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군부물 로판에 빙의했는데 로맨스가 안 보인다
“제군들, 우리 국경방위군에 입대하게 된 것을 환영한다.”
나는 아연한 표정으로 단상 위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기는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국경방위군은 아돌브 제국의 국경을 수호하는 아주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다. 이 제국의 운명과, 제국민들의 안전이 여러분의 손에 달렸다.”
도대체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거지.
“여러분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훌륭한 군인이 되기는 아직 멀었군. 하지만 여러분들도 훈련을 거친다면 모두 이 제국을 지킬 만한 충분한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훈련?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자, 긴말은 하지 않겠다! 오늘 하루 여러분들이 할 일이 많으니! 이만, 각 부대로 이동하도록!”
나를 둘러싼 이 모든 환경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흙먼지가 날리는 연병장과, 단상 위에 서 있는 군복을 입은 사람과, 그 연병장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내 또래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나와 같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다.
우리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어리바리한 태도로 주위를 둘러보던 순간, 나는 바로 앞에 서 있던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흑발에, 붉은빛을 띠는 주황색 눈을 한 남자애였다.
눈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었고 입은 굳게 다물려 있어서 어쩐지 새침하면서도 사나워 보이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잠깐.
여기가 군대인데, 그 사이에 있는 흑발에 주황색 눈의 남자애라고? 게다가 고양이상이야?
이거, 왠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익숙한 묘사다.
“아.”
그 순간 번개 같은 깨달음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어쩐지 며칠 전부터 자꾸 낯익은 단어들이 내 귀에 들린다 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여기….
군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판타지 소설,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 속인 것 같다.
* * *
그러니깐 그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 줄여서 ‘네미집’은 평범한 로맨스판타지의 구조를 띠고 있었다.
아돌브 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주인공은 사실 제국민들과 다른 민족으로, 일명 ‘이종족’이다.
이종족은 눈에 띄는 화려한 외모를 하고 있으며, 또한 제국민들과 구별되는 엄청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이종족은 과거 아돌브 제국에 합병되면서 마법을 사용해 강제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아돌브 제국을 지키기 위해 복무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는 설정이었다.
하녀 일을 하며 살아가던 여주인공도 마찬가지로 계약 마법이 효력을 발휘하며 국경방위군에 입대하게 된다.
국경방위군은 제국의 북쪽 국경을 지키는 일을 하며, 국경 너머에서 마물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강한 신체 능력을 가진 이종족들이 국경방위군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주는 그곳에서 네 명의 남주들을 만나고, 여느 로맨스판타지가 그렇듯 네 명의 남주들은 모두 여주에게 집착한다….
‘남주들 캐릭터는 뻔하지, 뭐.’
작가는 남주들의 캐릭터를 아주 고전적인 방법으로 설정했다.
남주1, 말수가 없고 사납게 생겼으며 미친놈임. 남들에게는 차갑겠지만 내 여자에게는 다정하겠지 어쩌구의 면모를 가지고 있음. 불 속성.
남주2, 싸늘한 아이스 가이. 모든 일에 쿨함. 완벽주의자이고 말을 잘 하지 않아서 딱딱하게 느껴짐. 얼음 속성.
남주3, 다정하고 부드러움. 그런데 최신 트렌드에 따라서 겉으로는 다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흑막에 가까운 어쩌구임. 어쨌든 미친놈임.
남주4, 강아지 같은 연하남. 아주 귀여움. 물론 여주를 건드리면 미친놈이 되는 어쩌구.
한마디로 그냥 고전적인 F4 구조에 ‘집착하는 미친놈’ 설정을 추가한 것이다.
그리고 남주들이 여주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도 상당히 고전적인 수법이다.
“너는… 오래전에 죽은 그 애를 닮았군.”
그렇다. 여주는 몇 년 전 국경방위군에서 남주들의 동료였지만 전투 중 죽고 만 누군가를 닮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남주들의 첫사랑이기 때문에, 남주들은 자신들의 죽은 첫사랑을 떠올리며 여주에게 집착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 망한 것 같은데.’
내가 이 로판의 여주인공에 빙의한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너는… 오래전에 죽은 그 애를 닮았군.”
그렇다. 나는 ‘그 애’ 역할로 빙의했다.
남주들의 죽어 버린 첫사랑으로, XX.
* * *
“하아….”
덜컹거리는 수레에 실려 이동하며, 내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 나는 앞으로 복무하게 될 부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나의 ‘동기’들과 함께.
이 수레에 타고 있는 동기들은 나를 빼고 총 일곱 명. 모두 하나같이 띨띨하고 어리바리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 건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어떤 남자애는 눈물을 찔끔 흘리기까지 했다.
“그래, 지금 실컷 울어 둬라.”
함께 수레에 타고 있던 남자가 우리를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우리들을 관찰하는 듯한 모습과 입고 있는 저 군복을 보면 우리들의 선임인 모양이었다.
“부대에 도착하면 울 시간도 없을 거다.”
그동안 나는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나는 로판에 빙의했으니, 마땅히 로판의 법칙을 따르게 될 것이다.
우선 ‘죽어 버린 첫사랑’이 되기는 싫으니, 죽지 않기 위해서는 이 부대를 빠져나가야 할 것이고.
그 후에 남주들이 나를 찾아내면 “갑자기 나한테 집착을? 어라, 원작이 바뀌었다?” 같은 대사를 치면 될 것이다.
‘음, 아무리 그래도 집착은 싫은데.’
집착 남주가 인기 있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집착남은 취향이 아니었다….
그때, 수레가 크게 덜컹거리더니 마침내 멈춰 섰다.
“야! 내려라, 신병들아!”
우리는 어리바리한 표정을 하고 수레에서 땅으로 내렸다.
그러자 수레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선임이 대번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것들이, 빠져 가지고! 정신 안 차리냐!”
아, 그런데 이거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이번 신병들은 쓸 만한 놈이 안 보이네, XX!”
착각이 아니라, 이건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나?
“에휴, 내가 저 멍청한 애들을 관리해야 한다니…. 야, 빨리 안 내리냐?!”
아니, 아니, 보통 로판에서는 이런 대사 안 나오잖아. 이거 분명 군부 배경 로판이었잖아.
“첫날부터 흙탕물에 머리 박고 시작할까, 어?”
…이전에 했던 발언을 철회하겠다.
집착남이든 뭐든 아무 상관없다.
원작을 피한다? 지금 그런 게 대수냐? 그냥 차라리 집착 남주한테 집착받는 게 낫겠다.
‘XX, 이건 그냥 군대잖아.’
뭐야, 내 로판 돌려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