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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89)화 (189/190)

에필로그 3화

드래곤들은 앉은 자리에서 정말 그 많은 술통을 다 비웠다.

드래곤도 술에 취하나 싶었는데 취하더라. 같은 드래곤이 빚은 술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벨키오르의 배려로 속도를 조절한 은새는 제법 취하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또렷한 정신을 유지했다.

신역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드래곤들을 수습하는 건 벨키오르의 몫이었다.

한숨을 쉰 그는 마법으로 드래곤들을 하나하나 레어로 돌려보냈다.

신역에서 재울 수도 있었지만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위그드라실이 허락해도 벨키오르가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나서기 전에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세크레온을 아케이아가 둘러업었다.

가냘파 보여도 그녀는 드래곤이었다. 귀여운 반려를 챙기는 건 당연했다.

그 모습을 본 벨키오르가 인상을 썼다.

“교활하군. 동족들을 일부러 끌어들인 건가?”

“안 그랬으면 수백 년쯤 나를 안 볼 작정이었잖아.”

벨키오르를 너무도 잘 아는 아케이아였다.

“나는 그때 그 일을 아직 잊지 않았다.”

“그래. 하지만 언제든 조언이 필요하면 찾아와.”

그 말을 남긴 채 아케이아는 세크레온과 함께 마지막으로 신역을 떠났다.

어쩌다 둘의 대화를 듣게 된 은새가 벨키오르에게 물었다.

“아케이아 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별일 아니다. 그대는 신경 쓸 것 없어.”

벨키오르가 보기 좋게 붉어진 은새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때 그 일이란 아케이아가 벨키오르를 신계에 붙잡아 두어 하마터면 은새가 반쪽짜리 신 때문에 위험에 빠질 뻔했던 사건이었다.

반려가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벨키오르는 지금도 머리의 피가 식었다.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이 궁금했으나 은새는 더 묻지 않았다.

‘금방 화해하셨으면 좋겠네.’

술자리가 길어졌기에 별이와 마수들은 위그드라실의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잠들어 있었다.

위그드라실이 말을 건네 왔다.

[은새, 괜찮니?]

“네, 저는 괜찮아요. 벨키오르 님이 저 대신 많이 마셔 주기도 했고, 동족분들이 유쾌해서 즐거웠어요.”

[벨키오르를 아주 좋아하는 아이들이란다.]

“그래 보였어요.”

은새가 배시시 웃었다.

벨키오르가 아무리 싸늘한 반응을 보여도 동족들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벨키오르도 동족들이 온 게 정말 싫었으면 자리를 피하거나 추방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그들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 줬다.

인기척을 느낀 쪼쪼가 고개를 들었다. 은새가 손을 뻗자 쪼쪼가 날름날름 핥았다.

“쪼쪼, 애들 돌봐 줘서 고마워.”

매애.

쪼쪼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은새는 별이와 마수들을 챙겼다.

벨키오르의 레어로 옮기고 난 뒤 은새는 조명의 빛을 어스름하게 조절했다.

“눈나, 소시지가 엄청 커요…….”

별이가 잠꼬대하는 걸 들은 은새가 속으로 쿡쿡거렸다.

별이가 뒤척이지 않을 때까지 토닥여 주다가 문을 닫고 나왔다.

드디어 은새와 벨키오르, 둘만의 시간이었다.

씻고 나온 은새는 벨키오르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이 세계에 온 뒤로 벨키오르와 떨어져 자 본 적이 없기에 은새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벨키오르가 팔을 벌려 품을 열어 주었다.

“오늘은 왠지 하루가 길었어요.”

“불편했다면 동족들이 다시는 이곳에 못 오게 하겠다.”

“왜요? 약간 놀라긴 했지만 즐거웠는데……. 몰랐던 벨키오르 님 얘기를 들어서 좋았어요.”

벨키오르가 은새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벨키오르의 손가락 사이로 엉킴 없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말해 주어 고맙군.”

“동족분들을 소개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해요.”

드래곤들이 자신을 ‘벨키오르의 반려’라고 부르는 게 내심 좋았던 은새였다.

주변인들의 제대로 된 인정을 받은 것 같다고 할까.

벨키오르의 턱에 머물렀던 은새의 시선이 스르륵 내려왔다.

울대가 도드라진 목을 지나 느슨하게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가슴,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반려의 인이 보였다.

자신의 몸에도 저것과 똑같은 게 새겨져 있었다.

볼 때마다 감동이 밀려왔다. 은새가 반려의 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벨키오르는 그녀가 하는 걸 잠자코 지켜봤다.

“아직도 안 믿겨요. 이 작은 표식이 벨키오르 님과 저를 이어 주고 있다니.”

“반려의 인이 생기고 나서 변화가 있었나?”

“음……. 벨키오르 님의 감정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된 거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실에 연결된 것처럼 벨키오르 님이 어디에 계시든 알 것 같아요.”

반려의 인이 일으키는 감정 전이 현상은 은새가 말한 것처럼 결코 가볍지 않았다.

미처 말하지 않은, 스쳐 지나가는 단편적인 감정마저 반려와 관련된 것이라면 모두 상대방에게 전달됐다.

눈빛만으로 소통할 수 있는 사이라는 건 듣기에는 로맨틱해도 숨기고 싶은 감정까지 모두 전달하는 통에 은새는 곤혹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민망해…….’

이 감정마저 벨키오르는 알고 있겠지.

고개 숙인 은새를 내려다보던 벨키오르가 머리를 기댔다.

“그래,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러니 왜 아까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말해 주겠나?”

“네? 제가요?”

“그래. 네슬리안이 말했을 때.”

“아.”

무언가를 떠올린 은새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벨키오르에게 열렬히 구애했다는 어린 신.

얼굴도 모르고, 아마 앞으로도 마주칠 일 없는 그 신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사소하고도 확실한 질투였다.

“그게, 벨키오르 님이 살아 온 세월에 비하면 저희가 만난 건 아주 짧잖아요. 그래서 줄곧 함께해 온 동족분들이 부럽기도 했고…… 저.”

“…….”

“벨키오르 님께 구애했다는 신의 얘기를 들으니까. 그분 말고도 더 있었겠죠? ……우리가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좋았을 뻔했어요.”

은새는 결국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과거를 질투한다고.

내가 없었던 시절의 그가 궁금하다고.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못 참고 은새가 등을 돌려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모르겠다. 연애할 때 어느 정도 감출 건 감춰야 관계가 오래 지속된다던데.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걸.’

“은새, 얼굴을 보여다오.”

“창피해요.”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네?”

의외의 말을 들은 은새가 이불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평소와 조금 다른 표정을 한 벨키오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움직여서 드러난 은새의 하얀 뒷덜미와 어깨에 입을 맞추고 아프지 않게 물었다.

“아…….”

반사적으로 은새가 입술을 깨물었다.

“드래곤들은 장생종인 만큼 허비하는 시간이 많아. 몇백 년쯤은 레어에 틀어박혀 동면하는 자들도 있지. 하지만 인간은 백 년을 살아도 모든 걸 불태우는 불꽃처럼 화려한 족적을 남긴다.”

“…….”

“사랑하는 이를 만나 자식을 낳고 번성하는 속도는 우리와 비교할 수도 없지. 은새, 내가 비록 그대보다 오랜 세월을 살았어도 나 역시 그대의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대의 친구들은 그대가 가장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그대 곁에 있었을 테니.”

“네?”

은새가 당혹스러워했다.

언제나 의연한 벨키오르가 질투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도 그에 비한다면 찰나나 다름없는 그녀의 과거에.

“그대를 조금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더라면 내 번민과 고독도 빨리 자유를 찾았겠지만 나는 지금과 똑같았을 거다.”

벨키오르의 애틋한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순간 숨 쉬는 걸 잊은 은새가 멍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벨키오르가 그녀의 귀를 깨물자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은새가 정신이 돌아와 바르작거렸다.

“흘러간 과거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내 미래는 그대의 것이다. 내 미래에 그대가 없는 날은 존재하지 않을 거야. 그대는 내 숨이며 심장이고 모든 것이니.”

“벨키오르 님.”

“그대가 알지 못하는 과거를 부러워해도 된다. 반려라면 응당 할 수 있는 생각이니 부끄러운 게 아니야. 나 역시 그럴 테니. 하지만 그대가 내 모든 것을 가졌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도록.”

은새를 마주 보는 자세로 돌려 눕힌 벨키오르가 반려의 인 위에 입을 맞췄다.

뜨거운 숨결에 은새가 몸을 떨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던 생각들이 지워지고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벨키오르 님, 저…….”

그녀가 하려는 말을 아는 것처럼 벨키오르가 손깍지를 꼈다.

신역에서의 밤이 깊어졌다.

***

“이번에는 보물찾기 하자!”

까악!

매애애.

꾸꾸.

위그드라실 주변에 별이와 마수들이 모여 있었다.

오동통한 뺨에 생기 넘치는 얼굴을 한 별이 보물찾기를 제안하자 강원도 집에서 종종 같이 하던 마수들이 호응했다.

듀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보물이라니. 어떤 보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린 수호자님?]

“여기서 가장 예쁜 보물을 찾아오는 거야~ 꽃도 좋고 예쁜 돌멩이도 돼! 알았지? 하지만 누나 마음에 드는 보물을 찾아야 해!”

[주인님의 반려님이요? 그렇군요!]

“그럼 가자! 와아아.”

별이가 뛰어가자 마수들이 신역 곳곳으로 흩어졌다.

큰 마수들도 열성적으로 은새가 마음에 들어 할 것들을 찾아 나섰다.

은새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벨키오르가 다가왔다.

“왜 그러지?”

“아, 친구들은 뒷수습으로 바쁠 텐데 저만 이렇게 평온하게 지내도 되나 해서요.”

“그들이 먼저 그대를 이곳으로 보내지 않았나. 그대 없이도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테니 걱정 말도록.”

친구들이 들었으면 비명을 질렀을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벨키오르가 은새에게 말했다.

“은새. 같이 가 줬으면 하는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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