 로판 속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냥 로판풍의 세계 속에서 인생 2회차를 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내가 빙의한 이 몸의 기억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빙의한 게 이 몸의 원래 주인에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냐하면 이 몸의 주인은 부모 없는 고아로 태어나 고아원에서 험하게 자라고 있었으니까.
이상하게도 로판 속에서는 원장이 아이들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으로 나오고, 고아원의 아이들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원장에게 학대당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경향이 있다. 그게 다 작가들의 고아원에 대한 편견이겠지.
그렇지만 여기서는 그 편견이 사실이었다, XX. 지금 생각해 보니 로판 세계의 클리셰가 발동되었던 듯하다.
“사루비아! 내가 아까 실비아를 씻기라고 말했지 않았니? 왜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죄송해요, 아직 빨래를 끝내지 못해서요.”
“너는 도대체 손이 왜 이렇게 느려, 어? 그 나이쯤 먹었으면 그 정도 일은 금방 끝낼 수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네가 늘 꾀나 부리니깐 일머리가 그렇게 없는 거다!”
“죄송해요.”
이 몸의 이름은 사루비아, 나이는 올해 열일곱.
고아원에서 온갖 잡일이란 잡일은 전부 맡으며 살아가고 있다.
‘뭐, 그래도 다른 애들보다는 처우가 나으니 다행인 건가?’
원장은 본인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거리낌 없이 아이들에게 매를 들고는 했다. 그렇지만 나만큼은 예외였다.
물론 그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이가 차면 팔아넘기려는 거겠지.’
내가 빙의한 이 몸, 사루비아는 예뻤다. 그것도 아주 더럽게 예뻤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코랄색의 머리카락에 금빛 눈, 고생을 해서 좀 거칠기는 했지만 잡티 없이 하얀 피부, 사랑스럽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한 떨기 꽃 같은 가녀린 인상의 미인.
객관적으로 봤을 때, 사루비아는 길을 걷기만 해도 모두가 돌아보는 미인이었다.
‘이런 머리색을 가진 애는 고아원에서 사루비아 얘가 유일하기도 하고.’
내가 빙의한 사루비아의 외모를 보고 이곳이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로판풍의 가상 세계라고 확신하기는 했지만, 고아원에 있는 다른 아이들의 외모는 지극히 평범했다.
머리카락 색은 갈색, 금색, 검은색, 붉은색…. 눈 색도 갈색, 파란색, 초록색 등….
어쨌든 모두 자연적으로 나올 수 있는 색깔이었다는 얘기다. 비현실적인 산호색 머리카락과 금빛 눈을 가진 이는 사루비아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예쁘고 특이하게 생겼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지.’
부모 없고 신분 미천한 여자애는 예뻐 봤자 도움되는 일이 없다. 이 세계에는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
원장이 사루비아를 어릴 때 팔아넘기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예쁘고 어린 여자애에 대한 수요는 꽤 높으니까.
‘혼기가 차면 귀족의 첩으로 팔려 가거나, 아니면… 더 안 좋은 장소로 팔리겠지.’
대충 눈치를 봐서 이 고아원에서 도망치거나 해야겠다. 아니, 그런데 이 얼굴을 한 여자애가 혼자 살아 봤자 별로 좋은 일들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내가 이 몸의 주인에게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느 날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원장이 시킨 청소를 하느라 거대한 서랍장 아래에 손을 넣어 닦다가,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거 힘주면 밀릴 것 같은데?’
그리고 나는 그 거대한 서랍장을 밀어 버렸다.
성인 남성도 혼자 힘으로 밀지 못할 것 같은 거대한 서랍장을.
혼자서는 숟가락도 못 들 것 같은 가녀린 얼굴로, 거대한 서랍장을 전혀 힘들이지 않고 밀어 버린 내 모습에 조금 괴리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깐 이 몸… 한 번도 체력적으로 지친 적도 없었고 힘이 부족했던 적도 없었지….’
왠지 불길했다.
이 능력이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예쁘고 신분 낮은 고아 여자애’라는 설정에 ‘특이한 능력을 가진’이라는 설정까지 추가되면 내 미래가 결코 평탄할 것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고아원에서 얌전히 지내려고 했지만….
“이게 뭐지?”
어느 날 내 손목에 금빛 문신이 나타났던 것이었다.
마법처럼 갑자기 나타난 그것은 내 손목에서 빛을 발하더니, 내 혈관을 타고 점점 올라가며 팔을 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거 어쩐지 불길한….’
“사루비아!”
그 순간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내가 흠칫하며 팔을 뒤로 감췄다.
어느새 나타난 원장이 번뜩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드디어 때가 됐구나!”
“무, 무슨 때요?”
내 입에서 멍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입대할 때 말이다!”
“네, 네?”
뭔가 이상한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이전에 너에게 몇 번이나 설명해 줬지 않니? 너는 이종족이니, 입대를 해야 할 순간이 올 거라고. 네 계약 마법이 이제 효력을 발휘했나 보구나? 가자, 내가 데려다주마.”
“어, 어디를요? 제가 입대를 왜 해요?”
이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내가 원장의 옷깃을 붙잡고 물어보았으나, 원장은 내가 다 알면서 현실을 부정하려는 것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래, 내일 출발할 테니 하룻밤 쉬고 있으렴. 뭐, 계약 마법도 하루 정도는 참아 줄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한 원장은 방을 나가더니 방문을 잠가 버렸다.
“호호, 쟤가 자원입대하지 않고 내가 신고한 걸로 처리하면 포상금을 받을 수 있겠지.”
문 너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대체 뭔데요?!”
나는 애타게 소리쳐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국경방위군에 붙잡혀 와 있었고, 이 세계는 로판풍 세계가 아니라 진짜 내가 읽은 로판 속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었다. XX.
* * *
원장이 나를 국경방위군으로 끌고 온 시점에서, 나는 세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 이 비현실적인 머리 색과 눈 색은 사루비아가 이종족이기 때문이었다.
둘. 이 비현실적인 신체 능력도 사루비아가 이종족이기 때문이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루비아가 이종족인 것은 나 빼고 모든 고아원 애들이 다 알고 있었다….
어쩐지 애들이 가끔씩 나를 불쌍하다는 눈으로 보더라. 나 빼고 다 내가 곧 입대할 운명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루비아 양, 맞나?”
“맞습니다.”
나는 내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충 입대를 관리하는 군인 같았는데, 나는 이 세계의 군 계급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므로 그의 견장을 보고 있다고 해서 계급을 알 수도 없었다.
“팔은 좀 괜찮나?”
“안 괜찮습니다….”
내 손목에 금빛 문신이 나타난 뒤부터, 내 왼쪽 팔은 시큰거리며 아파 오고 있었다.
그 통증은 점점 심해져서, 원장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이 고통을 해결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내가 원장을 재촉할 지경이었다.
앞에 앉아 있던 남자는 내 손목 위에 자신의 손을 얹더니, 알 수 없는 언어로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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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주문 같기도 하고, 저주 같기도 한 기이한 발음이었다.
그의 중얼거림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문득 내 팔에서 더 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혈관 모양으로 빛나던 금색 문신은 어느새 자그마한 크기로 줄어들어 손목 부근에만 작게 남아 있었고, 더 이상 문신은 빛을 내지도 않았고 팔에 고통을 주지도 않았다.
“자, 이제 계약이 성사되었으니 더 이상 통증은 느껴지지 않을 거다. 다만, 중간에 탈영하거나 허튼짓을 할 경우….”
그렇게 말한 남자가 한 손을 들어 팡 하고 터지는 듯한 모션을 만들어 보였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탈영하면 X된다는 건 잘 알겠다….
“저…. 질문이 있는데요.”
그 말에 남자가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올리며 나를 노려봤다.
“…질문이 있습니다.”
망할, 질문 하나 하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말해 보도록.”
“제가 입대를 왜 하는 겁니까?”
그 말에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억울해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너희의 선조가 맺었던 계약 마법으로 인해, 너희의 피를 타고 계약 마법이 전해져 내려온다. 일정한 때가 되었을 때 계약 마법이 효과를 발휘하고, 국경방위군에서 복무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남자가 목을 슥 긋는 동작을 했다.
‘그러니깐 나는 이종족이라는 존재고, 이종족한테는 계약 마법이 걸려 있어서 강제 복무를 해야 한다는 거구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합리한 설정이지만, 어쩐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익숙한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내 미래에 대해서부터 먼저 생각해 보자.
“그… 계약이 언제 끝납니까? 그러니까, 언제 제대합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간결했다.
“8년이다.”
XX, 그냥 미래가 없잖아.
* * *
그리하여 그 남자에게 설명을 들은 후, 나는 다른 이종족들이 모여 있는 ‘입대식’이라는 것에 참가한 후 이 세계가 ‘네미집’ 속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마침내 내가 지낼 부대에 도착한 것이었다.
원작 ‘네미집’을 읽을 때 나는 이 소설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대충 넘기고 남주들과 여주의 로맨스에만 집중했는데, 빙의하고 보니 이 세계관은 정말 X같았다.
이종족들은 마물이 득실대는 땅에서 살아가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들도 우수한 신체 능력을 이용하여 마물을 무찔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마물의 수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증했고, 때마침 발달한 문명을 가진 아돌브 제국이 이종족들의 땅에 침입했다.
그 결과 이종족들은 패배하고 아돌브 제국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 것이다.
이때 이종족들은 아돌브 제국과 마법을 이용한 일종의 노예 계약을 맺게 되는데, 충분한 힘을 갖췄을 때 아돌브 제국을 지키기 위해 8년간 복무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계약 마법은 피를 타고 흘러 내가 빙의한 이 몸, 사루비아에게서도 발현되었고.
‘아니, 그렇다 해도 8년은 좀 오바 아니냐?’
이 미친 아돌브 제국의 황제를 내가 언젠가 암살하고야 말겠어.
‘탈영하고 싶다. 계약 마법 때문에 탈영하지 못하는 건 알지만, 격렬하게 탈영하고 싶다.’
내가 간절히 탈영을 외치는 동안에도, 내 발걸음은 다른 동기들을 따라 착실하게 움직였다.
어느새 나는 동기들과 함께 낡은 건물 안에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