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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88)화 (188/190)

에필로그 2화

“역시 알고 있었군.”

가느스름해진 눈으로 벨키오르가 아케이아를 지그시 응시했다.

본체화 상태로 은새를 마주해야 반려의 인이 나타날 거라는 것.

말하지 않은 이유야 짐작이 갔다.

예언을 다루는 아케이아는 늘 많은 말을 아꼈기에.

하지만 이번 일은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지켜보는 게 재미있을 거라는 판단에서 그런 것이겠지.

어차피 도달할 결론이라면 구태여 말을 얹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딘가 냉막한 기운이 감도는 벨키오르와 아케이아 사이를 번갈아 쳐다보던 은새가 자신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저! 그래서 왜 오셨나요?”

어떻게 왔는지는 알겠고 왜 드래곤들이 우르르 몰려왔는지 궁금했다.

기가 죽었던 세크레온이 금세 쌩쌩해져서 대답했다.

머리카락 색도 그렇고 이미지가 드래곤보다는 골든 리트리버를 떠올리게 했다.

“그야 당연히 술 마시려고 왔지! 자, 자. 벨키오르의 반려도 앉아. 어이! 몬텔라! 가져왔어?”

“하하! 당연하지. 모처럼 벨키오르도 자리했으니 내가 가장 아끼는 술을 가져왔네. 부족하지 않을 양이니 마음껏 마시게나!”

“역시 술은 몬텔라가 빚는 게 제일이지!”

“네? 술이요?”

풍요의 드래곤, 몬텔라가 풀밭 위에 끝도 없이 술통을 꺼내 놓았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술판에 은새는 드래곤들의 텐션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녀의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에 세크레온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처음 만난 사이에는 당연히 술이지. 내가 만났던 인간들은 다 그랬는데. 나는 그냥 경치 좋은 곳에서 마시고 싶은 것뿐이지만. 하핫! 혹시 술 못 마셔?”

“아뇨, 먹기는 하는데…….”

“그럼 됐네! 오, 몬텔라. 정말 좋은 술을 가져왔잖아? 오늘 같은 날에 딱이야.”

“칫, 술만 아니었어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술통을 다 털어 주마!”

동족들의 성화에 억지로 이곳에 끌려오게 된 투쟁의 드래곤 테살라가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술통을 집어 뚜껑을 땄다.

하지만 언뜻 산처럼 쌓인 술에 대한 기대감이 엿보았다.

인내의 드래곤 푸릴로와 이학의 드래곤 네슬리안도 빼지 않고 둘러앉았다.

성스러운 신역에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은새가 위그드라실과 벨키오르를 쳐다봤으나 세계수는 후후 웃음을 흘릴 뿐 제지하지 않았고, 벨키오르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새가 보는 앞에서 동족들에게 찬바람이 쌩쌩 날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

드래곤들도 그걸 알고서 뻗대는 것이었다.

“와하하! 그래서 그때 로드 표정이 어땠는 줄 알아? 와이번 창자라도 씹은 것 같았다니깐.”

“늙은이 성질 좀 그만 돋워라. 그러다 뒤로 넘어가면 어쩌려고 그래?”

“살 만큼 살았잖아. 로드도 은퇴할 때가 됐지.”

“하하…….”

드래곤들과의 술자리는 의외로 평범하게 흘러갔다.

간간이 블랙 조크도 날리며 은새가 대화에 끼기 쉽게 설명도 덧붙였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와 분위기가 거의 비슷했다.

‘신기해.’

평소 은새가 가지고 있던 드래곤에 대한 이미지와는 매우 달라 의외로웠다.

그때 얼굴이 취기로 달아오른 산체스가 술잔을 쾅 내려놓으며 말했다.

밀 색의 술이 그녀의 손등 위로 흘러넘쳤다.

“아무튼 어린 수호자가 효자지. 혼자 늙어 죽을 뻔한 아버지에게 짝을 찾아줬으니. 벨키오르! 드래곤의 수치로 남지 않아서 다행이야.”

“산체스……. 대체 그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냐.”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너는 진짜 아들한테 고마워해야 해.”

아마 산체스는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할 모양이었다.

별이 덕분이 은새를 만난 걸 부인할 생각이 없는 벨키오르였지만 자꾸만 오르내리는 ‘드래곤의 수치’ 운운에 한숨이 밀려 나왔다.

신념을 지키고 살아온 걸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그였다.

술을 종류별로 맛보던 네슬리안이 은근한 어조로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벨키오르한테 반해서 쫓아다니던 어린 신이 있지 않았어?”

“네? 신…… 이요?”

“눈이 단단히 삔 신이었던 거지! 저런 목석같은 놈이 어디가 좋다고.”

“테살라, 너는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어서 질투하는 거야?”

“닥쳐!”

이번에는 테살라 몰이였다.

그는 씩씩거리다가 술통째로 들고 들이부었다.

“아무튼 그때 엄청 열렬하게 구애했는데 벨키오르가 반려가 아니면 관심 없다고 딱 잘라서 거절해서 그 어린 신을 아끼던 신들이 한동안 벨키오르를 신계 출입 금지시켰잖아. 하하하, 그런 일로 출입 금지당하는 드래곤이라니.”

“네슬리안, 너는 신계의 꽃을 훔치러 갔다가 출입 금지당했잖아.”

“그건 내기였잖아. 우르슬라의 목걸이가 내기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절대 하지 않았어.”

“참, 그 얘기 들었어?”

잠시 스쳐 지나가는 화제였을 뿐인데 벨키오르에게 구애했다던 그 신에 대한 생각이 은새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른 존재도 아니고 신이라니.’

그 신 말고도 또 누가 벨키오르에게 접근했을지 상상력이 뻗어 나갔다.

콩깍지가 씐 생각일 수도 있으나 벨키오르는 어디로 보나 매력적인 사내임에 틀림없었다.

수천 년의 과거를 일일이 질투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빨리 그를 만나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남았다.

그리고 벨키오르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 왔을 드래곤들이 부러웠다.

“왜 그러지, 은새? 동족들이 그대를 언짢게 했나?”

“으응, 그런 거 아니에요. 잠깐 뭣 좀 생각했어요.”

마치 그러길 바란다는 투로 말한 벨키오르가 -그 핑계로 쫓아낼 셈이었다- 은새의 안색을 면밀히 살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속으로 삭이는 것처럼 보여서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물어봐야 할 듯했다.

“내가 용병으로 있었을 때 말이야!”

이제 드래곤들은 인간세계로 유희를 떠났을 때 있었던 일들을 떠들고 있었다.

퍽 흥미로운 주제라 은새도 상념을 내려놓고 귀를 쫑긋 세웠다.

“와, 그런 일이 있으셨어요? 버티신 게 대단하네요. 드래곤의 능력을 쓸 생각은 안 하셨어요?”

“유희 중에는 처음에 정한 한계 내에서 움직이는 게 보통이니까 말이야. 능력을 쓰면 모든 문제가 금방 해결되니 재미가 없잖아?”

“유희하면 또 벨키오르 얘기를 빼놓을 수 없지.”

조용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아케이아가 말문을 떼자 세크레온이 찰떡같이 받았다.

“아, 그거? 맞아, 맞아. 드래곤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사건이었지.”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벨키오르가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린 걸 눈치채지 못한 은새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은새가 관심을 갖자 세크레온이 기뻐하면서 조잘거렸다.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말해 줘야지! 드래곤이라면 첫 유희라도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숙지하고 떠나는 게 일반적이거든? 얘는 선대한테 쫓겨나듯이 유희를 나갔어. 그래서 엉망진창 어리둥절 유희가 되어 버렸지!”

“오…….”

“능력을 제어할 줄 몰라서 금방 인간들 사이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왕의 귀에도 벨키오르에 대한 얘기가 들어갔어. 엄청 대단한 마법사가 있다더라, 이렇게. 그래서 왕이 직접 얼굴 보자고 불렀는데 얘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세크레온이 벨키오르가 했던 말을 흉내 냈다.

“‘왕이 뭐라고 내게 명령하는 거지? 볼일이 있으면 직접 오라고 해라. 내가 그때까지 여기 머물지는 모르겠다만.’ 그 말을 듣고 왕이 가만히 있었겠어? 곧장 군대를 보냈지!”

은새가 정말 그랬냐는 시선으로 벨키오르를 쳐다봤다.

그는 세크레온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세크레온에게 그런 눈치가 있었으면 은새 앞에서 이런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고도 뭐가 잘못된 건지 몰라서 나중에는 산체스를 찾아갔다는 거야. 와하하!”

“맞아. 내가 한동안 벨키오르를 숨겨 줬었어. 정말 어이가 없었다니까?”

그때가 생각났는지 산체스가 피식피식 웃었다.

벨키오르의 유희 기간이 짧았다는 건 은새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벨키오르가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정말 왕한테 그러셨어요?”

“과거 일이다.”

“벨키오르 님도 그런 미숙한 시절이 있으셨군요.”

은새가 말갛게 웃었다.

그녀가 웃자 벨키오르는 세크레온에 대한 보복을 잠시 미뤄 두었다.

“누나~”

그때 드래곤들이 시끄럽게 구는 걸 듣고 마수들과 놀고 있던 별이가 다가왔다.

“별이야, 왜?”

“오오, 어린 수호자잖아! 이리 와 보렴, 우쭈쭈. 너무 귀엽다~”

“내 아들한테서 손 떼라.”

해츨링에게는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이는 드래곤들이 별이를 둘러싸고 둥개둥개 했다.

처음에는 낯을 가리던 별이는 이내 까마득한 어른 드래곤들에게 예쁨받는 걸 좋아라 했다.

“대대로 신역의 수호자들은 거푸집으로 찍어 낸 것처럼 비슷비슷한데 네 아들은 너랑 전혀 다르네. 반려가 키웠다더니 그 영향인가?”

“벨키오르 님이랑 별이랑 많이 닮지 않았어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생긴 거야 똑같지! 천 킬로미터 상공에서 봐도 얘는 벨키오르 아들 같잖아. 그거 말고 수호자들은 성격이 다들 냉막하다고 해야 하나. 고지식하고, 말수 없고, 정 없고, 재수도 없고.”

“벨키오르처럼!”

“맞아, 벨키오르처럼. 낄낄!”

오늘 드래곤들은 벨키오르를 놀리려고 단단히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벨키오르는 머리가 아파 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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